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
‘한국인이라면 헐버트를 잊어서는 안 될 이유’ (1)

최 완
(21세기 한민족문화포럼
/ 한국인의 꿈 대표)

1905년 외교권을 찬탈하고 보호하겠다는 을사조약(늑약)을 내세운 노골적인 일제의 횡포와 수탈에 희망을 잃어가고 있던 한국인들에게 “한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빼어난 민족이다. 한민족이 언젠가는 우뚝 서리라”고 예견하며 한국인의 자부심을 부추겼던 한 미국인이 있었으니 그는 호머 헐버트 박사다.

헐버트는 대한제국의 근대화 교육기관으로 출발한 ‘육영공원’ 교사로 부임하여 자신이 한글을 배우고 한국역사를 공부하며 얻어낸 영감을 토로한 것이다.

비록 현재는 일제의 핍박과 탈취로 가난에 찌들어있고 희망을 잃은 게으름뱅이처럼 보이지만, 한민족의 찬란한 문화유산과 정신문화가 살아있으며, 창의력이 풍부했던 한국역사를 보았던 것이다. 여기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한민족임을 발견한 것이다. 약한 것 같았으나 강인한 민족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의 예언이 적중하였음을 오늘이 말해 주고 있다. “눈떠보니 선진국이 되었다” IT전문가 박태웅이 한 말이다. 어느 날 선진국이 되었음을 알아차렸다면, 우리나라가 정말 선진국이 되었는가? 에 대한 질문이 있어야 한다. 그 질문의 중심에는 우리국민들이 선진국민으로서 행복감을 느끼고 있는가? 이다.

진정한 선진국은, 서로에게 행복감을 나누는 이타주의적 윤리관이 있는 사회다. 우리 민족에게는 이 사상적 기원을 이루고 있는 홍익인간(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이념이 있다. 여기에 진정한 선진국으로 가는 답이 있다. 국민행복지수를 높이는 길이며, 세계 인류행복을 위해서 기여하는 길이기도 하다.

필자는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를 읽으며, 그의 삶이 홍익인간이었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철학이 온전히 이타주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필연코 선진국국민으로서 자부심이 가슴을 채우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 선진국국민이라면 민주주의 기본정신과 부합하는 평화와 인류공영에 뜻을 두는 편에 설 것이다.

‘21세기 한민족문화포럼’은 한민족차세대 정체성확립을 위한 책 <한국,한국인을 말하다>를 영어본과 독일어 본으로 각각 출판 준비 중에 있다. 이 책의 기억할만한 인물 목차에 헐버트 박사를 요약 소개한다. 그의 한국사랑과 인류사랑정신이 이들에게 귀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를 아직 읽지 못한 분들을 위하는 충정으로 책내용을 간추리며 필자의 견해도 첨가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헐버트 박사는 일제가 부당하게 조선을 침략하여 무고한 백성을 탄압하며 수탈하는 것을 보며 일제의 야만성에 분노하며, 이들이 위해(危害) 하려는 고종황제를 지켰다.

조선사랑에 깊이 빠져있었던 그는, 이내 조선독립운동에 나섰으며,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국내외서 조선인이 할 수 없는 일들을 도맡아서 해냈다.

한때는 고종황제 특사로 목숨을 걸기도 했으며, 세계소식통인 미. 영국신문사와 잡지사에 일본의 ‘을사조약(늑약)은, 고종황제가 도장을 날인하지 않았으므로 무효 이다 고 하는 고발기사를 연이어 기고하며 억울한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돕기를 호소하였다.

당시 친 일본이었던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과 미국정부에는, 정의로운 편에 서라고 성토하는 한편, 미국정부의 비열함을 미국국민들에게 고발하며 미국은 조선독립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주창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인에게 한글전용을 부르짖으며 앞장선 그의 집요한 노력이, 오늘날 한글을 통한 한국문화발전에 르네상스시대를 열게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큰 공을 세웠다.

실로 헐버트의 한국독립운동과 한국의 문화발전에 혼신을 다했던 세월이 무려 63년이었다. 자신의 조국보다 한국을 더 사랑하였던 그는 소원대로 한국땅에 영혼이 잠들었다. 헐버트는 영원히 우리 한국인 곁에 있는 것이다. 한국인이라면 그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우리가 본 받아야 할 그의 정신지주가 온전히 한국사랑이기 때문이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이방인

필자는,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를 읽으며, 호머 헐버트(1863–1949)는 미국인이면서도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는 이 책 지은이 김동진이 한국역사의 뒤 안에만 머물러 있었던 헐버트 박사의 흔적을 찾아서 미국, 일본 등, 헐버트의 발자취가 닿았던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 나서며 30여 년 동안을 헌신하며 발굴해낸 헐버트의 한국사랑일대기다.

