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와 지금/ (망향의 50년 ) ➀

류현옥

지난 50년을 연결하는 세월의 다리, 질풍노도의 젊음으로 두려움 없이 걸어온 다리. 나는 어느 날 그 다리 끝에 더 갈 곳이 멀지 않은 자리에 선 자신을 발견한다. 늙은이가 되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지난 몇 년간은 유독 은퇴 생활이기에 공허한 나날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살았다. 언젠가는 노년기에 도착하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렇게 당황하게 된 것은 외부와 차단된 생활이 가져온 충격이다.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으로 문을 닫고 출입이 금지되어 세상이 정지되고 그동안의 모든 활동이 기약 없이 중단되자, 사색의 시간이 많아지며 마음의 변화가 생겼다. 코로나는 소리도 없이 인간계를 침범하였다. 한 공간에 앉아 나누어 마신 공기로 감염이 되면 환자의 운명을 같이하게 한다. 예방 대책으로 만남이 정지되자 혼자 있는 생활이 많아진 시간이 생의 한계와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만든다.

마지막 단계에까지 재미없는 나날이 아니기를 기원하지 않았던가? 세속적인 생활구조에서 해방되어 나의 시간으로 마음대로 살겠다고 다짐해가며 살아온 지난 몇 년이다. 정년 퇴직자의 시간이 오면 주어진 시간을 마음껏 활용하리라 생각했다. 오히려 넘쳐나는 시간이 부담스러울 것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심신이 노쇠하여 기력이 떨어지면 마음에 여유가 생길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때와 지금 사이에 놓인 다리 위에서의 중요했던 평생이 서서히 평화스럽게 막을 내려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다리는 산자들이 모르는 미지의 더 먼 곳으로 연결되고 있다고.

그때, 50년 전 나는 22살의 나이로 태어나서 자라난 곳을 떠났다. 잔뼈가 굵어지고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키우다가 나이에 비해 미숙한 경험 부족의 젊은 여자로 더 넒은 세상으로 연결되는 다리 위에 힘들지 않게 뛰어 올랐다. 그날부터는 뒤돌아볼 여가도 없이 바쁘게 앞만 보고 걸었다.

가슴에 담고 떠난 여과되지 않은 잊히지 않는 많은 일들은 빛바랜 추억이 되어 도착한 신세계에서 하게 될 이방인의 경험을 위해 자리를 비워주었다. 뇌리의 한구석에 숨어서 망향의 슬픔을 잊게 해주는 그림자로 존재했다. 서명하고 떠난 노동계약, 울면서 약속했던 귀향을 거부했고 얼마간만 더 살겠다던 이국땅에 결국 주저앉았다. 험한 다리 위의 돌길을 사향(思鄕)에 젖어 먼 하늘을 바라보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나 걸었다.

그때만큼 용기백배한 날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사향의 아픔은 오히려 타향 생활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되어 주었고 마음 한복판에 자리하여 평생을 지켜주는 기둥이 되어주었다. 몰랐기에 가볍게 떠난, 그 때와 다름없는 걸음걸이로 걸을 수가 있었다.

그날로부터 반백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 가벼웠던 그 첫발걸음이 가볍기만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기억 속에서 꿈틀거리며 세월이 갈수록 무게를 더해 갈 줄이야! 지금과 연결되는 시점의 출발점이었던 다리위에서 새 세상을 향해 떠났던 과거의 발자국마다 세월의 무게가 가중되고 있다.

그때, 그렇게 가볍게 들어선 다리 위의 세상은 이전에 보지 못한 다른 세계였다. 너무나 달랐다. 시내를 채운 공기의 냄새와 하늘색이 달랐고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얼굴색이 달랐다. 영화에서 보았던 코가 크고 피부가 흰 장신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다른 말을 하고 있었고 먹는 음식이 달랐다. 그 속으로 섞여 들어가 긴 다리를 걸어오는 동안 그들과 닮아갔고 그들의 말을 배웠다. 그들의 얼굴 표정을 이해하고 그들의 음식까지 먹는 데 익숙해졌다.

