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학 편집장과 함께하는 역사산책(31)

독일 최고(最古)의 도시 트리어(Trier)


역사산책은 사건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역사서가 아니라, 당시의 사람들 그들의 삶속으로, 그들의 경험했던 시대의 현장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기쁨과 좌절을 함께 공유하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이다.

또한 작은 벽돌 한 장, 야트막한 울타리, 보잘 것 없이 구석에 자리 잡은 허름한 건물의 한 자락이라도 관심과 애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면, 그들은 곧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따라서 역사산책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내 삶의 터전과의 대화이기도 하다.


검은 성문(Porta Nigra)과 시메온 교회(Simeon Kirche) 2

이번 트리어 역사산책은 검은 성문(Porta Nigra)앞 광장에서 시작한다. 거대한 로마유적과 그에 필적하는 중세 교회, 그리고 광장 옆의 관광안내소에는 기독교를 공인한, 그리고 이곳 트리어에서 장기간 거주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념물로 가득하기에가 이곳은 트리어 도시의 특징을 종합적으로 설명해 주는 장소이다.

지난 호에서는 로마 도시로서 성장하게 된 트리어의 전반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제 검은 성문 (Porta Nigra)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역사산책을 시작해 보도록 하자.

검은 성문(Porta Nigra)이 건설되다

트리어가 발전을 거듭하던 기원 2세기 중반, 인구 4만에 육박하던 142년에서 150년 사이 Römerbrücke가 대대적인 재건되어 오늘 날의 모습이 되었다. 또한 트리어 구시가지 북쪽 입구에는 Porta Nigra가 기원 170년, 우리에게도 “명상록”으로 잘 알려진, 로마제국 오현제 시대의 마지막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황제 치세에 건축이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Porta Nigra의 이름은 ‘검은 성문’은 아니었다. 사료에는 성문이름이 나오지 않고 있으나, 역사학자들은 로마 당시의 일반 성문들의 일반적인 예처럼, 그 성문이 향하는 중요도시 이름으로 명명하는 방식으로 아마도 Porta Nigra는 코블렌츠 성문(Koblenzer Tor), 또는 마인츠성문(Mainzer Tor)으로 불렸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성문의 색깔 역시 당시에는 성문을 구성하고 있는 바위색인 밝은 회색의 빛을 띠고 있었으며, 중세시대에는 단순히 성문(Porta)라고만 불렸는데, 검은 성문(Porta Nigra)이라는 이름은 1040년과 1045년의 사료에 처음 나타나고 있다.

역사학자들의 사료의 해석에 따르면 Porta Nigra에서 “검은(Nigra. Schwarz)”의 뜻은 색상으로서의 뜻이 아니라,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따른 “불행한”, “슬픈”이라는 뜻으로 보아야한다는 것인 일반적인 견해이다. 당시를 다루는 여러 사료를 보면, 전염병의 창궐, 전쟁에 패한 군대들이 이 성문을 통해 귀한한 점 등 시대의 암울함이 더해서 “검은 성문“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2000년 세월의 무게로 바위들의 색이 검게 변해서 ‘검은 성문’이라고 칭해졌다는 것이 더욱 익숙한 것 같다.

검은 성문은 당시 로마시대에도 제법 큰 성문으로 여겨진다. 하나의 아치가 아니라 두 개의 아치로 구성되어 있고, 36m의 넓이와 30m 높이의 규모는 당시 로마이외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규모이다. 당사 트리어의 다른 성문인 동쪽의 Porta Alba, 남쪽의 Porta Media, 서쪽의 Porta Inclytark 규모도 이보다는 작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눈썰미 있는 방문객이라면, 검은 성문의 도시 내부면과 도시 외부면이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도시 외부에서 보면 성문 전면부가 원형을 이루고 있고, 도시 내부에서 보이는 전면부는 평면으로 건축되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건축기법이나, 외부에서 불 때 웅장하게 보이려는 미관적 이유가 아니라 도시 방어적 요소로 보아야 한다. 성벽을 감시하려면, 평면적인 성문으로는 필연적으로 사각(감시병의 시야에서 벗어나는)이 발생하기에, 원형으로 외관을 만들어 감시군인이 성벽 전체를 조망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된 트리어의 다른 세 성문과는 달리 어떻게 검은 성문이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알프스 이북에서는 유일하게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로마시대 성문으로 남아있을 수 있었을까?

