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대구매일신문사 시니어문학상 논픽션 수상작품>
교포신문에서는 2023년 대구매일신문사 시니어문학상 논픽션 부분에 수상한 강정희작가의 ‘삶의 수레바퀴’를 매월 4째주 발행 호에 연재한다.
글의 분량이 많은 관계로 강정희 작가가 독일에 오던 날부터 연재를 하게 됨에 독자분들의 양해를 구하며, 아울러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 -편집자 주
문득 하늘을 바라볼 때가 있다. 문득 고향을 불러볼 때도 있다. 바람이 넘기는 책장처럼 가버린 허망한 세월 따라 창에 비친 얼굴, 엄마를 떠올릴 때도 있다.
과거는 돌아올 줄을 모른다. 눈시울 적신 시절을 넘나든 아픈 세월이 닳도록 지문이 되었다. 지나간 그대로 오늘을 감사하며 뼛속까지 자란 인내의 힘으로 차분히 살피면서 한 생을 나누어지고 닮아가는 우리 부부는 오늘도 마음을 다해 축 이룬 삶의 수레바퀴를 소소히 굴린다.
보드레한 하늘엔 구름 한 점 한가롭다. 싱그런 풀빛이 짙어지는 계절에 살랑살랑 얼굴에 와 닿는 꽃바람이 감미롭다.
1969년 7월 17일, 나는 200여 명의 간호사와 함께 독일 파견간호사로 김포공항을 떠나왔다. 엄마가 부족해서 내가 간호사가 되었고 멀고 먼 서독으로 떠나는 게 다 당신 탓이라며 곱게 접은 꽃 수건을 꼭 쥐여주며 내 손을 잡고 우시는 엄마는 그날따라 아주 작고 늙어 보였다. 난 차오르는 눈물을 꾹꾹 눌러 담으며 전세 비행기에 올랐다. 늦게 사 지그시 입술 깨물며 눌러 담은 눈물이 한없이 쏟아졌다.
포근한 솜덩이 같은 구름 속을 날고 또 날아 20시간 만에 드디어 서독 쾰른•본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는 각 처에서 고용주가 마중 나와 있었다. 같은 병원에 배치된 우리 다섯 사람을 태운 봉고차는 우리가 근무할 병원으로 쌩쌩 달렸다. 고용인이 마치 잘 부릴 수 있는 튼튼한 노예를 사서 자기 집으로 데려가는 것 같다는 이상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3년의 고용계약으로 생소한 이역만리 독일 땅에서 내가 살아가야 하는 이곳은 루르(Ruhr) 지방에 있는 Wetter라는 도시다. 병원은 둘러싼 숲이 있어서 공기가 맑고 조용하다. 송홧가루 날리는 울창한 송림은 가히 일품이고 숲속에서 다람쥐나 노루를 만날 수 있는 풍경은 진정 동화책에 나오는 경이로움이었다.
영어가 유창한 간호과장은 우리에게 병원을 안내했다. 정형외과 전문 병원으로 서독에서 꽤 이름난 병원이란다. 나는 수술실로 배정되었지만, 수술실에서는 환자와의 접촉이 거의 없어 독일어를 배울 수 없다며 손이 부족한 주말에 일반 병동에서 일하라고 했다. 어느 나라를 가든 원칙은 같지만 일을 해나가는 방법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일머리를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간호사 생활은 ‘코리아에서 온 천사’라는 독일 사람들의 경탄과는 달리 허드렛일해야 하는 현실과 고독, 두려움, 문화적 이질감에서 오는 충격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가장 힘들었던 건 의사소통이었다. 지레 겁부터 먹은 난 전화벨이 울리면 가슴이 조마조마했고 어쩌다 수화기를 들면 입은 고드름처럼 얼어붙어 아무 말도 안 나왔다. 직원들이 웃으면 아무런 뜻도 모르고 눈치를 보며 덩달아 따라 웃어야 하는, 마치 꼭두각시 같은 처세였다. 또 어떤 실수가 생기면 모두 발뺌을 하고 병풍처럼 둘러서 있는 직원들 가운데 시선이 일제히 내게 쏠리는 바람에 아주 곤혹스러울 때도 있었다.
가만히 있으니까 나를 완전히 사고뭉치로 몰아세웠다. 정말 어이가 없어 분노할 때도 여러 번 있었지만, 다른 방안이 없었던 나는 억울함을 삼키며 안타깝고 불쌍한 꼴이 되곤 했다. 힘없는 내가 미웠다. 근무 중에 어떤 물품을 가져오라 하면 장님이 문고리 잡듯 지레짐작으로 찾아 가져가기도 했다. 틀린 것을 가져가면 사팔눈을 해 보이면서 혀를 끌끌 찼다. 얼마나 무안했는지 모른다.