헐버트는, 사회생활을 시작하기도 전인 23살인 1886년부터 1949년 한국에 와서 잠들기까지 63년이란 기나 긴 세월 동안 교육자, 한글학자, 언어학자, 언론인, 역사학자, 아리랑 채보자, 선교사, 독립운동가로서 그가 가진 역량을 오직 한국만을 위하여 사용해 왔다.그러기에 그의 일생은 한국사랑을 빼놓고는 다르게 설명할 수 없다.

안중근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한국인이라면 헐버트를 하루라도 잊어서는 아니 되오”라고 하며 조선인에게 간곡히 당부했던 이 한 마디로 헐버트의 한국과 한민족사랑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대변하고 있다. 이 같은 헐버트의 공적을 세세히 알게 해 준 김동진 지은이의 헌신적인 노력이 아니었더라면, 조선독립운동가요 조선근대화의 길잡이가 되었던 헐버트의 은혜를 까맣게 잊어버릴 번한 일이었다.

헐버트는 한국인보다 더 한글을 사랑하며 훈민정음을 부활시키다.

조선은 갑신정변 2년 뒤인 1886년 9월 23일에 최초의 근대화 사업으로 근대식 학교인 국립학교 ‘육영공원(育英公院)을 설립하며 서양인 교사가 필요했었다. 이때 미국 출신인 헐버트가 1886년 23살의 나이에 ‘육영공원’ 교사가 되기 위하여 조선 땅을 밟았다.

육원공원은 당시 조선의 개화기를 선도하는 인재들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서 헐버트를 중심으로 하여 벙커와 길모어 등 세 명 교사가 모든 교육분야를 담당하였다.

육영공원 출발 당시 학생은, 현직관리에서 선발한 14명과 양반 층 자제에서 선발한 21명으로 해서 총 35명이었는데, 관리층 선발 14명은 ‘좌원’, 양반층 선발 21명은 ‘우원’으로 반을 나누어서 영어, 지리, 수학을 중심으로 가르쳤다. 학생 중에 이완용도 있었다. 이완용은 육영공원에서 1년 동안 영어와 신학문을 배운 뒤 1887년 미국 워싱턴 조선공사관 참사관으로 임명되었다. *이완용은 이 후에 매국노가 되다.

헐버트는 육영공원 교사로 부임하자마자 학생들을 잘 가르쳐야 한다고 하는 생각으로 조선말, 글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한글을 배운지 4일 만에 한글을 쓰고 읽으면서 일주일 만에 한글이 위대한 문자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며, 조선인들이 위대한 한글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게 생각 되었다. 그는 곧 한글문자를 학술적으로 증명해 내며 한글의 우수성에 매료되었다. 우수한 한글의 가치를 높이기 위하여 한글을 통해 교육을 넓히고 교육확장으로 문명진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하는 확고한 교육철학을 세웠다.

현대문명의 진화를 위해서는 우선 한글교육을 통하여 모든 백성의 지식이 넓어져서 양반과 상민이 타파되고 남녀평등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조선은, 중국 글인 한자를 그나마도 양반만이 배울 수 있는 특권을 누렸으며, 상민에게는 글을 배울 자유가 없었다.

헐버트는 이와 같은 조선사회의 모순을 먼저 깨 부수어야 한다고 하는 의지를 가지고 한자만을 고집하는 사대부를 설득하며 때로는 항거하며 한글사용을 주장한 흔적을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훈민정음’이 창제된 이 후에 한글을 전연 사용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언문/한글 사용을 금지했던 연산군 대를 제외하고는 세조(1417-1469)는 한글을 공용문자로 기반을 잡았으며, 성종(1457-1494)은 신하들에게 한글로 서신을 보냈으며, 한자로 된<삼강실행도>를 번역하는 등 한글 사용에 앞장 섰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 후 조선왕조 대를 이어가며 일부 왕실과 양반계층이 한글서신을 서로 교환했던 것도 유물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특히 이항(1474-1533) 이 쓴 최초의 한글소설 <오륜전전>은 당시 대중에게 널리 읽히고 있었다.

이 같이 꾸준히 한글사용을 해 온 것을 역사 속에서 발견한다. 다만 교육체계가 서 있지 않으므로 해서 백성들에게 한글사용이 일반화 되지 못했던 것이, 한글사용문화를 멈추게 했던 것이었다.

조선후기까지 한글사용을 여전이 꺼려하고 있는 사대부나 양반계층들의 의식에 실망한 헐버트는 교육을 통해서 한글전용을 계몽할 것을 다짐한 것으로 보인다.