언제부턴가 꿈에도 그리웠던 고향이 여행지로 변했다. 고향산천의 부모와 친지들을 방문한 후에는 마치 여행자가 여로를 풀기위해 고향으로 되돌아가듯 잠시 떠난 나그네의 집, 타향의 집으로 돌아갔다. 새 가족과 친지들이 그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국이 제2의 고향이 되었고 끊임없이 왕래하는 동안 두 세계는 나의 마음속에서 혼재 결합되어 갔다. 이제 그렇게 걸어온 다리 끝에 서서 한번 뒤를 돌아보며 어렴풋이 끝나가는 인생의 한계선을 짐작해본다. 앞을 바라보면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이 보일듯하다. 몸과 마음의 힘이 다해가고 무거운 물건을 버리는 단계에 왔다.

그 한계선 안에 예측할 수 없는 시간의 여생이 남아있다. 지나간 한평생을 마무리하는 단계, 더한층 고귀한 날들로 바쁘게 살던 지나온 날들만큼 긴장되고 초조하다. 느긋하게 이제는 기다리기만 하면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바동거리는 것은 나그네 근성일까.

오직 앞만 보고 달려온 습성으로 허둥지둥 한다.

다리위에서 보낸 세월은 온갖 희비애락이 농축된 시간이다. 전력을 다하여 투쟁한 반평생이다. 인간의 역사를 보면 긴 반평생이라 할 수 있는 시간이지만 지구의 역사로 보면 눈 깜짝할 순간이다. 다리 위의 인생은 생사만큼이나 중요한 일들로 가득하다. 너무나 많은 일들이 일어난 터질 것 같이 팽팽하게 담겨 있다. 이제는 정리하고 마무리하고 이루지 못한 꿈을 그린 오색 꽃무늬의 원피스는 다리 아래로 던져 버려야한다. 어느 날 세상을 향한 문을 닫고 눈을 감을 것이다. 영원한 침상이 될 나무관을 미리 주문할 일만 남는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같은 날 그곳 고국을 떠나서 같이 다리를 건너온 사람들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한날한시에 시작한 이방인의 한평생을 함께 되돌아보자는 의도다. 나와 일맥상통하는 그들의 세계 속으로 들여다보고 싶다. 마음으로 알고 말이 통하는 사람들이다. 한 비행기를 타고 이방인의 여정 속으로 들어섰던 사람들, 동시대를 살아온 동료들을 찾아보는 일은 스스로를 거울 속에서 보는 일이며 정리하는 일이다.

눈물로 맺어진 인연, 배고픈 시절을 아는 귀한 동료들, “그때 …”하면 금방 알아듣는 사람들, 떠나온 곳에서 같이 출발한 역사로 연결되어 있다. 정 많은 세상을 떠나와서 정신적 외로움을 감당한 용사들이다. 운명의 공동체들로 만나면 감동과 반가움의 환성을 지르면 끌어안는다. 사느라고 잊었던 끈끈한 옛정이 되살아나 그때와 지금을 연결해준다. 제각기 다르게 경험한 밀착된 시간들이 만나서 다시 보는 그 순간 이 반세기 전으로 끌고 간다.

남의 나라에서 남의 말로 오직 살아남기 위해 만신창이가 되도록 착취한 몸과 마음은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50년 전의 세상으로 데려간다. 자주 흘렸던 그 때의 눈물이 다시 콧등을 시큰하게 하지만 주름진 얼굴에 웃음을 담고 끌어안는다.

“너도 애인 두고 왔어?”라는 질문으로 나를 당황하게 했던 박여사는 어머니뻘이었다. 누구의 입에서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모르게 왕언니로 불렸다 . 두고 온 아들이 나보다 한 살 아래라고 했다. 다짜고짜로 묻는 말 뒤에는 은연중에 예감 같은 것이 들어있었다는 것으로 회상된다. 얼마간의 세월이 흐르면서는 질문의 내용이 바뀌었다.

“너 애인 생겼어?”

“새사람 생겼어?”

“할머니 되었어?”

반세기가 지나면서 받은 질문들의 변화다. 20여 년 전 모임에서 만났을 때는 다른 내용의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아직 힘이 남아 있을 때의 말은 “어디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질문을 제시하고 해법을 고민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생각나는 대로 말을 하고 말처럼 다 될 것 같았다.

애써 키운 자식들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운 노년기를 살아야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남의 나라에서 오만 사람들 눈치를 보며 살았기에 노년기에까지 자식눈치를 살피며 살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다짐을 했다.