소리를 안 지른다고 해서 꾸중이 아닌 것이 아니다. 오히려 화를 안 내고 자기네들끼리 한편이 돼서 눈을 찡긋하며 내 실수를 두고 농담한다는 사실이 서럽고, 알량한 자존심이 상하기만 했다. 정말 도중에 다 집어치우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는 모국어라는 것이 밥과 공기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천천히 깨달으며 악착같이 보란 듯이 독일어를 빨리 배워가겠다는 굳은 결심을 했다.
간호과장은 부르기 힘들다며 검은 머리 우리에게 수산나, 모니카, 베라, 안젤리카, 클라라로 독일 이름을 붙여 주려고 했다. 우리는 당연히 독일 간호사 이름을 배워 익혀 불러야 하는데 단 한 사람 섞인 한국 간호사 이름을 배워 불러줄 의지가 없음에 부아가 치밀었다.
이름은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부모에게서 가장 먼저 부여받는 특권이다. 그 사람을 만들어 가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고 한 인간의 뿌리와 정체성을 알리는 역할을 하는데 어떻게 엿장수 맘대로 바꿀 수 있단 말인가? 서툰 독일어와 영어를 섞어서 언어 실력을 총동원한 나의 거센 항변은 간호과장의 기분을 몹시 상하게 했지만 결국 내 의사를 받아들였다. 사람은 모욕당하면 때로 대담해지는 모양이다.
환자를 간호하는 일이 그리 쉽지 않았다. 눈에 익지 않은 얼굴에 우리들의 체구에 두 배 이상인 환자가 많았고, 정형외과여서 깁스하고 누워있는 환자도 꽤 있었다. 수간호사는 무거운 환자는 절대 혼자 다루지 말라고 했지만, 막상 도움이 필요해서 협조를 청하면 미간을 찌푸리기 일쑤였다. 언젠가 부터는 동료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끙끙거리며 혼자 해냈다.
한국 간호사는 몸집은 작은데 당차고 부지런하고 주사 잘 놓고 친절하고 웃음을 잃지 않는 동양의 백의의 천사로 알려졌다. 함께 일을 하다 보면 시켜야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켜도 하지 않는 사람이 있고,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찾아서 하는 사람이 있는데 한국 간호사들은 솔선수범 일을 찾아서 했다. 빨강 호출 신호가 켜지면 그래야만 한다고 맨 먼저 달려갔고 군소리 없이 다 받아 삼키며 속은 문질러져도 눈물 꽃 살랑대며 고목의 새순 돌보듯 정성을 다하였다.
나와 함께 운명의 배를 탄 한국 간호사들은 남편과 자식을 떼어놓고 경제적인 기반을 잡기 위해 떠나온 나이 드신 분들로 내게 모두 언니 같은 분들이었다. 어린 자식들과의 생이별은 마치 팔 하나를 잃은 기분이라셨다. 언니들은 가족사진을 머리맡에 두고 사셨다. 잠들기 전에 사진 속의 자식들에게 엄마와 꿈속에서 만나자며 입맞춤했고 아침에 일어나면 올망졸망 아침 인사를 하며 하루를 여셨다. 눈을 감아도 눈꺼풀에 매달리는 자식들이 보고 싶어 베갯잇이 젖도록 흐느끼는 하얀 밤도 있었다,
피부의 대화가 없는 외롭고 힘든 독일 생활이었지만 가족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힘이 된다고 가족사진 한 장에 힘을 얻었다. 사랑하는 남편에게 편지를 쓰는 날이나 받는 날엔 눈 화장이 범벅되어서 엉망이었다. 소리 없이 촛농처럼 흐르는 눈물을 보며 나도 따라 울었었다. 언니들은 시내에 나가면 아이들의 옷 가게나 장난감 파는 상점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눈물을 글썽이며 멍하니 서 계셨다.
우리는 근무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오면 으레 한국 음식을 해 먹었다. 고슬고슬한 하얀 쌀밥에 구수한 된장찌개, 달걀 두루마리, 오이무침으로 차려진 저녁상은 모두를 한자리에 모이게 했다. 보글보글한 된장찌개를 둥근 식탁에 놓고 코를 훌쩍이며 먹고 나면 가슴이 뻥 뚫렸다.
