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 30년 (7)
빌리 브란트의 동방 정책: 화해를 통한 변화

1955년 서독의 수상 콘라트 아데나워는 소련을 제외한, 동독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국가들과 어떠한 외교관계도 갖지 않겠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할슈타인 원칙을 선언한다.

서독만이 독일 내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주장에서 나온 이러한 외교 원칙은 서독의 지위를 강화함과 동시에 동독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지만, 시간이 흘러가면서 각종 문제점이 등장했고 특히나 이 원칙으로 인해 서독 자신들의 행동이 제약을 받는 경우마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에 여당인 기민당(CDU)을 비판하면서 동구권 국가들과의 새로운 관계정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독일 사민당(SPD) 안에서 높아지기 시작했다. 특히나 서베를린의 시장으로 재직하면서 베를린 장벽이 건립되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보아야만 했던 사민당 총재 빌리 브란트는 할슈타인 원칙은 두 개의 독일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뿐이며, 동독 공산당의 입지만 강화시켜줄 뿐이라면서 적극적인 외교노선 개선을 요구하였다.

기민련과 사민당이 손잡은 쿠르트 키징어 내각에서 외무장관으로 재직하면서 이미 동방 정책의 실시를 강하게 주장한 빌리 브란트가 1969년 수상으로 취임함에 따라 동방 정책은 본격적으로 실행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의 시작할 때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독일은 서방 국가 통제 하의 독일 연방 공화국과 소련 통제 하의 독일 민주 공화국으로 분단되었다. 두 가지의 완전히 다른 정치적 시스템이 있었다. 장벽과 동독 측의 발포 명령은 사람들을 분리시켰다. 이는 공포 정치를 이용해 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핵보유 점령국들의 의도가 내재되어 있었다.

이 상태는 몇 년 동안 변하지 않았으며, 서독이 전체 독일을 단독적으로 대표하는 상태로 견고히 되었다. 그러나 서독은 동독이 점점 더 많은 국가들로부터 외교적으로 인정받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첫 대상은 할슈타인 원칙 시절에도 이미 수교국으로 인정하고 있던 소련이었다.

브란트 정부는 전략적으로 소련, 폴란드, 체코, 동독 등 네 가닥의 외교목표를 동시에 공략했다. 관건은 소련과의 관계개선이었다. 수많은 상호방문과 협상 끝에 드디어 1970년 8월 12일 브란트와 브레즈네프는 독·소 조약에 서명했다.

동방정책의 가시적 성과는 소련에서 서독까지 파이프라인을 통해 천연가스를 수입하는 경제협정이었다. 소련은 20년간 520억 ㎥의 천연가스를 독일에 공급하고, 그 대가로 연간 25억 마르크를 챙겼다. 일종의 윈윈 모델이었다.

보수세력은 ‘독일이 소련에 종속될 수 있다’며 공세를 펼쳤다. 하지만 73년 제1차 오일 쇼크 이후 이런 목소리는 잠잠해졌다.

이후 폴란드와의 바르샤바 조약을 통해 서독은 건국 이후 처음으로 2차 대전 이후 국경, 즉 오데르-나이세 선(Oder-Neisse-Grenze)을 인정하고, 동프로이센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철회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동독을 국가로 인정하는 동서독간의 기본 조약이 수립된다.

야당(기민당)은 브란트의 동독 지원에 대해 “일방적 지원은 동독 정권을 공고히 하는 동시에 서독 전복 활동을 방조하는 것”이라며 맹공을 펼쳤다. 급기야 1972년 4월 총리 불신임 투표가 실시됐다. 불신임은 2표 차로 부결됐다. 하지만 연립여당인 사회민주당과 자유민주당 일부 의원들이 동방정책에 반기를 들어 예산안 통과가 불가능한 상황에 처했다.

브란트는 국민들에게 기댔다. 의회 해산과 재신임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빌리를 뽑자”는 외침이 번져갔다. 평화를 향한 브란트의 진정성에 민심이 움직였다.

접근을 통한 변화

브란트는 1969년부터 이 상황을 타파하고 이해와 화해 정책으로 대립에 맞섰다. 이 화해정책에는 동독뿐만 아니라 소련과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도 포함되었다. “화해를 통한 변화”의 노력은 실제적인 완화를 통해 시스템의 경계를 넘어 사람들의 접근을 더 용이하게 하고 평화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동방 정책의 가장 민감한 측면 중 하나는 동독의 국제법이 아닌 국법상의 인정이었다. “독일의 두 국가”라는 개념은 본(Bonn)의 공식적인 해석이었다. 이것은 동독이 국가로는 인식되었지만 서독은 동독을 외국으로 간주하지 않았고 두 나라가 하나의 국가를 형성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서독은 전체 독일을 대변할 수 있는 대표권을 포기하게 되었다.

1971년 냉전을 해소한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후 브란트는 “사람들에게 특정 체제를 강요하는 것은 인간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인간의 변화 가능성을 믿고 있다”고 말했다. 동방정책과 ‘접근을 통한 변화’라는 그의 아젠다가 인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결과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이다.

바르샤바의 무릎 꿇기

대외적으로 브란트는 1970년에 긴장완화 및 화해정책을 모스크바 조약과 바르샤바 조약에 추가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폭력을 자제하고, 영토 주장을 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오데르-나이세 선(Oder-Neisse-Grenze)을 폴란드의 서쪽 국경으로 인정하는 것을 상호 보장했다.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의 폴란드와 소련 침략에 대한 기억은 여전히 생생했다. 브란트가 폴란드 바르샤바에 있는 게토 희생자 기념관을 방문했을 때 속죄의 자세로 무릎을 꿇은 것은 세계적으로 긍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그 누구도 더 이상 독일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동방 정책의 메시지였다.

브란트의 진심 어린 과거사 사죄는 ‘나치 악몽’을 털고 독일을 세계무대에 복권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무릎을 꿇어야 할 사람들을 위해 무릎을 꿇지 않아도 될 사람이 독일 국민을 위해 무릎을 꿇었다”고 독일 언론들은 보도했다.

기민당 (CDU)와 기사당(CSU)의 많은 보수 정치인들은 동방 정책이 독일 국익을 팔아넘기는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결국에는 이 보수연합 또한 이 정책을 받아들였다. 대략 20년이 지난 후, 브란트의 동방 정책이 달성한 국제적 신뢰는 독일 통일에 대한 맹국들의 승인을 위한 기초를 형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2020년 7월 17일, 1179호 3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