동로마제국의 광장(3)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가보면

이미 그리스시대부터 세워진 도시 비잔티온, 그 오래된 역사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두 번의 역사이다. 하나는 330년에 이루어진 동로마 제국의 수도로서의 천도이며 또 하나는 1453년에 일어난 오스만 투르크의 침략이다.이 두 사건은 유구한 역사 가운데 정치적, 종교적, 문화적으로 비잔티온을 가장 크게 변화시킨 사건이었다. 오늘은 그 가운데 첫 번째 역사인 로마제국의 수도 천도에 대해 알아보자.

4세기에 로마 제국은 정치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미 3세기 말경 현명한 황제의 아들로 등장하는 코모두스는 부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를 살해하고 정권을 찬탈한다. 배우 러셀 크로우가 아들 잃은 장군으로서 등장하는 영화 <글레디에이터>에서 모든 악역을 다 맡아 보여준 바로 그 황태자다. 영화에서는 황제 사후 얼마 안 있어 이 못된 황태자도 사망한 걸로 보여지지만 실제로는 그 후 10년 정도 통치를 했다.

그 뒤로 부터 로마제국은 내란이 끊이지를 않는다. 군인 출신의 황제들은 수없이 교체되고 반란은 끊이지 않았다.3세기 중반에는 50년간 즉위한 황제가 26명이었다. 평균 즉위기간 은 2년.

이 어려운 시기를 넘기고 확고한 정권을 잡은 황제가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 (284-305) 이다. 황제는 새로운 통치개념을 도입했다. 로마제국을 둘로 나누고 동쪽과 서쪽에 정, 부 황제 4명을 두어 다스리게 했다. 이른바 ?4분통치?라는 개념은 효과를 보아 로마는 잠시 평화로웠고 정치적으로 안정될 수 있었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20년간 로마를 통치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유례없이 제위를 평화적으로 양도 했지만 그 후임자들에 의해 로마는 다시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이때 서쪽 부황제의 아들은 콘스탄티누스 1세였고 동쪽은 리키니우스였는데 결국 이들의 운명적인 대결로 평화로운 분할 통치는 막을 내렸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동쪽의 통치자 리키니우스를 보스포루스 해협 건너까지 추격하여 대 승리를 거두었다. 324년의 일이었다. 그는 로마 제국에서 유일한 황제가 된 것이다. 그리고 곧 수도를 동쪽으로 옮길 궁리를 한다. 결국 황제의 최종 선택은 비잔티움 이었다.그런데 굳이 전통 있는 수도 로마를 버리고 새삼스럽게 동쪽으로 간 까닭은 무엇일까?

비잔티움은 당시 지중해 연안에서 세계 최고의 무역 중심지였다. 매일 같이 시장에서는 진귀한 보물이 거래되었다. 희귀한 향료는 이곳에서 밖에 구할 수 없었고 신비로운 비단은 오래전부터 이곳을 통해 들어왔다. 그리고 동방의 앞선 문화가 끊임없이 유입되었다. 자존심 세다고 하는 콘스탄티누스가 통일된 제국을 위해 오래된 도시를 버리고 새롭고 매력적인 이 도시를 선뜻 선택했다고 하는 것은 이런 점에서 충분히 이해가 된다.

이렇게 해서 세워진 신 로마제국은 후대에 ?동로마제국? 혹은 ?비잔틴제국?이라고 불린다. 현재도 터키의 전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중심가를 걷다보면 로마 제국시절의 유물들은 수없이 확인할 수 있다. 그 중심은 도시 한복판에 있는 광장 히포드롬이다 .

히포드롬 광장은 비잔틴제국의 박물관

히포드룸 (터키어로 아트메이단)은 그리스어로 말의 광장이라는 뜻이다. 콘스탄니누스 1세 시절 325년에 이미 있던 경기장을 확장하여 만들었다. 길이 400미터, 폭 120미터의 대형 광장으로 걷기에는 조금 크다. 전체 형태를 보기 위해 항공사진을 들여다보면 콘스탄티노플의 제일 중요한 유적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제일 중요한 ‘하기아 소피아 성전’, 그리고 그로부터 1000년 후에 지어지는 ‘블루 모스크’ 그리고 ‘광장’이다. 그런데 광장은 폭도 크지만 길이는 훨씬 길며 끝은 말발굽 형태로 둥글게 굽어져 있다. 왜일까? 로마에 있는 나보나 광장이 떠올른다.역시 이곳도 이륜 전차경기장이었다.

