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미술사, 회화 중심으로 살펴보기 (10)

후기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Post-Impressionism)는 인상주의에서 시작했지만, 그 영향에서 벗어나 새로운 작품 세계를 확립하려고 한 예술 사조이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주로 1880년대에 활약한 화가를 가리키는 편의적인 호칭으로, 후기인상파 각 화가의 화풍은 크게 다르다. 일반적으로는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 폴 세잔느 등을 가리킨다.

후기인상주의라는 용어는 영국의 예술비평가 로저 프라이(Roger Fry)가, 1910년 사이 프랑스의 새로운 미술을 영국에 소개하기 위해 기획한 전시회 《마네와 후기인상주의자들(Manet and the Post-Impressionists)》이라는 이름에서 유래한다.

이 전시회 판매자는 마네 외에도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 르동, 폴 세잔느, 앙리 마티스, 앙드레 드랭, 블라맹크 등 신인상파 화가, 야수파 화가 등 작풍도 다양했다. 프라이는 당초 ‘인상주의자’(Impressionist)라는 명칭을 제안했으나, 참가자들의 반대로 ‘후기인상주의자’(Post-Impressionist)라는 이름을 확정했다.

그들은 인상파의 영향을 받아 그것을 출발점으로 하면서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엄격한 형태의 부활, 원시적인 소재와 강렬한 색채의 도입 등 자신들만의 특징을 낳았고, 20세기 미술의 선구가 되었다. 형태뿐만 아니라 색채에서도, 사상에서도 19세기의 예술과 야수파, 표현주의, 입체파 등 20세기 미술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후기인상주의의 특징

후기인상주의 작가들의 작품은 저마다 각자의 특징을 지니고 있기에, 이번 연재에서는 후기인상주의 대표 화가들을 소개하며, 후기인상주의의 특징을 살펴보도록 한다.

폴 세잔(Paul Cézanne)

세잔은 “사물의 본질적 구조를 드러냄으로써 인상주의를 박물관의 미술품처럼 견고하고 지속적인 것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사물의 모습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자연의 견고함을 그리려 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세잔은 모든 사물들을 원, 원기둥, 원뿔로 나눌 수 있다고 보고 이를 분석해 그렸다. 실제 색을 윤곽에 그대로 채워넣어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색을 이루는 많은 조각들을 수없이 계산된 부분에 적용해 입체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낸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 예로 작품 ‘사과바구니가 있는 정물’에서 세잔은 테두리를 그리지 않았다. 그는 바구니와 과일들, 식탁보, 유리병 등 모든 것을 고르게 붓질해 그렸다. 윤곽을 그리고 색을 채워 그리는 것이 아니라, 같은 붓으로 물감을 계속 덧칠해 그렸기 덕분에 그림 속에 그려진 대상은 원근법과 형태가 강조되지 않는다. 초점도 기존 회화처럼 단일초점이 아니고, 어느 면에서 보아도 초점이 맞을 정도로 다초점, 다시점을 맞추었다. 이는 서양의 원근법적 관점이 아닌 동양 산수화의 다중시점과 오히려 더 흡사한 것이다.

세잔은 이후 피카소와 입체주의에 영향을 주었다. 또한 대상의 객관적 진실을 표현하려는 현대미학의 뿌리를 제시했다고 평가받는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고흐의 작업은 그 일렁이는 듯한 강렬한 붓터치를 특징으로 한다. 이와 같이 작가가 고유의 화풍를 강조하기 시작한데 어찌보면 고흐가 큰 영향을 끼쳤다 할 수 있다. 이후 뭉크 같은 표현주의적 작업을 하는 화가들이 등장하게 된다.

고흐는 일관적으로 자기 작품에 ‘자신의 정념을 표현하는 것’에 집중했고, 이를 위해 관습적인 그림을 그리던 관학파 화풍(아카데미즘)을 계속해서 부정했다. 인상파를 접할 때도 훌륭하다고는 생각하나 자신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얘기했으며, 덕분에 그는 개성있는 화풍을 획득했다. 이 덕분에 고흐는 미술사에서 작가주의를 강조하는 경향에 영향을 끼쳤다. 물론 이전 예술가들도 작가나 그 작가가 살던 시대 환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고흐의 작품을 이해할 때만큼 그 작품 자체보다 작품을 만든 작가의 생애가 더 중시되는 경우는 드물다. 이전에는 대부분 표현 기교나 작품 주제에 집중해 작품을 분석했기 때문. 이후 예술작품을 볼때 작품의 겉표면 이미지만 보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작품의 내력과 작가의 생각, 감정, 의도를 이해하는게 매우 중요해지게 됐다.

폴 고갱(Eugène Henri Paul Gauguin)

고흐처럼 유진 앙리 폴 고갱(Eugène Henri Paul Gauguin) 역시 작가의 생애가 예술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작가중 하나다. 단 고흐가 표현주의 경향에서 하나의 지표가 되었다면, 고갱은 원시주의 경향에서 하나의 지표가 되었다. 어찌보면 그의 예술은 여러 상징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상징주의와도 연관된다. 주의할 점은 고갱 자신은 자기 예술을 종합주의 (Synthetism, 綜合主義)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고갱은 자연의 실제 모습을 그대로 그리지 않고, 자신의 경험과 상상을 자신의 그림 속으로 녹여내서 그려냈다. 그림을 통해 자신의 감정과 내면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의 작품은 후대의 표현주의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문명을 혐오하고 원시와 자연을 예찬하는 원시주의(primitivism) 특성도 있다.

어찌보면 이는 과거 낭만주의사조의 오리엔탈리즘과 유사하다. 이국 문화를 동경하고 미화하는데 다만 차이가 있다면, 고갱은 오세아니아 지역의 섬문화를 동경했고, 이전의 낭만주의와는 다르게 적어도 예술 형식 면에서는 서구 우월주의를 버렸다. 그랬기에 이국적인 표현을 그림에 반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예술 형식 면에서고, 내용이나 정신을 보면 고갱은 남성우월주의 시각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다.

1216호 28면, 2021년 4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