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최고(最古)의 도시 트리어(Trier) ⑤
역사산책은 사건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역사서가 아니라, 당시의 사람들 그들의 삶속으로, 그들의 경험했던 시대의 현장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기쁨과 좌절을 함께 공유하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이다.
또한 작은 벽돌 한 장, 야트막한 울타리, 보잘 것 없이 구석에 자리 잡은 허름한 건물의 한 자락이라도 관심과 애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면, 그들은 곧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따라서 역사산책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일뿐만 아니라, 동시에 내 삶의 터전과의 대화이기도 하다.
◈트리어의 중앙 광장(Hauptmarkt)에서
800여년은 위풍당당한 성문으로, 그리고 또 다른 800여년을 교회의 모습으로 트리어 구시가지 입구를 지켰던 트리어의 상징, 검은 성문(Porta Nigra). 그 기구한 역사와 함께 우리는 칼 마르크스의 흔적과 유대인 박해의 상징인 Judengasse를 살펴보았다.
이제 중세 트리어의 주 무대인 중앙광장(Hauptmarkt)으로 이동하여 중세시대 트리어를 본격적으로 경험하도록 한다.
유럽 도시의 광장
유럽역사에서 광장은 공동체 생활의 중심지로서, 정치, 문화, 경제활동의 주 무대가 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Agora), 고대 로마의 포럼(Forum)은 정치적 집회와 선출직 관료들의 선출장으로 정치적 의미가 강했다면 중세시대의 광장은 경제, 사회적 의미, 즉 시장과 통치자와 거주민들의 소통의 장의 역할이 보다 강조되었다.
따라서 중세유럽의 도시 광장들은 시장의 기능이나 종교시설의 광장으로, 또는 시청 앞 광장으로 도시의 중심적 공간을 형성하며 공공의 소통장소의 역할을 하였다. 이곳에서는 영주의 공지사항이나, 새로운 법률의 공표, 때로는 처형의 현장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마녀사냥 시대인 1500년대에는 광장에서 처형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또한 중세 후반 시민사회 대두시기에는 정치적 집결지로서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중세 트리어 역사적 현장 Hauptmarkt
트리어 시에는 곡물시장이었던 Kornmarkt, 가축시장이었던 Viehmarkt 등,시장의 이름이 붙은 소 광장들이 있다. 그렇기에 트리어 중앙광장 역할을 해온 Hauptmarkt의 이름이 일반적인 시장광장(marktplatz)이 아니라 중앙시장(Haptmarkt)으로 명명된 듯하다.
중세 유럽에서의 광장들이 그러하듯, 이곳 Haptmarkt 역시 공공의 장소였으며, 그 가운데 광장분수는 시민들의 식수공급원이자, 광장의 장식물로도 활용되었다.
삼각형 모양의 중앙시장 광장 주변의 건물들은 오랜 역사를 가진 건물들로, 르네상스, 바로크, 고전주의 및 후기 역사주의의 주택으로 저마다 색깔과 모양은 달라도 서로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또한 중세 말인 1430년 경에 건축된 시민계급의 중심지 역할을 한 Steipe, St.Gangolf 성당 등 중세시대를 대표하는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어, 중세 트리어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광장의 중심에는 마르크트십자가(Marktkreuz)가 있다. 이 광장을 시장으로 사용하게 허락하는 것을 상징하는 이 십자가 기둥은 958년 당시 대주교였던 하인리히 1세(Heinrich I)에 의해 이곳에 세워졌다. 십자가를 바티고 있는 기둥이 전형적인 로마식임을 볼 때, 당시까지도 로마 건축이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십자가는 연꽃 무늬로 장식되어 있고, 정중앙에 하얀 양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현재 광장에 서있는 마르크트십자가는 복제본으로. 원본은 현재 시립 박물관(Stadtmuseum)에 보관되어 일반에 전시되고 있다.
베드로분수 (Petrusbrunnen
광장 중앙에는 미르크트십자가 서있고, 남쪽 방향으로 약 20m 정도 떨어진 곳에 베드로분수(Petrusbrunnen)가 있다. 1495년에 지어진 이 분수대에는 트리어 수호성인인 베드로 조각상이 가장 위에 설치되어 있으며, 그 아래 4면에는 Justitia(검과 비늘이 있는 정의), Fortitudo(부러진 기둥이 있는 힘), Temperantia(중용), 포도주와 물, Sapientia(지혜, 거울과 뱀)가 장식되어 있다.
유럽에서의 “Brunnen”은 일반적으로 ‘분수’, 또는 ‘우물’로 번역되어왔는데, 우리의 인식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중세 유럽의 Brunnen은 도심에서 떨어진 상수도원에서 수도관을 통해 광장으로 물을 끌어와 시민들이 식수로 활용할 수 있게 하는 장치로, 물이 하늘로 솟는 ‘분수’도 아니었고, 땅을 깊이 파 물을 긷는 ‘우물’도 아니다. 오히려 관을 통해 식수가 늘 흘러나오는 “공공수도”의 역할을 하였다.