그때는 배추가 없어서 뻣뻣한 양배추를 잘게 썰어 마늘이 들어가지 않은 김치는 팥소 없는 붕어빵이나 다름이 없지만, 소금과 엄마가 꼭꼭 싸준 고춧가루로만 김치를 담아 먹었는데 입맛은 길들이기에 달렸다고 숙성 기간을 거치면 제법 감칠맛이 났다. 독일인들은 마늘 냄새를 무척 싫어해서 마늘 냄새를 풍기는 사람을 마치 미개인으로 취급했다.
근무가 끝난 저녁 시간을 이용해서 일주일에 세 번, 독일어 수업을 받았다. 필리핀 간호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근무 후의 시간이라 너무 힘들어서 수업에 빠지는 사람이 많았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고, 언제나 그럴듯한 이유는 다 있었다. 나는 출근부에 도장 찍듯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 번도 수업을 거르지 않았다. 나 역시 피곤한 날은 꾀를 부리고 싶기도 했지만, 우리를 위해 오시는 선생님을 생각하면 벌떡 일어나 피곤함에 젖은 얼굴로 수업받으러 갔다. 그래서인지 내 독일어 실력은 꽤 늘어서 3개월이 되니까 간단한 대화는 할 수 있었다.
차츰 말과 생각이 트이면서 독일 풍경과 문화가 서서히 눈에 들어왔다. 독일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적응과 함께 가족과 고향,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도 커졌다. 부어오르는 그리움을 안고 분칠한 피에로처럼 울다가도 또 웃으며 동료와 함께 수다를 떨거나 귀에 젖은 추억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외로움을 달래기도 하고 한복을 입고 거울 앞에 서서 온갖 자태를 취하며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확인하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아득한 하늘을 보며 나직이 엄마를 부르면 살 것 같았다. 울타리 없는 높고 푸른 하늘은 우리에겐 고향이고 가족이었다. 울어본 사람은 안다. 염원이 깊을수록 그 눈물이 얼마나 쓰리고 외로운지를.
굵직굵직하게 볼펜으로 꾹꾹 눌러서 쓰신 엄마의 편지 내용은 늘 비슷했지만 그래도 손꼽아 기다리다 파랑 봉투를 뜯기도 전에 가슴이 차올랐다. ‘평온한 바다는 결코 훌륭한 뱃사공을 만들 수 없다. 인사만 잘해도 성공이다. 굽혀야 할 땐 굽혀야 한다. 굽히는 것을 못 하면 일평생 넌 못 이긴다. 가는 떡이 커야 오는 떡이 크다.’ 등등 나를 내려 앉히는 잔잔한 감동과 교훈을 전해주는 글귀에 움츠러들기도 하고 혼자서 찔끔찔끔 울기도 했다. 멀리 떨어져 사는 내가 연못가에 두고 온 어린아이처럼 항상 걱정되지만, 엄마는 내가 누구보다도 잘해 나갈 것을 믿는다고 하셨다.
입안의 혀처럼 굴려야 하는 나날이었지만, 봉급날이면 우리는 모두 만족했고 한 달동안 겪었던 수모와 아픔을 한꺼번에 씻어버릴 수 있었다. 그때 나는 일한 만큼, 고생한 만큼 버는 정직한 즐거움을 배웠다. 내 동료는 독일 생활 3년 내내 번번한 옷 한 벌 사서 입지 않고 빠듯한 생활비만 제외하고는 남동생의 학비를 닭 모이 주듯이 꼬박꼬박 보내주었고 부모님이 편안하게 살 수 있는 집도 장만해 드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짙은 향수나 그리움은 차츰 희미하게 퇴색되고 눈물도 말라 갔다.
가끔 우리 숙소에 찾아온 남자 중에 대한민국의 청년 한 사람이 지금의 내 남편이다.
언니들은 교제한다고 꼭 결혼하라는 건 아니지 않냐며 한번 사귀어 보면 어떻겠냐고 했다. 그 후에 그가 겸연쩍게 얼굴을 붉히며 똑같은 얘기로 내게 다가왔다. 올곧고 강한 생활관, 몸에 밴 소박한 삶의 태도, 배려심, 가지런한 하얀 이를 내보이면서 서글서글하게 웃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교제하는 기간에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물론 사람의 됨됨이가 중요하다지만 솔직히 광부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면서 어느 것 하나 번듯하게 내세울 것이라고는 없는 내 주제는 생각지 못하고 상대방의 여건만 따지는 건 아닌가 하면서 고민하는 날이 계속되었다. 한국을 떠나올 때 독일에 가서 가장 조심해야 할 사람이 광부들이라는 교육을 철저히 받았기 때문에 더 부담되었다.
데이트하면 할수록 외로움이 줄고 즐거워지고 다음 만남을 간절히 기다리게 되니 이게 바로 내 가슴에 선연한 석류알 같은 사랑이 움트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난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마음이 가는 대로 심장이 뛰는 대로 사랑하면 결혼하는 거라고 아무 조건 없이 마음 하나로 결단을 내렸다.
