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학 편집장과 함께하는 역사산책(46)

독일 정신의 발원지 보름스(Worms)

중세 게르만 문학 서사시 니벨룽엔(Nibelungenlied)의 전설이 전해 내려오며, 라인강이 흐르는 보름스는 루터(Martin Luther)의 외침과 종교개혁의 정당성을 이끌어낸 역사의 장소이다. 이렇듯 보름스는 자연과 개신교라는 종교 그리고 게르만족 고유의 문화를 아우르는 독일 정신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일반인들에게는 루터에 대한 종교재판이 열린 도시, 루터가 거대한 위협과 핍박 속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지켜낸 곳으로 보름스는 잘 알려져 있다. 2021년 보름스 시는 이 종교재판을 기념하기 위해 “500 Jahre Luther in Worms”라는 표어로 대대적인 행사를 준비하였으나, 코로나로 인해 많은 행사들이 취소되어 많은 아쉬움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루터에 대한 종교재판의 유명세로 인해 2000년 역사 도시 보름스의 가치가 매우 제한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점도 사실이다.

이번 “역사산책 보름스” 편에서는 중세시대 중요 도시로서의 보름스, 루터의 종교재판 현장,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유대인공동체 유적, 그리고 독일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니벨룽엔의 노래”의 주 무대 보름스를 함께 살펴보며, 보름스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한다.

◈ 천년을 견뎌낸 보름스 대성당 2

보름스 도심의 가장 높은 지점에 위치한 보름스 대성당은 보름스 상징의 하나로서 마인츠 대성당, 슈파이어 대성당과 함께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 건축물 중 가장 위대한 작품 중 하나이다.

독일 로마네스크건축의 특징

독일 로마네스크건축의 특징으로 첫째, 다양한 색상의 대리석을 사용하지 않았고 지나친 장식을 피했으나 중점적인 장식은 대단히 큰 효과가 있었다.

둘째, 평면은 기본적으로 바실리카형식이나 교회건물의 동서 양단에 후진(apse)을 두는 특이한 형식이 나타나게 된다. 동서(건축물의 앞,뒤)에 후진이 설치됨에 따라 입구는 건물의 측면을 이용하는 형식이 생기게 된다.

셋째, 신랑(nave)과 측랑(aisle)이 길어지고 천정이 높아짐에 따라 장엄한 내부공간을 이루는데 성공한다.

넷째, 내부에 나선형 계단을 갖는 원통형의 원탑이 건물의 동서 양단에 2개씩 세워지고 지붕의 교차부분에는 커다란 팔각탑이 놓이는 등 건물 전체의 윤곽에 다양한 변화를 주게 된다.

평면구조는 3랑식을 신랑의 동서양단에 후진(apse)을 둔 결과 출입구는 양측면 중앙부에 있다. 양단의 후진 좌우로 2개의 원탑이 각각 있고 채광을 위한 팔각탑을 합쳐 모두 5개의수직적인 구조물은 외부공간 구성에 다양성을 갖고 있다.

보름스대성당은 측랑(aisle)과 더불어 신랑(nave)까지도 교차볼트로 되어 있고 특히 리브(rib)구조를 사용하고 있어 고딕(Gothic) 양식의 전초적인 감각을 준다. 또한 조각장식은 별로 쓰지 않고 웅대한 공간과 아름다운 비례를 창출해 낸 기법은 독일 로마네스크의 결정체이다.

보름스대성당의 역사와 특징

보름스 대성당의 역사는 보름스 대성당의 기원은 초기 기독교 시대와 후기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최초의 보름스 주교(Berthulf, 614) 당시의 대성당은 오늘날보다 상당히 작았다.

오늘날의 웅장한 대성당 건물은 마인츠 대성당 건립을 주도한 당시 마인츠 Willigis 대주교의 오른팔이라 불렸던 Burchard 주교(1000 – 1025)주교가 보름스 성당에 주교로 부임하며 그 건설이 시작되었다. 1018년 Burchard 주교에 의해 세워지기 시작하여 1320년에 가서야 완공되었다.

앞뒤 두 개씩 솟은 네 개의 첨탑은 마치 성벽을 보는 듯하고, 검게 그을린 외벽은 단단하고 위엄 있어 보인다. 실제로 당시 기술로 몇 겹의 내진 설계가 동원된 건물이라고 한다.

앞뒤 두 개의 탑 사이에 각각 돔이 있는 구조가 특이하다. 내부 역시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인위적 조명이 거의 없어 어둡지만 엄숙한 분위기이다. 인위적으로 화려함을 추구하지는 않지만 내부 벽에 세워진 조각이나 부조 등은 매우 수준이 높다. 또한 발타자르 노이만(Balthasar Neumann)이 만든 것으로 알려진 중앙 제단도 눈에 띈다.

2차 재건인 1110년에 축성된 옛 성당 건물의 잔재는 1층 평면 부분과 서쪽 탑의 저층부만 남아있다. 그 외 나머지 부분은 대부분 1181년에 완공된 것들이다. 그러나 서쪽의 성가대석 부분과 아치 부분은 13세기에 시공된 것이며, 14세기에 남쪽 정문이 추가되었고 중앙 돔이 재건되었다.

1000년을 견뎌온 보름스대성당은 그 역사만큼 많은 굴곡을 걸쳤다.

