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돌아와야 할 우리 문화유산
-잃고, 잊고 또는 숨겨진 우리 문화유산 이야기(19)

고려인삼은 독립운동 자금이었다.

세계에 고려를 알린 인삼

개성은 고려의 왕도였다. 그러나 당시의 세계인들이 더 많이 기억하고 있었던 것은 고려의 수도 개성보다는 고려의 인삼이었다. 개성 예성강 하구에 있던 벽란도는 무역상들의 교역 중심지였다. 이곳에 중국과 일본, 아라비아, 페르시아 상인들이 고려의 인삼을 구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고려인삼은 오직 한반도에서만 자라고 그 효능을 세계인들은 이미 그 시절부터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의 왕래로 고려(KOREA)는 세계에 알려졌고 지금의 ‘코리아’가 되었다. 이처럼 세계에 고려를 알린 인삼에는 다른 나라의 그것과는 다른 특별한 그 무엇이 있었을 것이다.

북한도 오랫동안 고려인삼을 내세운 다양한 판매 전략을 세워 왔다. 북한의 8부작 드라마 「임진년의 심마니들」은 일본의 수탈에 맞서 고려인삼을 지키려는 주인공들의 분투를 그렸다. 과거엔 김정일 위원장까지 나서서 북한의 고려인삼을 알리려는 노력을 다양하게 시도했었다.

일제강점기, 고려인삼은 독립자금

충남 부여군에 ‘인삼박물관’이 있다. 인삼의 역사와 가치, 한국 사회에서 차지하는 의미 등을 알기 쉽게 전시해 놓았다. 이 중 가장 눈에 띄는 전시물은 우리 인삼을 다른 나라의 삼(蔘)과 비교해 놓은 것으로 모양이나 색깔, 성분 등의 확연한 차이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해놓았다. 한국의 삼은 미국, 캐나다의 서양삼이나 중국의 삼칠, 일본의 죽절삼과는 모양부터 확연히 다르다. 무엇보다 사람의 형태를 닮은 삼은 고려인삼뿐이다.

세계인으로부터 품질을 인정받은 고려인삼은 예로부터 귀하게 여겨졌고 가격 또한 높았다. 고려인삼은 17세기에 이르러 중국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

이런 우리의 고려인삼이 일제강점기에 독립활동에도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때론 일제에 의해 강제 수탈되기도 했지만 필요한 경우엔 그 모습과 용도를 바꿔 독립자금으로 변통되었던 것이다.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이 지나고 새로운 대한민국 100년을 기약하는 시점에서 고려인삼의 역사적 가치를 되새기는 작업이 필요하다.

김광제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사의 논문 「일제시기 상해 고려인삼 상인들의 활동」을 보면 고려인삼은 오늘날의 달러($)와 같은 국제통용 화폐로서의 기능이 있었다고 한다. 고려인삼은 상해를 거쳐 중국과 싱가포르, 홍콩, 나아가 동남아, 북미, 중남미 등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갔다. 상해에는 많은 인삼 상점이 있었는데 이유선의 지성공사, 한진교의 해송양행, 김시문의 금문공사, 조성섭의 원창공사, 김홍서의 삼성공사 등이 대표적이다.

해송양행은 인삼 판매 수익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제공한 애국 기업이었다. 해송양행은 1919년 김규식이 파리 강화회의 참석을 위해 프랑스로 갈 때 거액의 여비를 제공했고, 1920년 안창호가 홍콩, 베이징 등지로 미 의원단을 만나러 갈 때도 비용을 제공했다. 원창공사는 임시정부 의정원장을 역임한 조상섭 지사가 설립한 기업으로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인삼 무역을 통해 조달해 왔다. 윤봉길 의사와 여운형 선생도 인삼장사를 하면서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했다고 하니 당시 인삼은 독립투사에게 무기와 다름없었다.

인삼 상인들은 전세계 ‘진생 로드’를 누비며 동포들에게 독립투쟁 소식을 알리고 자신의 상점을 독립군 은신처로 제공했으며, 때로는 정보원 역할과 의열항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장사로 얻은 이익을 나라 되찾는 일에 바치기도 했다. 독립자금은 항일운동의 심장부에 공급되는 혈액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비밀리에 지원되는 경우가 많아 상당 부분이 드러나기 힘든 실정이었다.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인삼 상인에 대한 조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이유다.

고려인삼이 국가적으로 본격 관리된 것은 1899년 대한제국 궁내부 ‘삼정과(蔘政課)’ 설치 이후이다.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추진하던 고종 황제는 필요한 재정을 인삼 사업으로 조달하려고 했다.

당시 민영익과 관련해 지금까지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있다.

고종은 민영익에게 인삼의 해외 판매 전매권을 주며 홍삼 1만 근을 맡겼다고 한다. 실로 엄청난 양이다. 그러나 당시 민영익이 대한제국에 지불하지 않은 돈이 금화로 무려 600만 환으로, 이 돈은 1907년 대한제국 재정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1914년 민영익이 죽자 사람들은 사라진 ‘민영익의 돈’을 찾아 나섰다. 그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집세조차 못내 쫓겨날 처지였다. 이에 독립운동가들도 민영익의 자금을 추적했지만 결국 한 푼도 찾지 못했다. 당시 홍삼 1만 근이면 요즘 시세로 수백억 원이라 하니 당시 민영익의 돈이 임시정부에서 사용되었더라면 ‘조선’의 역사가 그 후 어떻게 바뀌었을까 그냥 상상이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으니…….

그 후 삼정과의 사업권은 일제에 빼앗겼다. 인기가 높은 홍삼 사업은 삼정물산(미쓰이물산)으로 넘어가고 독립운동가들은 비전매품인 백삼만 팔수 있게 되었다. 조국에서 생산되는 고려홍삼으로 일본 기업은 큰돈을 벌었고, 정작 이 땅의 주인인 독립운동가들은 행상으로 근근이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을 해야 했으니 이보다 더한 아이러니가 있을까.

최근 고려인삼의 종주권을 놓고 중국과 다툼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는 일제강점기 식물 주권을 지키지 못해 절반이 넘는 토종식물의 학명(學名)에 일본인의 이름이나 일본어 명칭을 붙인 사실을 알고 있다. 일본이 국제학회에 등재한 한반도 토종식물의 이름에는 약탈자인 초대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의 이름이 들어 간 금강초롱(Hanabusaya asiatica Nakai)과,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의 이름이 들어 간 백합 식물인 평양지모 (Terauchia anemarrhenaefolia Nakai) 등이 있다.

3・1 만세운동이 100년이 지난 지금 고려인삼의 가치와 역사 또한 되돌아보고 챙겨야 한다. 그리고 토종씨앗과 식물 등 여러 분야에서 생물주권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고려인삼의 종주권을 지키기 위한 남북공동의 연구도 시급히 추진해야 한다.

1268호 30면, 2022년 5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