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통일 30년 (47)
동서독 정당통합(10)

통일 후 동서독 정당지형 ②

민사당의 형성과 발전 2

지난호에 이어 민사당의 변화에 대해 좀더 살펴보도록 한다.

통일 이슈가 지배한 1990년 선거에서 민사당은 자신들의 정치적 아성으로 여겨온 구 동독지역에서조차도 기민련(CDU, 41.8%)과 사민당(24.3%)은 물론 군소정당 자민당(FDP, 12.9%)에도 뒤진 11.1%의 득표율에 머물렀는데 당시 구 서독지역에서의 득표율은 0.3%에 그쳤다.

한편 4년이 지나 민사당은 1994년 통일 초창기의 흥분이 가라앉은 총선에서 구 서독지역 1.0% 그리고 구 동독지역 19.8% 등 양 지역에서 모두 득표율의 급격한 상승을 가져오게 되어 연방 전체로는 4.4%의 득표율을 보였다. 이러한 상승세는 4년 후인 1998년 총선에서도 지속되었는데, 민사당은 구 서독지역에서 1.2%를, 그리고 구 동독지역에서는 21.6%를 나타내 연방전체로는 총 5.1% 득표에 이르렀다.

이렇듯 통일 직후인 1990년 선거와 큰 차이를 보이는 1994년과 1998년 선거결과에 대해 통일 후 동서독지역의 격차 문제와 통일 당시 약속된 사항들이 지체되는 것에 대한 구 동독지역민들의 실망감과 연계된 투표성향에 기인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한편 민사당은 1993년 1월 29일부터 31일까지 제3차 전당대회 제1차 회의에서 제정한 당의 강령을 통해 현사회의 문제로 경제적, 사회적 몰락과 동독의 정치적 소외, 민주주의 해체 그리고 제국주의적 경향을 거론하면서 구 동독지역을 대변할 것임을 공식화하게 된다. 그 배경에는 통일 당시의 약속과 달리 지체되는 사회경제적 통합 과정이 구 동독주민 입장에서 볼 때 가장 큰 현안으로 등장했기 때문으로, 강령에 의하면 동독의 산업과 농업, 과학과 문화가 파괴되었고 동독 사람들의 기본권은 제한되었다는 피해의식에서 비롯되고 있다.

즉, 구 동독지역의 실업률은 구 서독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났고 1994년 말까지 종지부를 찍기로 약속한 임금동일화 과정이 계속 연기되는 등 통일 당시 희망에 부풀었던 구 동독민의 기대는 무참히 깨져 버렸다는 것이다. 결국, 이는 구서독의 정치엘리트에 의해 주도되던 통일독일 현실 정치에 대한 반감이 그대로 표출된 바 그 결과는 구동독 주민의 이해를 대변할 것을 선언한 민사당으로의 자연스러운 정치적 응집 현상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2002년 선거에서 잠시 주춤했으나 2005년과 2009년 괄목 할만한 발전을 보이고 있는 민사당의 지지율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민사당은 2005년 구 서독지역에서는 4.9%를 그리고 구 동독지역에서는 25.3%를 얻어 연방전체에서는 8.7%를 차지하였고, 이어 2009년에는 구 서독지역 8.3%, 구 동독지역 28.%의 득표를 통해 연방전체에서 11.9%를 득표하는 기염을 토 했다.

한편 민사당과 좌파당의 약진에 대해 구동독 정체성의 관점 외에 정당의 정체성과 직결된 사회경제적 요인으로 살펴볼 필요가 제기된다. 왜냐하면 좌파당의 탄생 배경은 전통적으로 노동세력을 비롯한 진보적 색채의 사민당과 녹색당의 틈새시장 즉 신자유주의적 경제세계화 흐름에 대항하는 진영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기존 제도권의 ‘좌파’ 세력인 사민당의 신자유주 의적 경제 세계화에 대한 ‘순응적’이고 ‘현실 가능한’ 영역 내에서의 실용주의적 선택이나 녹색당의 선명한 대응전략 부재와 대비하여 좌파당의 경우 달랐기에 좌파 정치세력의 분립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민사당은 라퐁텐(Lafontaine)을 중심으로 사회복지단체 및 노동조합들과의 연대를 통해 독일의 미래, 특히 소위 ‘독일병’ 해소와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대응전략의 일방적 추진에 제동을 거는 것을 주요 정책목표로 내세우던 좌파당(Die Linke)과 2003년 10월 26일 제 8회 전당대회의 제 2회의 결의로 공동강령 제정을 통해 보조를 함께 했다. 이러한 협력을 기반으로 결국 민사당은 좌파당(Die Linke)과 2005년 연방하원 선거에서 유력한 정치세력으로 응집되었다. 2005년의 연방선거에서 이 둘의 연합은 8.7%를 획득해 53명의 의원을 당선시키며 원내 제4당의 자리에 올랐다. 마침내 2007년 6월 16일, 베를린에서 좌파당 창당대회가 성공적으로 열렸다.

좌파당이 지향하는 방향은 종래 사민당의 실용주의 노선이 견지해온 신 자유주의적 정책에 반대하고, 시장경제 우위의 맹목적인 세계화에 저항하면서 성장과 아울러 분배를, 그리고 시장개방과 규제완화보다는 기존 사회안전망의 온전한 복구와 적극적인 국가와 사회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좌파당은 2005년 총선에 이어 2009년 총선에서 녹색당을 추월하는 기염을 토했고, 11.9%의 득표율로 2005년에 비해 의석수도 22석이나 증가하였다.

좌파당의 세력 확장은 구 동독지역에 국한되지 않았는데, 2009년 총선에서 좌파당은 구 서독지역에서도 상당한 득표율을 보이는 등 전국적으로 고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브레멘의 5.8%나 니더작센의 4.3% 성장은 구 동독지역의 증가율과 유사하거나 오히려 높은 경향성을 보여주었다. 아울러 독일 현대 정치에서 전통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을 보여온 바덴-뷔르템베르크와 바이에른주에서도 각각 7.2%와 6.5%를 획득하 여 독일 정치에서 심리적 한계선으로 여겨져 온 5%의 벽을 넘었다. 해당지역 들에서 2005년 총선에 비해 각각 3.4%와 3%를 더 획득함에 따라 좌파당은 명실상부한 전국 정당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고 평가할 만하다.

이렇듯 통일 초기 약화된 세력을 만회하면서 점차 세력을 확장시켜간 기저에는 당에 우호적인 환경변화와 더불어 이를 정확하게 포착한 정당 스스로의 자구책 촉진을 통한 득표율 확보의 계기를 마련했던 것이 주효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대외환경 변화 측면에서, 1991년에서 1992년 사이에 동독에 서뿐만 아니라 독일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역전되기 시작하였는데 반전의 계 기를 제공한 것은 정부의 통일정책에 대한 회의적 시각의 급속한 확산이었 다. 특히 1992년 초부터 동독에서의 경제건설이 예상과는 달리 지연되고 있음이 분명해 졌으며, 그밖에도 동서독 양 지역에서 통일에 따른 사회 및 문화적 갈등과 환멸이 나타났고 이러한 상황은 민사당에게 유리한 환경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1223호 31면, 2021년 6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