30년전쟁(1618-1648) 기간 중인 1632년부터 1635년까지 스웨덴 군대가 이 마을을 점령했고 개신교 설교자가 성당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또한 팔츠왕위전쟁(1688-1697) 때에는 프랑스 왕 루이 14세의 명령에 따라 그의 군대는 하이델베르크, 만하임, 슈파이어, 보름스를 황폐화시켰다. 모든 교회가 약탈당하고 불태워졌지만 슈파이어 대성당과 달리 보름스 대성당을 폭파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그러나 보름스 대성당은 그것은 완전히 불타고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다.

1792년 말에는 슈파이어, 보름스, 마인츠, 프랑크푸르트는 혁명군에 의해 정복되었는데, 보름스 대성당은 마구간과 창고로 사용되기까지 하였으며, 1818년에서 1830년 사이에 회랑은 철거되었고 그 돌은 경매에 부쳐지기까지 하였다.

또한 1945년 2월 21일과 3월 18일에 있었던 대대적인 폭격으로 보름스 대성당 지붕이 모두 불에 타는 아픔도 겪었다.

보름스 대성당은 길이가 110m, 넓이가 27m, 수랑(십자형 성당의 좌우 날개 부분) 부분까지 포함시키면 36m이다. 회중석 부분의 높이는 26m이고, 돔 아래부분의 높이는 40m이다.

보름스 대성당 옆 정원

루터 재판이 열렸던 자리에는 종교개혁 큰 걸음의 신발

1521년, 루터는 95개조 논제로 야기된 여러 신학적인 입장들에 대한 변증을 하기 위해 황제 칼 5세가 주재하는 보름스 제국의회에 참여하라는 명을 받게 된다. 당시 루터가 머무르던 비텐베르크와 보름스의 거리는 500km를 훌쩍 넘는 거리였다.

그러나 루터는 명령에 순종했고, 1521년 4월 2일 비텐베르크를 떠났다. 이후 보름스 제국의회 장소에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15일. 비텐베르크에서 보름스까지 루터는 에어푸르트, 고타, 프랑크푸르트 등에서 설교를 했고, 도시의 많은 사람들은 열광적으로 루터를 외쳤다.

루터 재판 청동기념물과 신발 모양 조형물

1521년 4월 18일 오후 6시 서른여덟 살 수도사 마르틴 루터는 이곳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와 고위 관리들 앞에 섰다. 보름스 대성당 지금은 정원이 된 주교궁(宮)에서 열린 제국회의였다.

회의 탁자에는 루터가 쓴 책이 잔뜩 쌓여 있었다. 3년여 전인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 교회에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는 ’95개 논제’를 붙인 이후 쓴 책들이다. 이 기간 ‘로마 교황의 지위’ ‘그리스도인의 자유’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고함’ 같은 팸플릿 책자를 여럿 냈다. 모두 교황과 로마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몇 달 전 교황(레오 10세)이 보낸 파문 경고 교서를 불태워 이미 수도사 지위를 박탈당한 상태였다.

루터는 이곳에서 16~18일 사흘간 심문을 받았다. 4월 17일 오후 4시 열린 심문에서 최종 답변을 하루 늦춰달라고 요청했다. 심문을 맡은 요한 에크 대주교의 질문은 두 가지였다. 이 책들을 썼는가? 주장을 철회하는가?

루터는 다음날인 4월 18일 이 자리에서 유명한 연설을 남긴다. “저의 양심은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아무것도 취소할 수 없습니다. 양심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것은 옳지 않을 뿐 아니라 안전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 이 몸을 도우소서. 아멘.” 연설 원문에는 “여기 제가 서 있습니다. 저는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라는 말이 있었다 한다.

교회사(史) 학자인 롤런드 베인턴 예일대 교수는 1978년 ‘Here I Stand(여기 내가 서 있습니다)’라는 제목으로 루터 평전을 쓰기도 했다.

루터가 심문을 받은 보름스 대성당옆 주교궁은 17세기 프랑스군 공격에 파괴되었고, 지금은 잔디 깔린 공원이다. 보름스 대성당 광장 오른편 철문 안쪽이 루터가 심문받던 자리다. 이 자리에는 청동기념물이 설치되어 있는데, 제국회의 450주년을 기념해 1971년 세운 것이다. 또한 보름스 로터리클럽은 2017년 종교개혁 500년을 맞아 이 조형물 앞에 신발 모양 조형물을 더했다. ‘루터의 신발’이라 명명했다. 종교개혁의 큰 발걸음을 내디딘 곳이란 뜻을 담았다.

루터 나무(Lutherbaum)

루터 나무(Lutherbaum)

루터 광장에서 2.2㎞ 정도 떨어져 있는 Lutherbaum Strasse 인근 Schlossgasse 5번지에는 루터 나무(Lutherbaum)이 서있다.

전승에 의하면 루터를 심판하는 보름스 제국회의가 열렸을 때 동네 할머니 둘이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한 할머니가 지팡이를 땅에 꽂으며 루터 주장이 옳다면 여기에서 잎이 솟을 것이라 했다 한다. 그 지팡이가 나무가 되었고, 이후 루터 나무라고 불려졌다고 한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종교개혁에 희망을 품었던 당시 일반인들의 소망을 보여주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당시 루터 재판에는 1만 4000여 명이 몰려들었다. 그때 보름스 인구는 7000명이었다. 로마 교황에 맞선 루터의 용기에 민심이 꿈틀거린 것이다.

한편 루터 나무에 덧댄 철판에는 두 할머니가 논쟁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독자들도 꼭 한번 방문해보기를 권한다.

1306호 20면, 2023년 3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