325년 콘스탄티누스 1세 시절 이미 있던 경기장을 확장했다고 하는 이 새로운 경기장은 40열의 관객석으로 10만명 까지 수용할 수 있었다.

이륜전차 경기에 당시 로마 시민들의 관심이 얼마나 열광적이었는지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래서 때로는 응원의 열기가 그대로 폭동으로 변해 버린 적도 있었다. 바로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 일어난 ‘니카의 대란’이다. 그리스어로 승리를 뜻하는’니카’를 외치며 군중들은 흥분했고 경기 끝난 후에도 열기는 고조되어 도시를 방화하고 약탈했다. 이때 기존에 있던 하기아 소피아 성전도 전소되었다.

지금 볼 수 있는 성전은 난동을 제압한 후에 새로 세운 것이다. 난동을 제압한 사람은 황후 테오도라의 뜻을 따른 유스티니아누스1세이며 이때 죽은 군중이 3만명이 넘었다고 하니 중국 천안문 광장 사태는 비교도 안되는 상황이다. 그 후에도 이곳에서 이륜전차 경기는 계속 열리다가 1200년 십자군 전쟁 이후부터 열리지 않았다.

경기장 문 위에는 금도금한 말 네 마리의 동상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지금은 베네치아 산 마르코 성당 위에 장식되어 있다. 베네치아군이 주축이 되었던 악명 높은 제4차 십자군 전쟁 때 이들은 베네치아군에게 빼앗겼다.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 앞의 카루젤 개선문 : 한때 베네치아에서 빼앗아온 청동 말이 세워져 있었으며 현재 세워진 말은 오리지날 말을 반환한 후에 새로 만들은 것이다.

1200년에 빼앗은 청동말은 600년 후에 다시 프랑스군에게 빼앗겨 한때는 루브르박물관 앞의 카루젤 개선문 위에 놓인 적도 있었다. 후에 프랑스가 빼앗은 청동말은 베네치아로 반환되었지만 베네치아는 현재도 터키에 반환하지 않고 있다.

히포드롬 광장에는 비잔틴 시대의 또 다른 유물이 세 개가 남아 있다. <테오도시우스의 오벨리스크>, <뱀의 원기둥>, <콘스탄티누스의 오벨리스크>가 그것이다.

광장그림에서 제일 멀리 있는 높이 20미터짜리 오벨리스크는 테오도시우스1세(379-395) 시절 이집트에서 가져온 것이다. 높이 6미터 단 위에 세워진 오벨리스크는 기단부에 4마리 말의 조각품이 새겨졌는데 4세기말의 작품이다.

그 다음에 서있는 뱀의 원기둥은 그리스군이 기원전 5세기에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이긴 기념으로 델피에 있는 아폴로 신전에 헌상한 것으로서 콘스탄티누스 1세 때 옮겨 왔다. 그리스군이 노획한 전리품을 녹여서 만든 것이라 하는데 지금은 많이 손상되어 머리는 잘려지고 몸통만 남아있다.

뱀의 원기둥은 세 마리의 뱀이 서로 감겨 기둥을 형성하고 있는데 아쉽게도 그 머리 하나는 오래 전에 분실되었고 또 다른 하나는 영국이 가져가 대영 박물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유일하게 남은 하나만 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에서 확인 할 수 있을 뿐이다. 잘린 머리를 복원한다면 약 8미터 정도에 이를 것으로 추측된다.

마지막 남은 건립연대가 불확실한 오벨리스크는 대략 4세기 것으로 추측하기만 할뿐이다. 높이 32미터로 거친 벽돌로 쌓은 형상을 하고 있는데 원 모습은 금박 청동판으로 덮여있었고 십자군 침략 때에 빼앗겼다.

현재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한다는 것은 절반은 로마제국을 돌아보는 것이다. 콘스탄티노플 역사의 첫 번째 서막이었다. 그러면 남은 절반에 해당되는 이슬람의 문화유산은 어떨까? 콘스탄티노플 역사의 두 번째 전환점이다. 다음 호에 계속해서 알아보겠다.

2020년 6월 12일, 1174호 2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