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독한인회와 포츠담 한인구락부
교포신문사는 3.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를 맞아, “독일 속의 독립운동을 찾아”라는 제목으로 기획기사를 10월 한 달 총 4회 연재한다.
“독일 속의 독립운동을 찾아” 기획기사는 국내 언론은 물론이고, 독일 및 유럽 동포언론을 망라해서도 최초로 시도하는 기획기사로서, 100년전 독일에 거주했던 한인들이 조국 독립을 위한 다양한 활동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도 함께 조망해 본다. -편집자 주
독일은 일제강점기 한인들의 독립운동 활동에 대해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나라다.
현지언론에도 기록이 남지 않았고, 한국에도 관련 자료가 거의 없다.
귀국 후 조선어학회를 주도한 이극로 선생과 ‘압록강을 흐른다’를 쓴 이미륵 선생 등이 독일에서 벌인 활동의 일부 등이 입증된 정도다.
독일에 거주하는 민간인과 유학생들도 1920년대 한때 최대 80여 명 정도에 불과했던 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런 탓에 한인들이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을 벌였는지도 파악하기 어려웠다.
독일에서의 독립운동이 그동안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해온 이유다.
최근에서야 올해 초 개봉한 영화 ‘말모이’의 실제 모델인 이극로 선생이 주목을 받고, 올해 3·1운동 100주년 기념 과정을 통해 조명이 이뤄지면서 조직적인 독립운동이 이뤄진 사실이 입증되기 시작했다.
재독한인회 사무실과 이극로 거주지
관동대진재 때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세계 각국에 널리 알릴 목적으로 1923년 10월 26일 베를린에서 ‘재독한인대회(Große Versammlung der Koreaner in Deutschland)’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서 관동대지진 발생 시 일제의 만행으로 희생을 당한 한인들의 억울한 죽음과 일제의 가혹한 식민통치를 규탄하고 이러한 실상을 담은 선전문을 배포하였다. 이 선전문은 영문과 독문으로 만들어 각국의 주요 정부와 국민들에게 배포하기 위해 특별히 제작된 것이었다.
재독한인대회에서 배포한 영문 「한국에서 일본의 폭정(Japanische Blutherrschaft in Korea)」이라는 선전문에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지도가 크게 그려져 있다. 선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첫 부분은 오랜 역사를 가진 한국의 독립된 역사 전통과 이를 침해한 일제의 침략과 식민통치, 3ㆍ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 사실 등을 적고 있다. 두 번째 부분은 관동대지진으로 나타난 일제에 의한 한인참상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마지막 부분은 한국독립의 열망을 밝히고 독립을 위한 한인들의 투쟁을 각국의 정부와 국민들이 적극 지지해 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이 대회에서 재독 한인들은 일제의 한국지배를 비난하고 독립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재독한인대회에서 배포한 선전문에 서명한 세 명은 이극로(Li Kolu)‧김준연(C. Y. Kim)‧고일청(Jh Tsing Kao)이다. 이때, 배포한 전단지 하단에는 “우편번호:10735, 베를린 W50 슈타인광장 인근 아우그스부르게 슈트라세 23번지 바리쇼프씨 댁 이고루 (K. L. Li, Berlin W 50, Augsburger Str. 23, bei Barischoff)”라고 이극로의 거주지가 기록되어 있다.
이극로의 주소가 적혀있는 것으로 보아 이 전단지는 이극로가 위 주소에서 작성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이극로의 『한국의 독립운동과 일본의 침략정책』(1924)도 이곳에서 저술하였다고 생각된다.
재독한인회 사무실에는 당시 베를린에 거주하던 한인 유학생들이 몇 명 거주하였던 것 같다. 재독한인회에서 총무 역할을 하였던 이극로가 이곳에서 거주하였기 때문에 ‘재독한인회의 사무실’이자 ‘이극로의 거주지’이기도 하다.
현재 아우구스부르게어 슈트라세 23번지는 7층 건물로 리모델링하여 당시의 건물 모습은 남아있지 않다. 이극로가 거주하였던 이 아파트에는 프로이드와 함께 유명한 아동심리학자인 멜라니클라인(Melanie Klein)이 1921년부터 1926년까지 살았다는 플라스틱 표지판이 붙어 있다. 이 시기에 이극로도 같은 아파트에 거주하였음으로 성격이 활달한 그가 유명한 심리학자인 멜라니 클라인과도 일정한 관계를 맺었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포츠담 한인구락부
‘포츠담 한인구락부’는 베를린 외곽의 포츠담시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독립운동 단체이다.
포츠담의 한인구락부는 일본에서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였을 때 일제의 만행을 세계 각국에 널리 알릴 목적으로 1923년 10월 26일 베를린에서 ‘재독한인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주동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포츠담 한인구락부는 한국식당에 모인 한인학생들이 주요한 멤버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포츠담 한인구락부에 대해 일제의 자료에서는 “표면상 이들의 친목기관이라고 칭하고 있지만, 동 구락부는 능히 포츠담에서 운동하고 있다. 대진재 때 제국(帝國)에 대한 재독 한인 활동의 책원지가 포츠담이었다. 이 구락부는 일종의 기밀정사(機密政社)”라고 적고 있다. 또 다른 일제의 정보자료에 의하면 포츠담시에는 “조선인이 경영하는 조선식 요리점이 있어 부근 조선학생들이 토요일, 일요일 등에 그곳에서 회담 하여 거의 조선인학생구락부와 같이 보였다”고 한다.
