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다. 반면 백남준의 예술이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도 드물다. 백남준을 능가하는 예술적 부피와 경력을 가진 한국 예술가는 당분간 나오기 어렵다는 얘기도 있지만 우리에게는 그의 명성이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셈이다.
백남준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1980년대. 1960년대 독일에서 ‘동양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라는 별명을 얻었고,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비디오 예술의 창시자’로 활동해온 것을 고려하면 한참 늦은 편이다.
파리와 뉴욕을 연결한 인공위성 프로젝트 ‘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년)은 백남준의 출세작으로 꼽힌다. 인류가 매스미디어에 종속되어 1984년에 멸망할 것이라는 조지 오웰의 예언에 대해 바로 1984년 첫 아침에, 아직도 우리는 건재하며 매스미디어는 우리에게 엄청난 정보와 연대의식을 선사하고 있다는 조롱이 섞인 문안인사를 올린 것이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성공과 함께 1984년 고국 땅을 밟은 백남준은 “예술은 사기다”라고 외쳐 한국 예술계에 강한 충격을 준다. 그의 예술사기론은 백남준의 삶과 예술을 관통하는 말이다. 그의 생존전략은 기성화 되고 고착되어버린 우월주의적인 서구예술을 공격하고 파헤침으로써 그들에게 진정한 예술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삶과 예술을 시대적으로, 그리고 작품 특징을 중심으로 구분한다는 것은 무의미하고 불가능한 것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일반인들의 평범한 눈으로 그의 심오한 예술세계를 조망한다는 것 역시 매우 어려운 일이기에 문화세상이서는 ‘무리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초기 실험적 작품시대, ■중기 : TV설치, 조각(새로운 매체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 ■후기 : 레이저 예술(우주와의 소통을 추구하는 거시적인 비전)로 나누어 백남준의 작품세계를 살펴보도록 한다.
– 초기 실험적 작품시대
1958년 독일 다름슈타트 여름 신음악 강좌에서 현대 실험 예술의 운명의 분수령이 되는 우주적 만남이 있었다. 바로 존 케이지(John Cage, 1912~1992)와의 만남이었다.
그 해 백남준은 레코딩 테이프에 여자의 비명소리, 전화기, 거리 등에서 무작위로 들리는 소리를 담은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를 발표하고, 존 케이지와 함께 새로운 예술 흐름의 줄기를 만들어갔다.
백남준의 1962년 인터뷰에서 그 해를 기점으로 1957년이 기원전 1년이 되었다고 했다. 1992년 존 케이지의 죽음 후 다시 1993년은 기원 후 1년이 되었다고 선언하였다. 이렇듯 백남준에게는 존 케이지는 그의 예술세계의 지평을 연 스승이자 동료였다.
1950년대 말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한 독일 라인 지역의 음악 퍼포먼스의 장에서 백남준은 ‘아시아에서 온 문화테러리스트’(앨런 카프로)라고 불릴 정도의 탁월한 퍼포머로 활약했다. 백남준은 요제프 보이스와도 깊은 연관을 갖고 ‘플럭서스(Fluxus)’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변화, 움직임, 흐름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플럭서스 운동은 ’삶과 예술의 조화’를 기치로 내걸고 탈장르적인 예술운동으로 발전했다.
플럭서스는 백남준의 예술을 가꾸어 준 정신적 지주이면서 예술사기론으로 대표되는 그의 저항적 예술행위의 바탕이다. 예술의 권위주의를 넘어서는 한편 관객이 함께 참여함으로써 완성되는 예술이 플럭서스 운동의 목적이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백남준의 비디오예술이나 행위예술은 유희나 충격, 또는 쇼맨십 정도로 보일 수밖에 없다.
1963년 독일에서 열린 백남준의 첫 개인전이 유명해진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장치된 비디오’ 3대와 ‘장치된 TV’ 13대와 함께 피가 뚝뚝 떨어지는 갓 잡은 황소머리가 전시됐는데, 개막일에 보이스가 난데없이 도끼를 들고 나타나 전시 중인 피아노 한대를 부숴버린 것이다.
1959년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에서 피아노를 부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것을 시작으로, 바이올린을 파괴하거나(바이올린 솔로)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잘라버린 퍼포먼스(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연습곡)가 특히 유명하다. 1961년 카를하인츠 슈토크하우젠의 음악 퍼포먼스 ‘오리기날레’에서 머리와 넥타이로 잉크를 묻혀 두루마리에 흔적을 남기는 독특한 퍼포먼스 머리를 위한 선을 보여주기도 했다.
또한 이때부터 백남준은 슈토크하우젠이 중심이 된 쾰른의 WDR 전자음악 스튜디오에 출입했으며, 특히 레이더와 TV 작업에 몰두했던 독일 작가 칼 오토 괴츠의 영향을 받아 2년여 동안 홀로 TV 실험에 착수했다. 그 성과를 바탕으로 1963년 독일 부퍼탈 파르나스 갤러리에서 자신의 첫 번째 전시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을 열었으며, 13대의 실험 TV를 통해 비디오 아트의 초기 형태를 보여주었다. 이 전시에는 ‘총체 피아노’, ‘랜덤 액세스 뮤직’ 같은 실험적 음악의 시도와 ‘잘린 소머리’, ‘파괴된 누드 마네킹’, ‘보이스의 피아노 파괴 퍼포먼스’ 같은 파괴적 에너지의 설치 및 참여적 형태의 퍼포먼스가 펼쳐졌다. 청년 백남준은 이러한 내용을 ‘동시성’, ‘참여’, ‘임의접속’ 등등에 관한 16개의 테마로써 종합적인 큐레이팅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에 최근 독일, 오스트리아 등의 연구자들 사이에 점차 활발한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1964년 백남준은 일본을 거쳐 뉴욕으로 이주했고, 1965년 소니의 포타팩(세계 최초의 휴대용 비디오카메라)으로 미국 뉴욕을 첫 방문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6세를 촬영하여 곧바로 그 영상을 ‘카페 오 고고’에서 방영했다. 이것이 미술사에서는 공식적인 비디오 아트의 시작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첼로 연주자이자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의 기획자였던 샬럿 무어먼과 함께 비디오 아트와 음악을 혼합한 퍼포먼스 작업을 활발히 펼쳤다. 특히 1967년 음악에 성적인 코드를 집어넣은 백남준의 ‘오페라 섹스트로니크’에서 샬럿 무어먼은 누드 상태의 첼로 연주를 시도하다가 뉴욕 경찰에 체포되어 큰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그 결과로 인해 예술 현장에서 누드를 처벌할 수 없다는 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이후에도 두 사람은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라’, ‘TV 첼로’, ‘TV 침대’ 등등 미디어 테크놀로지와 퍼포먼스를 결합한 많은 활동을 전개했다.
1207호 23면, 2021년 2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