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여는 편지

– 김순실

1. 건강한 하루를 위한 감사

또다시 새날이 밝아오는구나. 매번 이렇게 새로운 하루를 맞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낀다. 살아 있다는 것, 그리고 건강하다는 것에 대한 감사일 것이다.

이틀 전에는 위암이 임파선과 췌장까지 번졌다는 성악가 김씨를 병원에서 만났고, 어제는 신장암 말기에 이른 이씨를 또 다른 병원으로 찾아갔었다. 김씨는 “그건 바로 죽는 거”라던 항암주사를 팔에 맞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얼마 전보다 얼굴이 더 생기 있어 보였다. 알고 보니 담배를 끊었다는구나. 내가 끓여 간 호박죽은 옆에 두고 부사 사과를 허겁지겁 먹는 모습을 보니, 사과를 가져가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씨도 호박죽을 참 맛있게 먹더구나. 두 사람 모두에게서 삶에 대한 희망을 볼 수 있어 기뻤다. 그러나 병이란 인간에게 끈질긴 인내와 부자유를 강요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며, 그것이 곧 죽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고 보면 건강을 지키고 가꾸며 산다는 것은 생명을 주신 분에 대한 보답이며, 가족에 대한 가장 기본적이고도 마땅한 삶의 자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나이가 들수록 삶이란 매 순간 내게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더욱 실감하며 산다.

아들아, 생활을 새롭게 다시 계획해 보고 있다는 네 이야기를 들으니 기쁘구나. 생각해 보니 너는 늘 그렇게 삶을 계획하며 살아왔었다.

계획을 세우는 것과 그것을 실천하며 사는 것은 또 다른 문제라고 생각한다. 작은 일에서부터 원대한 목표를 바라보고 그것을 하나씩 이루어 가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 너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해보고 싶다. 너도 나도 거의 포기했던 이야기지만, 우리 삶에서 쉬운 일보다 가장 힘든 일부터 이루어 간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실천해 본다면, 그 자체가 하나의 수련이자 보람이 될 수 있지 않겠니? 이렇게 서두가 길어진 것을 보니 벌써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러면 오늘도 너희 모두에게 좋은 하루가 되기를 빈다.

엄마

2. 새벽에 떠오르는 생각

난 벌써 일어났단다.

며칠 동안은 Y의 직장 문제로 기쁨과 희망에 부풀었고, 교회 일로는 조금 우울했었다. 그런데 오늘 새벽 눈을 뜨는 순간 아주 긍정적이고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다. 덕분에 우울함에서 벗어나 다시 활기를 되찾게 되었단다.

앞으로는 모든 일을 우리 가족에게 주어지는 하나의 기회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현실 속에서 최대한 활용하며 살아가려고 한다.

너희도 알다시피 나는 성격이 단순해서 불의를 보면 곧 사자가 되어 버리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것을 기회로 삼기보다는 맞서기만 하며 살아왔지.

그런데 이제는 오히려 그런 일들을 우리를 발전시키는 계기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하다는 자신감도 생긴다. 모든 일을 부정적으로 보기보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한 걸음씩 헤쳐 나가려고 한다.

새벽에 떠오르는 생각은 때로 계시처럼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앞으로는 우리도 조금씩 사는 방식을 바꾸고, 보다 현실적인 삶의 지혜를 배워 갔으면 좋겠다. 요즘 나는 이상하게도 자신감이 생긴다. 예전처럼 쉽게 처지지 않고 낯선 것 앞에서도 당당해지려 한다.

2007년은 우리 가정이 반드시 축복받는 해가 될 것이다. 그렇게 믿으며 희망을 만들어 가자. 함께 하나님께 기도드리자.

실은 우리는 아주 강한 가족이다. 그리고 앞으로 더욱 강한 가족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그동안은 서로 너무 멀리 떨어져 각자의 길만 걸어왔던 것 같구나.

앞으로는 힘을 모아 모든 것을 함께 이루어 가는 강한 가족이 되는 것을 새해의 목표로 삼아 보자.

또 올해 있었던 불행했던 일들과 잃어버린 것들은 모두 깨끗이 털어버렸으면 한다.

새해에는 다시 시작하자. 특히 아들아, 이미 지나간 일을 후회하지 말자. 없어진 것은 없어진 것으로 내려놓고, 다시 아무것도 없는 자리에서 돌을 하나씩 쌓아 올리는 마음으로 새롭게 도전해 보자.

우리 모두 가장 강한 가족으로 다시 태어나 보자.

아자!

엄마

3. 대화로 시작하는 하루

그러고 보니 너희들에게 아침편지를 쓰기 시작한 지도 벌써 2주가 되어 가는구나.