왕 언니는 얼마 전 구순이 넘은 고령으로 귀국하셔 소원대로 고국땅에서 눈을 감으셨다 . 그녀의 생을 지켜 본 나이기에 지난날을 회상할 때마다 은은한 감동이 가슴속에 흐름을 느낀다. 전무후무의 표본으로 남을 여성의 한 인생이다. 정말 그 길밖에 없었을까?

왕언니는 6명의 자녀를 둔 어머니다. 노인과 병자를 간호하는 직업이 허용한 이민 노동자로 출발했다. 중요한 것은 언어였다. 노동주의 나라에서 정한 연령의 한계에 맞추어 출국을 했다.

예전 43세 나이에 독일어를 배우겠다고 노트와 연필을 들고 책상 앞에 앉으면 두고 온 자식들이 눈앞에 어른거린다고 했다. 밤잠이 부족하여 피로한 눈으로 생활의 원칙대로 학생의 자세를 취해야 했다. “돈을 주고 배워도 될동말동한데 돈을 받아가며 배우는데, 야 흉내라도 내어야 할 게 아닌감?” 지금의 젊은 세대들이 들으면 우리나라 역사에 정말 그런 때도 있었던가? 반문하지 않을까 싶다.

“금쪽같은 자식들을 두고 왔어.” “자식들 먹여 살리려고 돈 벌러 왔어.” 어떤 다른 말로도 둘러댈 수 없는 당시의 상황이었다. 독일 늙은이들 궁둥이 닦아주려고 만 리 타향에 왔다고 했다. 그런 말을 스스럼없이 했던 비장한 마음을 누가 이해하여줄까? 당시 나이 든 동료 한 사람이 이렇게 표현한다. “그분의 강철 같은 의지가 우리에게 용기를 주었어.”

한국간호사들의 공동 기숙사는 폐결핵병동 위층 지붕 밑이었다. 긴 복도 양 쪽으로 한 칸짜리 방들이 있었다. 경사진 지붕을 따라 비스듬한 방의 천정은 작은 창문이 있는 벽 쪽으로는 키가 작은 나도 구부려야 했다. 소파가 하나 벽에 붙어 있고 싱크대가 있었다. 어느 날 영화관에 갔다가 늦게 돌아오니 복도에 환한 불이 켜있고 공동 샤워실과 화장실에서 흐르는 물소리에 섞여서 흘러나오는 왕언니의 화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변기 앞에 앉아 소매를 걷어 올린 팔을 변기 속에 넣어 휘젓고 있었다. 누군가 생리대를 변기에 넣었다고 했다. 막힌 변기에서 물이 넘쳐서 화장실 바닥을 흥건하게 채우고 복도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70년대 수세식 화장실의 구조를 살았던 우리들이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생리대는 변기 옆의 쓰레기통에 넣어라’ 는 경고문을 볼 수 있다. 그때마다 그날 밤의 장면이 눈앞에 떠오른다. 창피해서 기공사를 부를 수가 없어 팔을 휘 젖어 똥물에 퉁퉁 불어 배수관을 막고 있는 생리대를 끄집어내고 화장실 바닥을 닦았다고 몇 번이고 이야기했다. 그녀는 종종 우리에게 주어진 민간외교 역할을 명심하고 매사에 한국인의 명예가 손상되지 않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가을 미술전시회관에서였다. 유명화가 전시회의 오프닝이었다. 입구에서 나누어주는 샴페인 잔을 들고 서서 지인들과 대화를 하고 오랜만에 만난 사람과 반갑게 인사를 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그 속에서 귀에 익은 우리말이 귓가를 스쳤다. 젊은 동양 여자 둘이 반가운 한국말을 하는 대화였다. 한번 돌아본 후에 여유를 내어 인사라도 나누겠다고 생각하며 건네주는 술잔을 들고 대형 그림 앞에 섰다.

그림은 창살 없는 대형 유리벽을 통해 정원이 보이는 큰 거울 앞에 앉아 화장을 하고 있는 여인의 뒷모습이다. 어깨위로 걸친 모닝드레스 역시 화려한 꽃무늬로 정원의 모습에 조화를 이루었다. 화장대의 거울에 비치는 여인의 앞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시선을 끄는 초점은 거울에 비친 나체의 하반신이다. 요염하게 다리를 벌리고 앉은 모습인데 검붉은 색으로 여인의 하초가 표현되었다. 여인은 검붉은 립스틱으로 입술을 그리고 있다. 거울에 비친 속옷을 입지 않은 하체가 형이상학적으로 원색이고 하체의 더 깊은 곳이 그림의 포인트로 표현된 듯했다.

