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항복과 동서 분열
독일군은 1945년 4월 29일 이탈리아에서 항복해 5월 7일 랭스에서 공식 항복문서에 서명했으며, 5월 8일에는 베를린에서 소련군에 항복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유럽에서 전쟁이 끝났다.
독일의 공식 항복에도 아직 점령되지 않았던 일부 지역인 플렌스부르크(Flensburg)의 되니츠(Dönitz) 임시정부가 1945년 5월 23일 영국 군대에 점령됨으로써 독일 내 통치권력은 모두 연합국 손에 넘어갔다. 연합국은 1945년 6월 5일 ‘독일의 패전과 독일에 대한 최고통치권 인수에 관한 베를린 선언(Berliner Deklaration in Anbetracht der Niederlage Deutschlands und der Übernahme der obersten Regierungsgewalt hinsichtlich Deutschlands)’을 발표해 법적으로도 향후 독일은 연합국의 통치권에 귀속된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제 연합국은 독일 재건에 나섰다. 먼저 연합국은 독일 재무장 불가 원칙 아래 군수산업을 육성하지 못하게 했다. 중화학공업이 주축이 된 독일의 대기업을 해체하고 농업경제를 발달시켜 국민을 기아에서 빠른 시일 안에 구제하기로 했다. 전쟁과 관계없는 생활필수품과 관련 산업을 육성하고 경제 시설을 지방으로 분산하여 발전시키기로 했다. 그러나 당시 독일의 경제 상황은 최악이었다. 폭격으로 산업시설이 대부분 잿더미에 묻혀 가동이 중단되었다. 1945년 독일의 산업생산량은 1938년 전쟁 이전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했으며, 시장경제는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다.
1946년에는 피난민과 구제국(동프로이센 지역과 슈테텐 지방 등)에서 추방된 독일인이 유입되면서 인구가 6,600만 명에 이르렀다. 짧은 기간 인구가 30% 이상 늘자 주택 수급문제가 드러났다.
원래 연합국 경제정책의 기본 목표는 독일 경제의 잠재력을 파괴해 전쟁의 토대가 되는 모든 중화학공업을 철거함으로써 독일이 다시는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헨리 모겐소 미국 재무장관이 얄타회담에서 독일을 낙농국가로 만들려는 ‘독일 목초지화(pastoralization of German)’ 안(案)을 제안해서 원칙적으로 합의하기도 했다. 이러한 ‘독일 목초지화’가 계획대로 되지 않은 이유는 서유럽에 대한 소련의 팽창 의도가 점점 더 노골화되면서 ‘냉전’이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소련에 위협을 느낀 미국, 영국, 프랑스는 독일의 중화학공업 재건과 재무장화를 허용하거나 장려했다.
1947년 1월 1일 미군과 영국군 점령지역이 하나로 통합되었다. 양국의 점령지역 통합은 미국의 독일 정책이 변화되었음을 의미했다.
독일 주둔 미군사령관이 처음으로 서독(Westdeutchen)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이는 소련과 함께 독일 점령 정책을 펼 수 없다는 점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 후 소련의 서유럽에 대한 팽창 의도가 점점 더 노골화함에 따라 미국은 1947년 12월 독일을 마셜플랜 대상에 포함시키는 한편, 서방 3개국 점령지역에서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1948년 2월 런던에서 개최된 미·영·프 3개국과 베네룩스 3개국 등 6개국 외무장관 회의에서는 서방 3개국 점령지역에 자치정부를 수립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대응해 소련은 1948년 3월 주둔군 사령관 소콜로프스키 원수가 ‘독일관리이사회’ 탈퇴를 선언함으로써 독일에 대한 제2차 세계대전 전승 4대국 공동관리 체제는 완전히 붕괴되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 관리지역인 서부독일과 소련 관리지역인 동부독일은 분열되기 시작하였다. 급기야 소련은 6월 18일 미국, 영국, 프랑스가 공동관리하던 서베를린으로 향하는 모든 도로와 철도를 봉쇄하는 ‘베를린 봉쇄’를 단행했다. 이에 미국은 ‘공중가교(Air Bridge)’를 설치하여 소련의 팽창 의도에 단호하게 대응했고, 동서진영의 갈등은 냉전으로 심화되기에 이르렀다.
베를린 봉쇄
세계대전 말기부터 서서히 나타난 동서 양 진영의 갈등은 1946년 이후 극에 달하면서 날이 갈수록 첨예해졌다. 소련은 마셜플랜을 바탕으로 하는 미국의 유럽재건부흥계획을 탐탁지 않게 여겼으며,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3개국이 공동 대응하는 것에 위기감을 느꼈다.
이에 소련은 4개국 공동 베를린 행정위원회를 폐지했으며, 6월 18일 서베를린으로 향하는 모든 도로와 철도를 봉쇄했다. 6월 21일에는 미군의 군수물자 수송용 기차마저 회선시켰으며, 22일 소련 점령지역에서 쓰일 새 화폐 오스트마르크화를 발표하며 베를린 봉쇄를 단행하였다.
베를린 봉쇄에 대한 미국의 대응은 단호했다. 워싱턴은 가용 가능한 모든 수송기를 투입하겠다고 약속했고, 7월 1일 마침내 C-54가 작전에 처음 투입되었다. 작전개시 한 달 만에 작전에 투입된 미군 수송기는 1,000여 대에 육박했다. 7월 초가 되면 이미 미국의 하루 공중수송 능력은 500톤으로 급증했고, 8월이 되면서 1,000톤을 넘기기 시작했다.
1947년 새해가 되면서 미국의 물량공세는 소련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는데, 1월에 17만 1,000톤, 2월에 15만 2,000톤, 3월에 19만 6,223톤을 각각 공수했다. 이를 석 달 동안 하루 평균 수송량으로 계산하면 약 5,800톤으로, 베를린 시민들이 쓰고도 남아서 비축할 정도였다. 4월에 미국은 수송기 1,383대를 투입해 서베를린에 부활절 하루 동안만 1만 3,000톤 공수하는 부활절 특별공수를 단행하였다.
결국 소련은 5월 12일 봉쇄령을 해제했다. 그럼에도 미국은 소련을 믿지 못하고 공수작전을 계속 진행해 5개월 후인 10월 1일 공식적으로 작전을 종료했다. 이 기간에 미국은 사고로 수송기 18기를 잃었고 사상자가 40여 명 나왔다. 작전무대였던 템펠호프공항은 독일 통일 이후 이용객이 급감하면서 2008년 폐쇄・철거되었다. 이때 베를린 공수 당시의 의미 있는 현장이라며 시민들이 철거를 반대해 철거 여부를 두고 시민투표를 할 정도였고, 실제 공항이 폐쇄되는 날 마지막으로 공항을 이륙한 기종은 베를린 공수작전 당시 투입된 기체 중 하나였던 DC-3 수송기였다.
베를린 봉쇄로 소련의 팽창 의도를 간파한 서방측이 1949년 8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창설, 동서 냉전이 본격화되었다. 이를 계기로 서방 3개국과 소련이 합의하여 독일 단일정부를 구성하는 것은 더욱더 불가능하게 되고 말았다.
교포신문사는 독일통일 30주년을 맞아, 분단으로부터 통일을 거쳐 오늘날까지의 독일을 조망해본다.
이를 위해 지면을 통해 독일의 분단, 분단의 고착화, 통일과정, 통일 후 사회통합과정을 6월 첫 주부터 10월 3일 독일통일의 날까지 17회의 연재를 통해 살펴보도록 한다 -편집자 주
2020년 6월 12일, 1174호 3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