어제는 모두 좋은 하루를 보냈니?

나는 요즘 정신없이 지내는 것 같다. 시간을 좀 더 계획적으로 아끼며 살아야겠다고 새삼 생각해 본다.

너희들과 이렇게 새벽을 열다 보니, 이것이 단순히 너희들과의 대화일 뿐 아니라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시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는구나.

너희도 한번 시작해 보지 않겠니?

새벽에 일어나 사랑하는 가족들과 하루의 시작을 나눈다는 것은 마음을 참 풍요롭게 해주는 것 같다. 짧은 시간이지만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이 되기도 하고.

비록 몇 마디 안 되는 인사말일지라도, 그 짧은 대화로 하루를 시작한다는 것은 서로의 관계를 새롭게 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좋은 시작이 된다. 그것 또한 하나의 기쁨이란다.

그러면 오늘도 사랑하는 너희 모두에게 좋은 하루가 되기를 빈다.

엄마

P.S. 책은 부치지 말아라. 이사한 뒤 새 주소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내가 가면 그곳에서 보도록 하마.

4. 이제는 소설을 설계하며 쓰고 싶다

얘야, 너 되게 좋아하는구나.

마치 그것으로 해서 드디어 늦깎이로서의 놀이가 비로소 용납이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낄낄거리며 구경만 하고 있으라는 것이 아니지 않겠니? 만일 그 테마가 그럴듯하다고 생각되거든 함께 거들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그 인터뷰를 네가 한번 해보라는 얘기다. 그것만 도와줘도 내겐 큰 도움이 되지.

나도 이제는 지금까지처럼 무턱대고 쓰기만 하는 방법은 그만하려고 한다.

미리 설정을 하고, 구상을 치밀하게 해놓은 뒤 만들어 놓은 틀을 한 칸씩 채워 가는 작법으로 조금은 합리적이고 정리된 소설쓰기를 시작해 보겠다는 얘기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에는 네가 좀 나서주었으면 한다. 솔직히 내게 가장 힘든 것이 바로 그거 아니냐.

인물 설정은 어떻게 할 것인지, 어느 시기부터 이야기를 시작할 것인지, 무엇을 주제로 삼을 것인지….

스토리에만 집착하기보다 장면과 장면을 연결해 가면서 읽는 재미를 만들어 보는 방법 말이다.

좋은 생각이 있거든 보내다오.

아닌 게 아니라 내가 지금껏 써 놓은 소설들도 한 번 더 정리해 보고 싶구나. 아직 한 번도 햇빛을 보지 못하고 있지만….

좋은 생각이 있거든 말해 보아라.

엄마가

5. 거북이의 회한

2007년 10월 26일

어제 밭을 파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이 하나 있었는데 말해 볼까?

옛날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를 생각해 보았다. 그 시대에는 거북이를 최후의 승자로 높이 평가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 내게 떠오른 생각은 조금 다르다.

결국 꾸준히 걸어가 끝내 도착은 했지만, 막상 도달해 보니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더라는 것이다.

이미 쓸모가 없어져 버린 승리.

승리라기보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보아주는 이조차 모두 흩어져 버린 막막함만 남아 있는 것이다.

가장의 유학을 위해 긴 세월 고생하며 기다려 온 내 모습이 그렇고,

한때 글쓰기의 재능이 있다는 말을 들으며 언젠가는 무엇인가를 해보려 링 위에 섰지만, 있다고 믿었던 왕년의 재능도 이미 쓸모없는 것이 되어 버린 내 모습이 그렇다.

무엇보다도 늙어버려 머리도, 생각도 예전 같지 않은 나 자신의 모습이 그렇다.

끝내 학위는 마쳤지만 앞서가는 시대의 대열을 멀찍이 바라보고 서 있어야만 하는 너의 삶이 그렇고,

천신만고 끝에 학위를 마치고도 산산조각 난 채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며 노년을 버티고 있는 아버지의 삶도 그렇다.

그리고 마치 우리 가족 낙오자들의 마지막 등불처럼 떠오르기 시작하는 Y의 ‘느린 걸음’을 바라보며 일희일비해야 하는 현실도 그렇다.

게다가 언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예측할 수 없는, 아직은 형태조차 갖추지 못한 듯한 C의 삶을 보며 시대의 변천을 실감하게 된다.

결국 이것은 우리 가족의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언뜻 이 시대를 비껴가는 듯하지만, 어쩌면 가장 먼 곳에서 새로운 달리기를 시작하고 있는 2세들의 미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또 쓸게.

엄마

아들의 답장

어머님,

아주 멋진 발상입니다.