감상을 끝낸 사람들이 자리를 비켜주면 다음사람들이 다가간다. 제목을 보니 <준비>라고 쓰여 있다. 정부를 기다리는 여인이 다가올 성적 엑스타시 를 위한 준비라는 의미 같아 보였다. 다음 그림으로 옮겨 가는 도중에 다시 두 한국 여성과 부딪쳤다.

그 중 키 크고 화려한 원피스를 입은 여인이 작은 거울을 손에 들고 화장을 고치고 있었다. 다른 여인은 화장이 잘못된 점을 지적해 주고 있다. 지나가던 독일 사람이 손가락으로 화장실의 방향을 가리키며 영어로 한마디 하며 지나갔다. 뜻을 이해한 것인지 둘은 킥킥 웃었다.

느닷없이 왕언니 생각이 났다. 왕언니의 손녀뻘인데 저들은 여행자이거나 유학생으로 이곳에 와서 비싼 입장료로 들어온 미술관 내의 에티켓을 무시하고 전시관 한 복판에서 립스틱을 칠하고 있다. 건강남성을 유혹하는 마음을 관능적인 입술에 담아 거시기를 자극하는 그림을 모방하고 있었다. 이미 고인이 된 왕언니가 이 장면을 목격한다면 전형적인 그녀 전용의 어휘로 직선적으로 목소리를 높힐 것이다.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서서 왕언니의 자태를 눈앞에 그리며 아쉬워한다.

“그 때 생각은 잊으세요. 반세기 이전 이야기입니다 세상은 못 알아 볼만큼 달라졌습니다.” “어렵게 키운 2세들이 낳아 키운 신세대입니다. 모르실 것입니다.”

누군가 내 옆구리를 찌르며 귀에 대고 속삭이는 말이다. 우리 왕언니의 말이라고 생각하며 잠시 눈을 감고 집중하는데 같은 목소리의 속삭임이 들렸다.

“저 예쁜 코를 보십시오. 한국인 코가 아닙니다. 완전히 예술품이 아닙니까? 한국인 코도 아니지만 세계 어느 인종도 가지지 않은 예쁜 코입니다.” 나의 다른 옆구리를 치며 속삭이는 사람이 있어 눈을 떴다.

“저렇게 예쁜 아이들은 2세를 낳지 않습니다. 아이가 다른 코를 달고 나올 게 아닙니까?”

정말 그래서일까? 대한민국의 인구가 감소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 미인들은 자기만한 미남미녀를 낳을 자신이 없을 것이다. 인구 성장률이 마이너스로 떨어지고 감소율이 세계 1위란다. 지구상에서 좋다는 온갖 음식과 운동과 문화생활로 장수를 누리는 노인 인구는 점점 늘어간다. 태어나서 뒤를 이어줄 새 생명이 사망자보다 적으니 인구가 점점 줄어들 것이다.

우리가 노동이민을 떠날 당시는 인구조절을 위해 가족계획 포스터와 대국민운동 대형 현수막이 곳곳에 걸려 있었다. 2남 1녀의 슬로건 얼마 후 1남 1녀로 바뀌었다. 6명의 자녀를 두고 이국만 리로 떠난 왕언니는 슬로건보다 “네명이 더 많았다.”고 말했다. “어떻게 키울 것인지는 생각하지 않고 생기는 대로 낳다보니 그렇게 되었다“며 후회했다. 그녀의 자녀들이 태어날 때만 해도 ”제 먹을 것은 다 들고 나온다, 낳기만 하면 다 제 밥 찾아먹고 자라게 되어 있다“는 말이 통하는 시절이었다. 모두 자기 자식 키우느라 남 돌볼 여지가 없었던 때였고 국가는 그들이 조국의 장래를 등에 지고 갈 국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가족계획의 “적게 나아 잘 키우자” 슬로건은 이제 3세 시대에 결과가 나타난 셈이다. 홀어머니 왕언니의 책임감은 무거웠다. 가족계획은 그녀의 어깨를 더 무겁게 한 짐이었다. 혼자 키운 그들이 훗날 나라를 지키는 국력이라는 것을 말로 도와주었다면 두 어깨의 짐의 무게를 덜어 주었을 지도 모른다. 불과 반세기만에 줄어가는 인구 대책을 세우고 있다.