이제 우리는 검은 성문이 일반인들에게 자취를 감추고 800여년이 지난 19세기 다시금 모습을 드러내는 신비로운 역사를 찾아가 보자.

검은 성문(Porta Nigra)에 시메온 교회(Simeon Kirche)를 짓다

1028년 서방세계에 수도자로 이름을 떨치고 있던 37세의 시메온(Simeon)이 트리어를 찾아온다. 이미 성자로 칭송받던 수도사 시메온은 Popo(Popo von Babenberg)대주교를 만나가게 되고, 둘은 곧 의기투합하게 된다. Popo주교는 당시 막강한 교회권력의 소유자로, 트리어 대성당 서편 건물을 건축하였고, 트리어가 중세 도시로 성장하는 데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

수도자 시메온과 Popo 대주교는 곧 행장을 꾸려 2년에 걸친 순례길을 함께 떠난다. 시칠리아 태생인 시메온은 부친은 그리스계, 어머니 라틴계로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능통했으며, 시칠리아가 한 때 이슬람 세계였던 관계로 아랍어도 능숙하게 구사하였다. 예루살렘으로 향한 이 둘의 순례에서 Popo 대주교는 시메온의 진면목을 확인하며 이 둘의 신앙심과 우애는 깊어갔다.

2년 뒤인 1230년 트리어로 돌아온 뒤, 시메온은 더 이상 순례길을 떠나지 않고, 자신의 마지막 거처로 “검은 성문”의 1층(독일식)에 몸을 의지한다. 이곳서 시메온은 물과 최소한의 양식만을 밧줄을 이용해 공급받으며 철저히 수도의 길에 매진하였다.

이미 성자로 추앙받던 시메온이었기에 많은 이들이 신앙과 삶에 대한 조언을 얻기 위해 그를 찾았고, 시메온은 조금만 구멍을 통해서만 이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전했다.

그리고 4년 반 정도가 지난 1035년 6월 1일 시메온은 숨을 거둔다. 그는 이전부터 지신이 죽으면 ‘검은 성문‘에 자신의 유해를 안치해 줄 것을 당부하였고, Popo대주교는 이를 실천한다. Popo대주교는 그의 유해를 검은 성문 1층에 석관에 담아 안치하고, 검은 성문을 시메온을 기리는 교회로 재건축 할 것을 명한다. 검은 성문의 역사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시메온 교회는 검은 성문 건축의 틀을 유지한 채, 기둥과 외관을 2중 구조로 단장하며 예배실과 부속 시설 등을 건축하였으며, 왼편(시내에서 볼 때)으로는 거대한 부속 시설을 건축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트리오 시립박물관인 것이다.

검은 성문 1층에 예배실을 마련한 까닭에 시메온 교회는 일반 중세교회의 회랑(교회 안 뜰에 아치형으로 교회 건물을 따라 회랑을 만든 것)의 형식을 따르지 않고, 1층(독일식)에 회랑을 조성한 특이한 형식을 띠게 된다.

한편 시메온의 죽음이 알려지자, 많은 순례자들이 이곳을 찾아오기 시작하였으며, Popo 대주교는 교황청에 시메온의 성인 시성을 청하게 된다. 교황청도 시메온의 명성을 익히 알아서인지, 아니면 Popo 대주교의 큰 영향력 때문인지 매우 이례적으로 시메온이 사망해 당해인 1035년 12월 성인으로 추대한다.