“도달해 보니 아무도 없더라.”

챠 ….

이미 득도한 한 노승의 인생 달관을 보는 듯합니다.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게 하는 그런 시각이랄까요.

녹번동 시절부터 어머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저는 늘 뭔가 주장해 보려 했지만, 삶의 깊이에서는 결국 말이 서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 삶의 경지를 우리 가족사를 바탕으로 이렇게 표현해 놓으셨군요.

정말 훌륭합니다.

‘느린 걸음’의Y.

‘예측불허’의 C.

정말 절묘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학위와 무관하게 노년을 버티고 있는 아버지.’

어쩌면 그렇게 정확한 규정인지….

글을 읽는 내내 웃었습니다.

별다른 것을 가진 것은 없지만,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만큼은 인색하지 않은 우리 가족의 자화상을 이렇게 편안하게 음미하며 저는 지금 탁구를 치러 갑니다.

또 그런 글을 기대합니다.

아들 드림

6. 늦깎기의 저력

어제 집에 돌아와서도 계속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거실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초저녁부터 방으로 들어가 잠을 잤다.

현장에 가 보니 완전히 국제적인 축제 분위기였다.

메세(Messe) 주변은 사람들로 빈틈이 없었다.

Y는 처음에는 4시간 안에 완주하겠다고 하더니 자신이 없었는지 나중에는 5시간 안에만 들어오겠다고 했다.

2시간 반쯤 지나 케냐 선수들이 아홉 명이나 연달아 결승선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나서는 나도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선수들이 들어오는 길목, 할레(Halle) 입구에서 기다리기 시작했다.

거의 두 시간을 그렇게 서 있었을까.

4시간 18분쯤 되었을 때, 드디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환한 웃음을 지으며 우리 손자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Y야!”

하고 크게 불렀지만 장내 음악과 마이크 소리에 묻혀 듣지 못한 채 그대로 지나가 버렸지.

이번 프랑크푸르트 마라톤은 독일의 베를린, 함부르크와 함께 가장 역사가 깊은 대회라고 하더구나.

Y 같은 아마추어도 많았지만 올림픽에 출전하는 프로 선수들도 함께 뛰는 큰 대회였다.

어쨌든 낙오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했을 뿐 아니라, 끝난 뒤에도 여력이 충분한 모습을 보니 역시 늦깎이의 저력을 보는 것 같더라.

시간이 갈수록 다른 사람들은 지쳐 가는데 Y는 오히려 점점 힘이 나는지 뒤늦게 사람들을 계속 추월(überholen)하기 시작했고, 주변 사람들도 놀라는 눈치였다.

7. 하루가 너무 짧구나

써 놓은 것이 다 없어졌다니, 또 무슨 글을 썼었다는 얘기니?

이씨에게는 성경 구절을 하나 보내 주는 것이 어떨까 싶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아니지만….

루디 이야기는 새로 쓴 건지?

어쨌든 고맙다. 참고가 될 것이다. 점심은 먹었니?

나는 지금 정원에 나가 볼까 한다.

요즘 틈나는 대로 교정도 보고 글도 조금씩 이어 쓰고 있는데 하루해가 너무 짧구나.

뭘 한 것 같지도 않은데 벌써 해가 기울어 버리니….

그래도 꾸준히 해 나갈 생각이다.

무엇보다 중단되지 않도록.

엄마

딸의 답장

엄마,

새벽에 출발하면서 메일을 보냅니다.

오늘은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았어요.

아마도 날씨 때문인 것 같아요.

눈이 어찌나 많이 왔는지….

그래도 오늘은 다행히 햇빛이 나서 산책도 할 수 있었고 Y 집에도 다녀왔어요.

어항을 사고 물고기 세 마리와 새우 두 마리를 사 왔다고 해서 가 보니, 집도 청소하고 가구 위치도 바꾸어 놓고 오랜만에 집안 정리를 했더군요.

물고기는 수컷 한 마리에 암컷 두 마리였고, 새우는 조금 비싸게 산 모양인데 한 마리가 다리를 저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혹시 아픈 새우를 데려온 것이 아니냐고 했더니 할수없이 키울것 같았어요,

아무래도 집안에 살아 있는 생명이 있으니 분위기가 훨씬 활기차지는 것 같아요.

여행 잘 다녀올게요.

모두에게도 안부 전해 주세요.

Y에게 요셉 이야기를 읽어 보라고 하려고 저도 다시 읽어 보았는데, 정말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부분이 많더군요.

그럼 또 연락드릴게요.

엄마를 사랑하는 딸 드림

1472호 14면, 2026년 8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