왕언니의 3세들은 자식을 낳고 양육의 책임을 거절한다. 태어나는 그날로 부모가 요구하는 일등 어린이, 일등 학생이 되고자 부모의 채찍을 감수하며 살았지만 2세에게는 반복하기를 거절한다.

관광버스를 타고 손뼉을 치며 부르던,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이 노래 속에 세대의 아이러니가 담겨있다. 시험공부 하느라 놀 시간이 없었고, 스트레스를 해소할 시간이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아 키우는 행복과 생의 즐거움을 알게 하는 생활은 프로그램에서 빠져있었다. 전달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일등국민이 되는 과정으로 한시도 쉬지 않고 공부를 해서 원하는 학교에 진학하여 원하는 직업인으로 취직이 되면 수준에 맞는 반려자와 결혼하는 일은 부수적으로 해결되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부모들은 남부럽지 않은 내 자식 내 집안으로 명성이 알려지면 결혼문제는 절로 해결될 것이라고, 같은 수준의 명문 집안이 손을 흔들며 다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고국행 짐을 싸면서 그녀가 남겼던 말 역시 기억에 남았다.

“자식 6명을 젊은 나한테 맡기고 먼저 떠난 남편을 원망해 본 적은 없어. 낳은 자식이니 에미로서 잘 키워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 그런데 운명인지 자연 섭리인지 몰라도 7공주가 손녀로 태어나면서도 손자는 하나도 없어!”

나는 그렇게 말하는 왕언니 진의를 헤아려 보았다. 반백년을 유럽에서 살았지만 한국의 딸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남아선호의 전통의식을 벗지 못한 그녀의 내심을 이해할 것 같아 침묵으로 들어주었다.

왕언니가 칠순의 친정어머니에게 6명의 자식을 맡기고 떠난 해로부터 10년 후의 일이다. 독일로 입양된 대한의 딸 이야기가 생각난다. 가족계획의 국가 대책을 무시하고 아들을 원해 40이 넘어 시도한 부모를 실망시키고 딸로 태어나 연유로 양부모를 찾아 이국으로 보내진 사례다.

분만실에서 딸일 경우 산모에게 보이지 말고 바로 입양아로 신고한다는 의사의 약속을 받았다. 생후 8개월 때 비행기를 타고 단 한 번도 보지 않고 돌아누운 어머니가 사는 모국을 떠났다. 양부모의 온갖 정성으로 잘 자라서 산부인과 의사가 된 그녀는 아들만 셋을 낳았다.

지구의 반대편에서 어머니가 된 대한의 후손은 딸을 갖고 싶어 한다. 그녀의 어머니가 아들을 원해 40이 넘어 여섯 번째로 임신하여 태어난 어머니의 젖꼭지를 한 번도 빨아보지 못한 채 고아 아닌 고아로 비행기에 태워졌다. 엄마는 딸을 낳지만 않는다면 한 번 더 임신을 하겠다고 했단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들은 점지(點指)되지 않았다.

우리는 종종 주위에서 일어나는 자연의 섭리에 의한 일을 보며 우연의 일치라고 단언한다. 그녀의 양모는 젖먹이를 입양해와 온갖 사랑과 정성으로 딸을 키우면서 낳아준 친모에게 감사한다고 자주 말했다. 양녀는 감사의 대가로 튼튼한 세 아들을 낳아 이어받은 양부모의 교육 정신으로 잘 키워 자랑스러운 게르만인으로 양부모의 나라에 기여하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운명의 아픔을 이기며 살아가는가?

왕언니의 씁쓸한 웃음기 띈 말을 기억한다. “단 한 애도 고추 하나 달고 나오지 않았어!” 했던 말이 어느 날 자학적으로 변했다. “전생의 죄라면 달게 받아야지!” 금쪽같은 자식들 생각으로 불면증으로 시달리면서 이민노동자로 산 것만으로도 전생의 업보를 다했는데 7명의 손녀들 중에 그거하나 달고나올 만도 하건만 행운의 남아는 없었다. 저승 문 앞에 서서 그녀가 했을 말이 궁금하다.

2020년 6월 5일, 1173호 14, 1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