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이해하자(33)
독일의 정당(4) – SPD ②

독일은 ‘정당국가’라고 칭해질 정도로 정당의 법적·정치적 위상이 높은 국가이다. 이러한 정당의 높은 위상은 독일 민주주의와 나치즘의 역사, 그리고 선거와 국가체제 등 제도적 틀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낳은 결과이다. 세계에서 정당정치의 모범으로 칭송받는 독일정당에 대해 알아보도록 한다.

먼저 독일 기본법상의 정당과 정당의 역사를 살펴보았고, 연방의회에 진출한 각 정당을 창당 순서로 살펴본다.

사회민주당(sozialdemokratische Partei in Deutschland, SPD) ②

바이마르 공화국 (1918-1933)

1918년 11월 혁명의 결과로 사민당의 전통적인 요구사항들인 여성의 선거권, 비례대표제, 사회·정치의 개혁, 1일 8시간 노동제 그리고 민주공화제가 수용되었다. 사민당은 바이마르 공화국 출범과 더불어 공화제를 지지하는 다른 정당과 같이 정권을 유지하면서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의 운영 방식을 확립하였다.

그러나 지도층은 점점 비대화-관료화된 당 조직의 파괴를 우려하고 신선한 추진력을 가져올 대담한 행동을 주저하여 사민당의 행동에는 조직의 현상 유지를 자기 목적으로 한 소극성과 정치적 근시안이 지배하였다. 이것은 선전 기술의 경직화 속에도 나타나 자기의 전통적 기반을 유지할 뿐으로 청년 노동자, 실업자, 중간층 등의 표가 나치나 공산당에게로 대량 흡수되어 가는 것을 방지하지 못하였다. 다만 오랜 전통을 가진 강력한 당 조직과 노동조합과의 친밀한 관계로 인해서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에 반체제 정당의 출현에 직면하여서도 그 기반까지 침식되지는 않았다.

나치 독재정권 시절 (1933-1945)

1933년 3월 23일 제국의회에서 사민당은 나치에 의해 구속 및 탄압을 받는 중에서도 히틀러의 수권법에 반대하였고 당수 오토 벨스는 의회 내 공포분위기 속에서도 유일하게 반대 연설을 하였다. 하지만 6월 22일에 사민당은 모든 활동이 전면적으로 금지되어 조직을 분쇄당하고 당원들은 추적·감금을 당했다.

이에 저항하는 지도부들은 5월부터 해외에서 반나치운동을 전개하고, 독일 내에서의 지하항거운동을 돕기 위하여 망명길을 떠났다. 이들 망명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중요거점을 초창기에는 프라하에, 1938년부터는 파리에, 그리고 2차대전중에는 런던에 본부를 두고 활동하였다..

고데스베르크 강령 전후 국민정당으로의 도약 (1945~1969)

2차 대전 직후,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국회의원이었던 쿠르트 슈마허는 하노버에 본부를 둔 사민당을 재창당하였다. 한편 오토 그로테볼은 베를린에서 사민당 중앙위원회를 재건하고, 공산당과의 합당을 주장하였다. 반공주의적 성향을 지니고 있던 슈마허는 이에 반발하여 당 대회를 개최, 중앙위원회의 활동 범위를 소련 점령지역에 한정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결국 동독지역내의 사민당은 공산당과 합당하여 독일 통일사회당을 창당하고 그에 반대한 당원들을 숙청하게 된다. 한편 슈마허가 중심이 된 사민당은 서독 전 지역에서 큰 지지를 얻었으나, 49년 총선에서 29%의 득표율로 야당이 된다.

계속되는 총선에서의 패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민당은 50년대 후반 이후 노동계급의 정당에서 좌파적 국민정당으로의 변모를 꾀하였다. 1959년 바드 고데스베르크(Bad Godesberg)에서 열린 비상전당대회에서는 마르크스 사상을 내포하였던 하이델베르크 강령을 폐기하고 ‘법치국가’, ‘사회적 시장경제’, ‘인간의 자유로운’발전을 주 내용으로 하는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천명한다. 이후 사민당은 기존 아데나워의 시장경제체제, 서구에의 편입정책을 찬성하는 쪽으로 노선을 변경하였다.

1963년 당수로 선출된 빌리 브란트는 진보적인 정책들을 펼쳐나가며 당의 지지율을 끌어올렸고, 이를 바탕으로 1966년 총선에서 사민당은 오랜 야당생활에서 벗어나 기민/기사당과 대연정을 구성, 9개의 장관직을 맡으며 정권에 참여하였다. 대연정 시기에는 사민당이 주도한 경제정책 등이 성공을 거두었고, 이를 바탕으로 1969년 총선에서 42.7%의 득표율을 획득한 사민당은 독일 자유민주당(FDP)과 연정을 통해 정권을 구성하게 되었다.

브란트슈미트 정부(1969~1982)

1969년부터 1982년까지의 13년의 집권 기간 동안 사민당은 공산주의를 추구하는 극좌파 무장단체인 적군파에 의한 70년의 위기상황 극복, 사회보장제도 확장, 장기간에 걸친 국제경제의 침체 속에서의 경제안정 유지, 2차 대전 이후 악화된 동구권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동방정책, 72년 동독과 체결한 동서독 기본조약 등 수많은 성공을 이루어 내었다.

1974년에는 귄터 기욤의 스파이 사건으로 브란트 총리가 사임하고, 주요 장관직을 역임한 헬무트 슈미트가 총리직을 이어받게 된다. 오랜 기간 유지된 정권은 70년대 말부터 지지율이 하락하기 시작하였고, 80년 연방의회선거 이후에는 당내 갈등이 심화되었다. 결국 82년, 사민당과 경제 정책 부분 등에서 갈등을 겪고 있던 자유민주당이 그들의 연정파트너를 기민/기사당으로 바꾸면서 13년간의 사민당 집권시기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슈뢰더정부와 제3의 길(1998~2005)

슈뢰더 총리의 독일 사민당 개혁 우파는 신중도 노선을 표명하는데, 이는 영국 노동당이 추구하는 제 3의 길과 매우 유사했다. 이는 신자유주의와 케인즈주의를 모두 거부하는, 중도 급진개혁을 추진해서 심각한 사회 경제를 없애는 것을 목표로 한다. 기존 연정을 계속 실패했던 사민당이 기존 전통주의자들이 추구한 케인즈적 총괄조정을 포기하겠다는 건데, 이는 전통주의자들의 반발을 사서 내부적인 갈등을 초래했다.

총리인 슈뢰더는 과거 라퐁텐을 중심으로 한 전통주의자들과 대응해서, 좌우 이데올로기의 종말과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는 당의 현대성을 강조했다. 슈뢰더는 2005년까지 집권하고 이 기간에 사민당은 녹색당과 연정을 했다. 슈뢰더는 이 기간 아젠더 2010 이라는 다소 논란이 있는 노동시장 개혁을 시도했다. 2005년에 있었던 조기선거에서 CDU와 연립정부를 구성했다.


교포신문사는 독자들의 독일이해를 돕기 위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황경, 교육등에 관해 ‘독일을 이해하자’라는 연재란을 신설하였습니다. 독자들의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편집자주

1206호 29면, 2021년 2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