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자 박사 (Dr. Beckers-Kim Young-ja)
– 재독한인사회 건립 100주년을 맞아 –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독일에 도착하기 1960년대 중반보다 40여년이 앞선 1920년 포츠담에서 ‘한인구락부’의 이름으로 한인단체가 결성되었고, 이듬해인 1921년 1월에는 베를린에서 유덕고려학우회(留德高麗學友會)가 결성되었다.
이렇듯 독일의 한인사회 건설은 포츠담을 기준으로는 지난해, 유덕고려학우회(留德高麗學友會)를 기준으로 하면 올해가 100년 역사를 맞게 된 것이다.
교포신문사는 독일 한인사회 건립 100주년을 맞아 일제 강점기 시대 독일에서의 한인사회와 한인들의 활동을 심층적으로 조사한 김(Beckers)영자 박사님의 논문을 연재한다.
이 글은 지난해 유럽한인총연합회(회장 유제헌)가 발간한 “유럽한인 100년사”에도 게재되었다.- 편집실
포츠담 (Potsdam) 시내에 있었던 한인식당의 역할
한인사회의 유일한 한국인들의 집합장소로 포츠담에 위치했던 한인 식당을 들 수 있는데, 이곳은 인근 베를린을 위주로 한인들이 주로 주말에 모여 정보를 제공하고 항일 활동을 펼쳤던 곳이다. 이 식당의 원 주소가 사라졌다가 2018년 재독 한국학 박희석 교수가 찾아냈는데 원주소는 알테 루이젠스트라쎄 (Alte Luisenstrasse)로 구동독 시절 1976년 체플린스트라쎄 (Zepplinstrasse) 로 거리 이름이 바뀌었다. 도로 확장 공사로 건물과 한인식당은 자취 없이 사라졌지만 이제 대략의 위치는 알게 된 셈이다. 베를린에서 20-30분 정도 서남쪽으로 떨어진 곳에 위치한 포츠담의 한인식당은 초창기의 한인 집회장소였고 1923년 10월 26일 일본 관동 지진 후 재일한인학살 잔행에 항의 하는 ‘재독한인대회’를 개최 하기도 하였다.
활동상: 가장 큰 행사는 1923년 10월 26일에 개최된 ‘재독한인 대회 (Great Meeting of Koreans in Germany)’로 독일 내 한인회의 가장 대표적인 항일운동이었다. 1923년 8월 일본에서 ‘대지진 사건이 일어난 당시 우연히 일본에 체류중 (1923년 9월 1일-8일) 이던 주 베를린에서 동양미술상인으로 활동하는 오토 부르카르트 (Otto Burkhardt) 박사가 중국으로 학술 여행을 갔다가 일을 마치고 일본으로 가는 ‘Emfress of Australia’ 선박 안에서 일본을 요동치는 큰 지진이 일어나는 것을 체험했다.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해서 경험해야 했던 재일본조선인 학살장면은 그에게는 충격 이상이었다. 부르크하르트 박사는 귀국 후 주 베를린의 포씨셰신문 (Vossische Zeitung) 에 ‘일본인에 의한 한인학살 대서를 1923년 10월 9일자 호외기사로 대서특필하면서 이 사실을 자세히 알렸다. 유덕고려학우회와 포츠담 한인 구락부 측에서 즉시 부르크하르트 박사와 면담을 추진하였다. 한국인 측 면담자로 유학생 고일청, 황진남을 선정해서 부르카르트 박사를 만났고, 이극로를 중심으로 그 후 즉시 일본의 만행을 전세계에 알리는 “한인학살”, “동포에게 고함” 이라는 두 종류의 전단지를 작성해서 관련된 세계 각 기관에 발부했다. 배포한 이 기사들은 국내 신한민보 1923년 11월 15일자로 크게 실렸다. 독일어로 작성한 “한국에서의 일본폭정 (독일어기사:Japanische Blutherrschaft in Korea)”을 영문 (Japans Bloody Rule in Korea) 으로도 제작하여 세계 중요기관에 배부한 것도 큰 활약 중 하나이다. 곧장 이 전단기사는 서울 신한민보에 1923년 11월 15일자로 “독일인이 일본 지진 시 한인학살장면을 목도하고”라는 제목으로 크게 알려졌다. “왜병이 동포 15,000명을 요코하마 군영에 가두어 학살하다”라는 내용이었다.
포츠담구락부는 특별한 행사로 매년 8월 29일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국치기념일 행사가 있었다. 포츠담 주변의 한인들이 모여 해외 항일운동과 한인 상호간의 교류의 장소이기도 하였다. 한인들의 포츠담 구락부도 그 인근에 있었으리라 본다.
한인회보: 회보 (Haebo) 는 유덕고려학우회의 회지로 재독한인의 동향과 국내외의 소식을 자세하게 알렸다. 1925년 10월 당시 제 4호를 참조하면 이 회보는 1924년 전부터 출판된 듯 하다.
일제의 잔악성과 독립운동을 지향한 한인사회의 책자 제작 및 전단지 인쇄는 베를린 대학교에서 공부를 하면서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이극로가 담당했다. 이극로가 책자를 작성한 다른 두 명과 본인의 서명을 하고, 저자가 살고 있는 주소를 자신의 주소로 명시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의 숙소는 동시에 한인 사무실로 사용된 듯 하다. 베를린시에서 숙소를 얻기에는 경제적 어려움이 커서 인근 시외에서 살았고 이 건물은 다행히 현존한다. 원래 3층 건물이었는데 현재 7층 건물로 확장되었다. 이 건물에서는 그 당시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 지그문드 프로이드(Siegmund Freud)도 체류했다는 석물표적이 건물 근처에 있다.
1.4. 독일대학교에서 해방전에 박사학위를 받은 한인
주 한국대사관은 독일에서 학위를 받은 한국유학생을 초창기 1923년부터 1989년까지 조사했다 (독일대학 한국인 박사학위 논문목록 1 (1923-1989) Liste der promovierten Koreaner in Deutschland, 주독 한국대사관 교육관실, 2000). 이 조사의 결과에 따르면 초창기인 해방 전 1944년까지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한인은 총 13명, 그 중 의학 박사가 6명, 철학 박사 3명, 물리학 박사 1명, 언론학 박사(Publizistik)가 1명이고 뮌헨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은 이의경은 동물학 전공이나 의학부 소속으로 알려져 있고 그들이 박사 학위를 받은 대학은 베를린 (Berlin), 예나 (Jena), 라이프찍히 (Leipzig), 뮌헨 (Muenchen), 프라이부르그 (Freiburg), 마부르크 (Marburg) 대학이다. 독일 최초 한인 박사는 1923년 라이프찍히 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김중세라고 알려졌으나 사실은 1926년이다. 그를 뒤이어 베를린 대학에서 1927년 이극로가, 뮌헨대학교 이의경, 김재원 등이 각각 박사 학위를 받았다. 또한 서양화가인 배운성은 1927년 베를린 종합예술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독일 100년사를 작업하면서 찾아낸 해방전 1945년까지 독일에서 박사학위 및 졸업을 한 유학생은 그보다 훨씬 많다 (독일 대학교에서 해방전 학위 받은 한인 도표 참조). 아래의 표에는 학위를 받은 자들과 몇년 간 독일 대학교에서 수학하고 귀국한 유학생들을 가능한 한 모아보았다. 그 외에도 베를린 공과대학에서 항공학을 전공하고 항공엔지니어로써 나치항공대원들과 ‘독일하늘’을 날랐던 한인도 있었다.
(다음호에서 이어집니다.)
1223호 20면, 2021년 6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