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돌아와야 할 우리 문화유산
-잃고, 잊고 또는 숨겨진 우리 문화유산 이야기(23)

일본의 보검 칠지도와 백제의 상감기법

전설의 검, 칠지도

칠지도는 가운데 칼날을 중심으로 좌우 양쪽에 나뭇가지 모양의 칼날 여섯 개가 뻗어 있는 독특한 모양을 띠고 있어 이 모습을 본떠 칠지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총길이 74.9센티미터에 이르며 특유의 모양으로 미루어 보아 실제 무기로 사용되었기보다는 상징적인 용도나 의례용으로 제작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칠지도는 일본 나라현 덴리시에 위치한 이소노카미신궁에 보관되어 전해져 내려왔다. 이소노카미신궁은 일본에서 오래된 신사 가운데 하나로 일본 최고(最古)의 역사서인 『일본서기』에도 등장하는 신궁이다. 이 신궁에는 신무천황이 일본을 평정할 때 썼던 전설의 검이 모셔져 있다고 전하며, 그곳은 사람의 발길이 닿아서는 안 된다는 금족지(禁足地)라고 불렸다. 그렇게 전설로만 내려오던 칼의 존재는 1874년 이소노카미신궁의 대궁사였던 간 마사토모가 금족지 남서쪽에 위치한 신고(무기보관창고)에서 칠지도를 발견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신성한 칼은 발견 당시 매우 녹슬어 있었으나 녹을 제거하자 금으로 새겨진 글자가 나타났다. 칠지도에는 앞면에 35자, 뒷면에 27자, 총 62자의 명문이 금상감 기법으로 새겨져 있었다. 금상감 기법은 매우 고난이도의 기술로 먼저 칼에 홈을 파고 나서 그 위에 금을 박아 넣어 글자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칠지도를 만든 백제인들이 당대 최고 수준의 금속공예술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칠지도는 그 높은 역사적・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1953년 일본의 국보 고고자료 제15호에 지정되었다.

칠지도에 새겨진 글자가 발견되자 이를 해독하기 위해 많은 학자들이 칠지도를 보관 중인 이소노카미신궁 연구를 진행했다. 그러나 62자의 글자 중 녹이 슬고 훼손되어 지워지거나 판독이 어려운 것들이 있어서 명문 해석을 두고 다양한 학설이 대립하게 되었다. 특히 한국과 일본 학계는 명문 해석을 두고 큰 차이점을 보이는데, 주요 쟁점은 이 칼이 왜 백제에서 일본으로 전해지게 되었는 지이다. 즉 칠지도가 백제 왕이 일본의 왕에게 내린 하사품인지 아니면 그와 반대로 백제에서 일본으로 바친 헌상품인지, 그 해석을 두고 한일 양국이 대립하고 있다.

이소노카미신궁에 보관된 칠지도

일본은 칠지도(七支刀)를 『일본서기』의 「신공왕후기」에 등장하는 칠지도(七枝刀)라고 발표하며 백제가 왜국에 헌상한 칼이라고 주장했다. 심지어 연대를 끼워 맞추기 위해 칠지도 앞면 첫 부분의 泰□(태□)를 중국 동진의 연호인 태화(太和)를 표기한 것이라고 글자까지 바꿔가며 왜국의 신공왕후가 신라와 임나를 평정하고 제주를 백제에 하사한 후 이를 감사히 여긴 백제가 신공왕후에게 바친 칠지도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칠지도는 『일본서기』의 기록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증거라고 주장하며 임나일본부설을 정설화하고 나중에 조선 침략을 위한 역사적 근거로 이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백제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지석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독자적인 연호를 쓰던 강대국이었고, 일본이 백제가 칼을 헌상했다고 주장하는 신공왕후 49년은 서기 369년으로 근초고왕이 백제를 다스리던 시기이다. 근초고왕은 활발한 정복 전쟁과 대외정책으로 백제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정복 군주로, 고구려 평양성 전투에서 고국원왕이 전사하기도 했다. 당시 동북아 정세와 막강한 군사력을 지녔던 백제의 국력을 고려했을 때, 강대국 백제가 왜국에게 칠지도를 ‘헌상’했다는 말은 이해하기 어렵다.

칠지도는 백제왕이 왜왕에게 하사한 칼

1981년 일본 NHK가 엑스레이로 칠지도를 촬영하고 판독하면서 이전에는 오월(五月)로 알려졌던 글자가 실제로는 십□월(十□月)이었음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앞면의 십일월십육일병오(十□月十六日丙午)라고 적힌 칠지도의 정확한 제작일을 찾기 위해 11월 16일과 12월 16일의 간지가 병오인 해를 찾아보니, 408년(전지왕 4년) 11월 16일에 칠지도가 제작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었다. 새롭게 밝혀진 408년이라는 제작 연도 역시 『일본서기』에 기록된 연도와는 전혀 맞지 않으므로 칠지도는 백제가 왜국에 헌상한 것이라는 주장은 다시 한번 설득력을 잃었다.

명문에 대한 구체적이고 자세한 내용은 학자마다 다르게 해석하지만, 밝혀진 글자를 토대로 대체적인 내용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앞면: 태□ 4년 11월 16일 병오일 정오에 백번 단련한 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로 모든 병해를 피할 수 있으니, 마땅히 공손한 후왕(侯王)에게 준다. □□□□이(가) 만들었다.

뒷면: 예로부터 이와 같은 칼은 없었다. 백제 왕세자는 성스러운 말씀으로 왜왕 지(旨)를 위해 만들었으니 후세에 전하여 보아라

여기서 또 주목할 점은, 후왕(侯王)이라는 표현이다. 왜왕을 일컬어 후왕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데, 후(侯)라는 표현은 왕보다 밑에 있는 신하를 지칭하는 것으로 제후(諸侯)나 후작(侯爵) 등에 쓰이는 글자이다. 즉, 후왕은 황제와 군신의 관계를 맺고 봉국을 하사받아 통치하던 사람을 뜻하는 단어로, 기존의 일본 학계의 주장과는 다르게 오히려 백제가 위에 있는 종주국이었고, 일본은 백제에 예속되어 있던 속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칠지도는 윗사람인 백제의 왕이 아랫사람인 일본의 왕에게 내린 하사품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뒷면에 적힌 전시후세(傳示後世)라는 말은 ‘후세에 전하여 보여라’라는 뜻으로 전형적인 명령문이다. 만약 칠지도가 백제왕이 왜왕에게 헌상하는 칼이었다면 감히 이런 표현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칼을 바치면서 후세에 보일 것을 미리 결정하여 통보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또한 백제의 왕세자가 왜왕의 이름(旨)까지 거명하고 있다는 점은 칠지도는 백제가 일본에게 하사한 칼이라는 주장을 더욱 명확하게 뒷받침해준다.

백제는 중앙집권화를 이루어갈 때, 지방의 호족들을 중앙의 권력체계로 복속시키기 위해 유화책으로써 신표를 하사한 전통이 있었다. 이런 의미로 보아, 칠지도는 윗사람인 백제왕이 아랫사람인 왜왕에게 일종의 신표로써 칠지도를 하사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1272호 30면, 2022년 6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