이렇듯 로마 성문으로 지어진 Porta Nigra는 800여년의 성문의 역사를 뒤로하고, 또 다른 800여년의 교회로서의 기능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역사로 Porta Nigra 방문객들은 고대 로마의 성문과, 특이한 형식의 회랑을 지닌 중세 교회의 큰 광장을 맘껏 즐길 수가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성문을 제외한 시메온 교회 건물에 자리 잡은 트리어 시립박물관도 그 유물의 특징으로 관람해 볼 것을 권한다. 이 박물관에서는 트리어 역사를 한 눈에 살펴볼 수가 있는데, 고대 유물부터 중세, 근대 유적, 트리어 시민의 상징인 Steipe 원본, 시장광장 분수의 원본, 시장광장에 서있는 신성로마황제의 시장 인가증이 조각된 십자가 원본 등 트리어의 모든 것이 일목요연하게 전시되어 있다.

이 가운데 압권은 1800년의 트리어 모습을 제현하고 있는 목조모델이다. 이외에도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과거 트리어의 모습도 감상할 수 있다.

Porta Nigra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다

Porta Nigra가 로마 성문으로 다시 세상에 들어낸 것은 트리어 시민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트리어를 정복, 또는 점령한 정복자에 의해서이다.

1804년 10월 유럽정복 전쟁을 수행 중이던 나폴레옹이 트리어를 방문한다. 그는 시메온 교회의 역사를 듣곤, 지체 없이 Porta Nigra 복원을 명령한다. 그는 매우 단호하게 모든 중세적 건물 흔적은 다 제거하고, 2세기 로마시대의 성문으로 완벽하게 복원할 것을 명했고, 이로서 800여년 만에 그 모습이 다시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로마의 황제를 자신의 모델로 여긴 나폴레옹의 로마 유적에 대한 애착이 다시 한 번 나타난 것이다. 나폴레옹은 2년 뒤인 1806년 고대 로마의 티투스 개선문을 본 따 “파리의 개선문(본명은 에투알 개선문 Arc de triomphe de l’Étoile)을 건축한다.

다시 상황은 급변했다. 나폴레옹이 유럽에서 패하고, 트리어의 주인은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로 바뀌었다. 나폴레옹의 모든 조치를 뒤돌리던 빌헬름 1세는, 그러나 Porta Nigra 복원은 계속 진행할 것을 명한다. 더 나아가 트리어의 로마시대 유적 발굴 및 복원을 적극 시행한다.

아마도 빌헬름 1세 역시 로마제국의 황제를 자신의 모델로 삼은 것이 아닌가 하다. 프로에센 통치 시기의 독일 공공건물에 로마시대 양식인 고전주의 건축물이 많은 것도 이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오늘날 트리어의 로마 유적은 빌헬름 1세의 정책에 힘입은 바가 크다.

끝으로 우리나라의 대표적 성문인 남대문(숭례문)과 동대문(흥인지문)이 국보 1호와 보물 1호로 지정되는 과정에 얽힌 슬픈 사연을 소개하며 ‘검은 성문’ 편을 마친다.

조선을 점령한 일본은 조선인의 배일감정을 부추긴다는 이유로 조선의 상징물들을 제거해 나갔다. 당연히 한양의 4대문도 그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남대문은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입성한 문이고, 동대문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입성했다”는 이유로 보전되었다. 당연히 서대문(돈의문)은 파괴되었고, 북대문(숙정문)은 산속에 있어 피해를 면할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기요마사(加藤淸正)보다 하루 먼저 한양에 입성했다는 이유로 숭례문(당시 명칭 경성 남대문)을 보물 1호, 흥인지문(동대문)을 보물 2호로 각각 지정했다. 해방 후 관료들의 편의주의에 의해 남대문과 동대문은 국보 1호와 보물 1호로 지정되게 된 것이다.

그나마 지난해 국보와 보물에 번호를 지정하는 것이 폐지되었다고 하니, 만사지탄이지만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255호 20면, 2022년 2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