이곳 베드로분수도 수도관으로 물을 공급받아 시민들에게 식수와 생활용수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트리어에 중앙 급수 장치가 도입된 이후부터는 베드로분수는 순전히 장식용 분수가 되었다.
중세시대에는 이러한 “깨끗한 식수 공급”은 전염병 등, 많은 질병을 예방하는 중요한 보건정책의 하나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분수 설치가 정치적 목적으로도 많이 건설되었다. 특히 구교(가톨릭)가 강한 지역에서는 1500년 후반대에 많은 광장분수가 건설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루터의 종교개혁(1517)과 그 영향으로 발발한 농민전쟁(1524-1526)의 결과, 가톨릭 주교들이 시민들의 불만을 다스리는 시혜성 복지사업으로 이루어 진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마인츠의 시장분수(Marktbrunne, 1526년 건설)이 대표적인 예이다.
Steippe와 Rotes Haus
Steippe는 트리어 시민들의 자존심과 같은 장소이다. 오늘날의 건물이 완성되기 전인, 14세기에는 한때 시청으로도 쓰였던 Steippe는 50년의 건축기간 뒤 1483년 오늘날의 건축양식으로 건설되었다.
Steipe라는 이름은 Trier 방언으로 중세시대에는 “Stype”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이는 표준 독일어로는 Stütze(지지, 떠받침)로, 시민들의 모임처이자, 시민사회 건설의 주요무대가 된 곳이다. 시의회가 있었으며, 트리어 시민 유력인사들과, 대의원들의 사교장으로도 사용되었다.
당시 종교적 지도자이자, 동시에 세속 통치자인 트리어 대주교와의 갈등과 협상 등이 펼쳐진 장소이기도 한데, 이는 건물 2층에 부조된 기사상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두 명의 기사가 좌우에 자리자고 있는데, 광장을 내려다보는 기사상은 온화하고, 시민 친화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데 반해, 트리어대성당을 바라보고 있는 다른 기사상은 매우 엄격하며, 경계의 눈빛을 하고 있는 모습에서, 당시 시민들과 대주교 사이의 긴장감을 살펴볼 수 있다.
한편 Steippe 건물입구에는 트리어 도시 수호성인들의 석상이 부조되어있는데, 왼쪽부터, 헬네나, 야고보, 베드로, 바울의 석상이다. 그러나 이 조각품들 역시 복제본으로, 원본은 마르크트십자가와 같이 트리어 시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한편 광장에서 Dietrichstraße로 접어들면 붉은 사암으로 지어진 바로크 양식의 화려한 건물이 나타난다. Rotes Haus이다. 그런데 이 건물은 그 화려함이 아니라 건물 중간에 새겨진 문장 때문에 유명해졌고,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다. 이 문장이 트리어가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임을 알리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트리어 도시의 역사에 관해 살펴보자.
트리어가 사료에 처음 등장한 것은 시저의 “갈리아 전기(Bello Gallico)”에서이다. 기원전 58년부터 50년까지 시이저가 갈리아지역을 정복한 것을 서술한 “갈리아 전기”에서 당시 켈트족의 일파인 트레버러(Treverer)와의 전쟁과 승리를 소개하고 있다. 이후 기원전 30년대 트레버러 족의 반란 진압과 군사적 목적으로 트리어에 정식으로 도시가 건설되었다.
또한 로마시대 건축된 이래 현재까지 트리어의 중요 다리로 사용되는 모젤강을 가로지르는 Römerbrucke의 탐사에서 기원전 17년 세워진 목축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트리어 시는 이를 기념하여 2009년 트리어 탄생 2025주년 기념식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베네딕도 수도원의 한 수도사가 엮은 1105년 편찬된 전래 신화, 문헌, 전설 등을 엮은 책 “Gesta Treverorum”에 의해 그 역사가 2000년 정도 더 소급된다. Gesta Treverorum에 의하면 트리어는 앗시라아의 Ninus 왕에 의해 건설되었고, 그 시기는 로마건국(기원전 753년)보다 1300년 전이라 적고 있다. 이는 대략 기원전 2050년 경이 된다. 이렇게 해서 트리어는 “독일 최고(最古) 도시에 대한 논쟁”에 종지부를 찍으며,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가 되었다.
“Gesta Treverorum”에서 언급된 트리어 역사에 관한 문장이 바로 이 Rotes Haus에 조각되어 있다.
ANTE ROMAM TREVIRIS STETIT ANNIS MILLE TRECENTIS.
PERSTET ET ÆTERNA PACE FRVATVR. AMEN.
번역하면,
“트리어는 로마보다 천삼백 년 앞서 서 있었다.
그것이 계속 존재하고 영원한 평화를 누리기를 바란다. 아멘“
이렇듯 조금 황당한 사료 한 편에 의해 독일의 최고(最古) 도시에 오른 트리어를 그러나 다른 도시들은 인정을 하지 않고 있으며, 독일 정부나 학계에서도 오래된 도시의 순위를 정확히 선정하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트리어 시 곳곳에 산재한 고대 로마의 대규모 유적들을 살펴본 방문객들은 이 Rotes Haus의 문장을 본 후, 트리어가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1260호 14면, 2022년 3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