일제의 또 다른 자료에 따르면 포츠담 한인구락부에서는 1925년 8월 29일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이곳에서 국치기념식을 거행하였는데, 이 행사에는 재독 한인 7명이 참석하였으며, 이극로가 감상을 말하였다고 한다.
박희석 전 본대학 한국학과 교수는 올해 초 독립기념관에 소장된 일본 측 문서를 분석해 독일에서 일본 측이 한인들의 독립운동 활동을 사찰한 사실을 밝혀냈다. 또한 박 교수는 한인들이 독립운동 모의를 했던 장소의 사진 자료도 확보해 한국 언론에 공개한 바 있다.
사진은 1978년에 이 건물이 도로 확장공사로 철거되기 전인 1975년 촬영된 것으로, 촬영 당시 유치원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박 교수가 분석한 주독 일본대사관 등의 문건에 따르면, 일본 측은 베를린 인근 소도시 포츠담에 있는 건물에서 정기적으로 회합을 하는 한인들을 사찰했다.
주독 일본대사가 1925년 2월 9일 일본 외무대신에게 발신한 전문에는 “베를린 근교에 있는 포츠담에 한인들이 모이는 곳이 있었다. 주소는 알테 루이지엔슈트라세 85번지이다. 겉으로는 그냥 함께 만나 노는 ‘조선인구락부’라 하지만, 지난번 관동대지진과 관련해 전단을 만드는 등 실제 어떤 비밀작업을 하는 곳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직 어떤 조처를 하지는 않았다”고 적혀 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이 같은 해 4월 20일 외무성에 보낸 전문에도 “베를린에서 약 20∼30분 정도 기차로 가면 있는 포츠담에 조선인이 경영하는 조선식 식당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토요일, 일요일에 조선인 학생들이 모여서 만나고 있다. 조선인학생구락부다”라고 쓰여 있었다.
포츠담 한인구락부가 있었던 ‘Alte Luisen str’라는 거리명은 독일 통일 이후 ‘Zeppelin stra’로 변경되었다. 현재 그 거리명과 주소가 없어져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기 불가능하다. 거리의 모양으로 보았을 때 ‘여성의 집(Autonomes Frauenzentrum Potsdame.V.)’건물 자리 주변의 공터가 포츠담 한인구락부의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여성의 집’의 현재 주소는 제플린 슈트라세(Zeppelin stra) 189번지이다.
박 교수는 “일본 측 기록을 볼 때 알테 루이지엔슈트라세 85번지에서 관동대지진 관련 집회에 대한 모의가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면서 “전문을 통해 유학생들이 조직적으로 독립을 위한 활동을 벌여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독일에서는 유덕고려학우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벌어졌을 것으로 추정됐지만, 베를린 집회를 제외하고 조직적으로 움직인 정황은 밝혀지지 않아 왔다.
일본 측은 한인 유학생들의 움직임을 사찰해왔지만, 전문에 “아직 어떤 조처를 하지는 않았다”고 적힌 것을 고려할 때 직접적인 탄압을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박 교수는 “한인 유학생들이 대부분 중국 국적을 가진 뒤 독일로 넘어와 일본이 직접 조처를 할 경우 국제적인 문제가 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박 교수는 또 “1차 세계대전 직후 연합국의 일원인 일본이 패전국 독일이 점령하던 중국 산둥반도 일대를 빼앗았기 때문에 일본에 대한 독일의 감정이 좋지 않았다”면서 “일본이 독일 측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독일신문에 실린 광주학생독립운동>
일제 강점기 광주학생독립운동을 독일 현지에 소개한 신문 기사가 전남대 김재기 교수에 의해 2013년 발굴되었다. 화제의 신문은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현지 최대 언론사 가운데 하나였던 포시쉐 자이퉁(Vossische Zeitung). 이 신문은 1704년에 창간해 200여년동안 독일을 대표하던 언론사로 일제 강점기 경성에 주재했던 리차드 카츠(Richard Kats)기자가 1930년 2월 23일자로 쓴 광주학생독립운동 기사를 5면에 A4 4장 분량으로 실었다.
“천황폐하 만세(Bansai) 대신 대한독립 만세(Mansai)를 외치다 투옥된 수천명의 조선학생에게”로 시작되는 이 기사는 독일인의 시각에서 조선학생들의 만세운동 배경과 일본의 조선에 대한 강압적 통치에 대해 상세하게 보도했다.
기자는 1929년 11월 광주(Koshu)에서 시작된 학생들의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돼 수 주일째 계속되고 있고 수 천명의 학생들이 체포됐으며 그들 대부분이 중학교 학생들이라고 소개했다.
또 학생들의 만세독립운동 배경으로 일본이 황민화 교육을 위해 조선에 학교를 설립하고 교육하는 과정에서 조선인 학생들이 일본인들과의 차별을 느꼈고 결과적으로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고 분석했다.
3·1운동 이후 군사력을 동원한 억압적인 일본의 통치 방법도 한 원인으로 지목했으며 일본을 ‘동양의 프로이센’으로 비유하며 프랑스 영토 알사스(Elsaß)를 강압적으로 통합하고 억압했던 점과 비교하기도 했다.
1934년 독일 나치체제가 들어서면서 이 신문이 폐간되는 바람에 기사의 존재 여부도 확인하기 어려웠지만 김재기 교수가 한스 자이델 재단의 학술회의에 참가하면서 소장처를 찾아내었다.
김 교수는 “이 기사는 독일과 유럽에 조선 학생들의 만세독립운동을 알렸다는 점과 독일인의 시각에서 조선과 일본에 대한 인식, 학생 독립운동이 촉발된 배경에 대한 평가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설명했다.
2019년 10월 18월, 1143호 20-2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