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돌아와야 할 우리 문화유산
-잃고, 잊고 또는 숨겨진 우리 문화유산 이야기(10)

잃어버리고 숨겨진 조선의 국새와 어보를 찾아라

조선 왕조의 왕위는 세습이었다. 국왕의 자리를 이을 아들이나 손자등(또는 왕실의 승계자)은 국본(國本)으로서 왕위에 오르기 전에 왕세자나 왕세손에 책봉되는 전례(典禮)를 거쳐야 했다. 어보와 어책은 일차적으로 이와 같은 봉작(封爵) 전례의 예물로 제작했다. 이에는 통치자로서 알아야 할 덕목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문구가 들어 있다. 왕세자나 왕세손에 책봉되면 그 징표로 국왕에게서 옥인(玉印), 죽책(竹冊), 교명(敎命)을 받음으로써 왕권의 계승자로서 정통성을 인정받았다. 이들이 성혼한 경우에는 이들의 빈(嬪)도 같은 과정을 거쳤다.

왕세자나 왕세손이 국왕에 즉위하면 즉위식에서 왕비도 금보(金寶), 옥책(玉冊), 교명(敎命)을 받았다. 왕과 왕비가 죽은 뒤에는 묘호(廟號)와 시호(諡號)가 정해지면 시보(諡寶)와 시책(諡冊)을 받았다. 왕과 왕비가 일생에 걸쳐 받은 책보는 신주와 함께 종묘에 봉안되었다. 살아서는 왕조의 영속성을 상징하고 죽어서도 죽은 자의 권위를 보장하는 신물이었다.

책보는 그 용도가 의례용으로 제작되었지만 거기에 쓰인 보문과 문구의 내용, 작자, 문장의 형식, 글씨체, 재료와 장식물 등은 매우 다양하여 당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의 시대적 변천상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의 책보만이 지닐 수 있는 매우 독특한 세계기록유산으로서의 가치는 지대하다.

‘어보’는 궁중의식 때 왕과 왕비, 세자와 세자빈을 위해 제작되는 의례용 도장이다. 또한 ‘어책’은 세자와 세자빈 책봉이나 비와 빈의 직위를 하사할 때 왕이 내리는 교서를 말한다. 어보와 어책을 합해 ‘책보(冊寶)’라고한다.

어보는 금박・은・옥 같은 다양한 재질로 만들어졌으며 어보의 손잡이는 상서로운 동물로 여겨지던 거북이나 용 모양으로 장식되었다. 특히 왕의 어보는 왕의 신분과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도장으로, 외교문서나 행정 등 집무용 또는 대외용으로 사용된 국새와 구분된다.

어책은 오색 비단에 훈계하고 깨우치는 글을 담은 교명, 옥이나 대나무에 책봉하는 글을 새긴 옥책과 죽책, 금동판에 책봉의 내용을 새긴 금책 등으로 나뉜다. 왕과 왕비가 일생에 걸쳐 받은 어보와 어책, 즉 책보는 신주와 함께 종묘에 봉안되어 보관되었다. 이처럼 책보는 생전에는 왕조의 영속성을 상징하고, 사후에도 죽은 자의 권위를 보장하는 신물로 여겨졌다.

태조부터 영친왕에 이르기까지 왕과 왕후, 세자를 위해 제작된 어보는 총 375과인데 이 중 45과가 행방불명이다. 1408년(태종 8)에 제작한 태조의 금보, 1468년(예종 1)에 제작한 세조의 금보, 1900년(고종 37)에 제작한 영친왕의 금보 등이 사라졌다.

종묘에 있어야 할 어보가 왜 미국에서 발견되나

1945년 광복과 함께 미군정이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문화재급 유물들이 뇌물로 건네지기도 하고, 재물을 얻기 위해 ‘골동품’으로 거래되는 사례도 빈번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문화재 수집가로 미군정에서 문관을 지낸 ‘그레고리 헨더슨’을 꼽을 수 있다.

헨더슨은 두 차례에 걸쳐 한국에서 근무를 했는데 그는 한국에서 근무하는 동안 회화, 조각, 공예품 등 종목을 가리지 않고 문화재를 수집하고 반출했다. 그중에는 최고의 가치를 지닌 도자기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일명 ‘헨더슨 컬렉션’으로 불리는 그의 수집품들에 대해 1970년대 한국 정부가 반환을 요청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가 거부하면서 반환은 성사되지 못했다. 이와 관련해 2014년 한 매체는 “당시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이 장물운반처벌을 규정한 미국법 조항을 한국 측이 모르게 하라는 지침을 주한 미국대사관에 하달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는 사실을 보도했었다.

헨더슨의 반출 사례 외에도 우리 문화재가 약탈당한 중요한 사건이 또 있다. 바로 한국전쟁 때 어보 등 조선 왕실의 보물이 보관되어 있던 덕수궁 미술관을 미군 군인들이 침입하여 약탈한 사건이다. 이렇게 미국으로 반출된 ‘대한국새’와 ‘조선어보’는 미국 전역에 흩어졌고 그중 일부가 거래 목적으로 경매시장 등에 나오고 있다.

조선 국새 25과 중 22, 대한제국 국새 13과 중 8, 옥책 8, 교명 4책도 행방불명

조선왕실의 어보(효종 어보)

문화재청의 자료에 따르면 조선국새 25과 중 22과는 1907년 이후에 대부분 사라졌다. 다시 말해 일제강점기, 미군정, 한국전쟁 시기에 대부분을 잃어버렸다는 뜻인데 최근 미국에서 국새가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미군정이나 한국전쟁 때 상당수 반출되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옥책(玉冊)은 왕실에서 왕비나 세자 또는 세자빈을 책봉할 때 존호·시호·휘호를 올리거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옥(玉)이나 대나무(竹) 등에 글을 새겨서 엮은 문서이다. 현재 국내에는 258건의 옥책이 있으며 고려시대 1건, 조선시대 253건, 대한제국기 47건 등이 있다.

그러나 1837년 제작한 헌종의 어머니인 신정왕후의 ‘신정왕후상존 호옥책(神貞王后上尊號玉冊)’과 1844년 제작한 헌종의 부인인 효정왕후의 ‘효정왕후봉왕비옥책(孝定王后封王妃玉冊)’ 등 8점이 사라졌다. 2018년에는 효명 세자빈을 책봉한 내용을 담은 죽책이 프랑스 경매에 나온 것을 발견해서 환수되는 등 그동안 숨겨져 있던 유물들이 점차 세상 밖으로 나오고 있다.

이외에도 조선시대에 왕비와 왕세자, 세자빈을 책봉할 때 임금이 내리던 문서인 교명(敎命) 4책도 행방불명이다. 행방불명된 교명에는 ‘철인왕후봉왕비교명(1851년)’과 ‘순명왕후봉왕세자빈교명(1882년)’ 등이 있다.

하루빨리 조선 왕실의 기록과 유물들을 되찾아 역사의 전부를 볼 수 있게 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1259호 30면, 2022년 3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