엄마에게 나의 뜻을 전했다. 사람은 어떻든 간에 광부와 결혼하겠다고 하니 실망하신 게 분명했지만, 내색하지 않으시고 혼인은 서로에 대한 믿음으로 두 사람이 내 생각을 바꾸고 버리기도 하면서 서로 따뜻한 마음으로 위해주는 것이라며 현명한 우리 딸은 잘 맞추며 살 거라 믿는다고 하셨다. 엄마는 어떤 상황에서도 철석같이 날 믿으셔서 때마다 옷깃을 여미게 했다.
내 남편은 1965년 6월, 독일에 파견되어 낮과 밤을 구별할 수 없고 인간 육체의 한계를 실험하는 1천 미터 비좁은 지하 막장에서 5년 동안 석탄 캐는 일을 했다. 갱도에서는 눈과 입만 하얗고, 깜둥이 아닌 깜둥이로 변하여 누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도 없었고 섭씨 35도를 웃도는 지열 때문에 한 시간도 채 못 돼서 옷이 흠뻑 젖으면 땀을 짜내고 다시 입었다고 한다. 검은 돌에 떨어진 구슬진 땀방울은 반짝거렸고 힘든 날은 더욱더 반짝거려 야속하기만 했단다. 살 떨리는 두려움으로 전쟁과 같은 나날이었지만 뼈가 휘게 참으면서 그날그날이 무사함을 감사했단다.
드디어 1970년 9월에 결혼식을 올렸다. 일생에 한 번 있는 결혼식을 부모, 형제, 친우들의 축하 없이 외롭게 치른 슬픈 날이면서도 기쁜 날이었다. 이제는 일편단심 정숙하고 지혜로운 아내로 올차게 살아갈 것을 다짐했다. 우리가 넘어야 할 장애물이 많았다. 신혼 방도 구해야 했고, 가구와 살림살이도 장만해야 했고 남편 직장도 찾아야 했다. 가장 시급한 것은 남편의 직장을 구하는 일이었는데 마침 기중기를 만드는 큰 공장에 취직되었다. 그때만 해도 외국인에게 셋방 주는 것을 몹시 꺼렸다. 병원에 속한 집들이 많아서 방을 쉽게 얻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때마침 병원 지하실에 부엌이 딸린 방이 비어 있다며 지하실에는 환자들이 죽어서 영안실에 안치되는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지만, 영안실도 있으니 참고하라고 했다.
방은 하나였지만 꽤 컸다. 침실이 없으니, 침대를 들여놓을 수도 없었고 낡은 소파를 사들여서 밤에는 길게 펴고 잠을 잤다. 옷장은 비닐로 된 값싼 것으로 두 개를 장만해서 양복이나 투피스를 구겨지지 않게 걸어 두었고 속옷이나 양말은 여행 가방에 둔 채 지냈다. 화장실은 있었지만, 욕실은 시설이 좋지 않아서 나는 가까운 간호사 숙소에서 샤워하고 남편은 공장에서 샤워했다.
남편이 밤번을 하는 주에는 어두워지기도 전에 방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문단속을 철저히 했다. 나는 남편이 밤번인 기간이 아주 싫었다. 혼자 지내기가 좀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일주일은 빨리 가지도 않았고 또 그 일주일을 겨우 보내고 나면 3주 후 밤번 날짜는 이상하게도 빨리 다가왔다.
독일인이라면 살 집이 아니었지만, 어디면 어떠라? 근무를 마치고 돌아와 쉴 수 있고 기다려 주는 곳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직원들은 우릴 측은지심 여겼지만, 우리들의 해맑은 함박웃음 꽃은 지하를 뚫을 듯 행복의 파고(波高)는 높았다. 우린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걱정하는 대신 “우리 자신에게 어떻게 보일까?” 생각했었다.
그때는 주판알처럼 계산이 잘 되어 한 달 봉급을 받으면 생활비만 제외하고 고스란히 저축하여 갈수록 저금통장이 불어나고 있었기에 우리 속마음은 풍선처럼 부풀어 있었다. 명색이 새색시인 난 무릎 나온 운동복만 입고 살았다. 나는 수술실 당직을 도맡아 했고 남편은 10시간씩 일했다. 하루를 산다는 것은 하루를 참고 견디는 일이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속 깊은 상처를 꿰매 덮으며 독해야 했고 청양고추 몇 배 더 매워야 했다.
(1364호에서 계속됩니다)
1360호 14면, 2024년 4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