헐버트는 이 같은 자신의 교육철학 실현을 위하여 한글보급운동으로 세 가지의 선구적인 업적을 남겼다고 하는 사실을, 김동진 지은이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첫째는 조선 말 글의 우수성을 최초로 국제사회에 소개한 일이다. 둘째는 우리나라 최초의 순 한글교과서를 저술하여 한글전용을 부르짖는 일이다. 셋째는 한글창제 배경을 최초로 학술적으로 고찰하여 한글의 독창성과 세종대왕의 위대성을 밝혀낸 일이다.”

한글의 우수성을 최초로 국제사회에 소개하다.

헐버트는 한글을 과학적으로 고찰하며 한글의 우수성을 간파하고 이를 세계에 알리기 위하여 당시 뉴욕에서 발행부수가 가장 많은 <뉴욕트리뷴>지에 ‘조선어 The Korean Language’라는 글을 올렸다.

한글의 우수성을 소개하며 구문론적 관점에서 영어와 비교분석하며 “조선어에는 각 소리를 고유의 글자로 표기할 수 있는 진정한 소리글자가 존재한다”라고 서두를 잡았다. 이어서 자음과 모음의 결합하는 글자를 그려서 설명하며 한글 자모로 구성되는 우수한 음소문자라고 하는 것을 최초로 세계에 소개했다.

26살 청년의 글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난 언어학적 통찰력으로 한글을 분석 하며 한글의 우수함을 들어, 한자를 병기해 쓰는 일본과 어려운 한자를 쓰는 신생(1912년 탄생) 중화민국에 (1913년)한글을 사용할 것을 제안하였던 사실이 신문기고 내용에 들어있었다고 한다. 한글의 우수성을 평가하는 최고점을 찍은 것이었다.

헐버트의 한글전용교육으로 한민족 자주문화 창달 출발점

언어천재인 헐버트는 조선에 온지 3년 만인 1891년 1월에 우리 역사상 최초 한글교과서인<사민필지>를 저술하였다.

‘사민필지(士民必知)’는 선비와 백성 모두가 알아야 할 지식이라고 하는 의미를 가지며 저작한 천문, 지리, 사회를 망라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서적이다.

천문은, 우주과학을 배우는 학문이다. 지리는, 지도에 보이는 각 지역 국가의 지형, 기후와 풍토 등 자연지리(Physical)만이 아니고 사람들의 생활풍습, 역사 등 인문지리(Human Geography)도 배우게 됨으로써 세상을 보는 눈을 트이게 하며 새로운 세계를 넓게 보는 능력을 배양한다. 사회공부는, 사회, 정치, 경제 등은 물론 인간사회 모든 분야를 망라한 교육이다.

이러한 교과목들이 순 한글로 쓰여졌으니, 한자보다 쉬운 한글로 배운 학생들에게는 학습능률이 월등하게 높았을 뿐만 아니라 한글사용의 다양성도 익혔을 것이다.

이와 같은 ‘사민필지’교과내용을 가늠해 본다면, 그 당시 외부세계를 보지 못하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생각이 갇혀만 있었던 조선인들에게는 파격적인 교육이 아닐 수 없었다. 보다 넓은 세계를 볼 수 있게 하는 개화교육이었던 셈이다.

이와 같은 그의 노력은 한글전용운동의 출발신호가 되었으며, 그간 한자문화에 예속되었던 한민족이 비로서 한민족의 자주문화를 창달하는 출발점이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글의 독창적 탄생의 배경에 대한 헐버트의 논문

한 국가와 민족에 독자적인 문자탄생의 역사적 배경과 기원은, 궁금증을 넘어 자주문화의 뿌리를 볼 수 있어서 중요하다.

헐버트는 한글의 우수성을 발견하면서 한글의 태동에 큰 호기심을 가지고 연구한 끝에 1892년 영문월간지<조선소식 The Korean Repository>1월 호와 3월 호에 2회에 걸쳐 17쪽의 논문 <조선글자 The Korean Alphabet>를 발표하였다. 이 글은 한글창제기원과 문자의 우수성, 창제자 세종대왕의 위대성을 증명한 최초의 학술논문이다. 이 논문의 중요성을 간파한<조선소식>발행인 아펜셀러 는 우리나라 최초로 발간한 월간지 <조선신보>창간호 첫 장에 이 논문을 실었다.

헐버트는, “언어는 자연적 산물이지만 문자는 인공적 산물이라고 하며, 언어는 인류사의 흐름에서 생성되지만 문자는 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논문서두를 잡았다.

다음호에서 이어집니다.

1251호 14면, 2021년 1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