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속 한국가정에서 겪는 대표적 어려움은 자녀교육, 특히 성장기의 아이들의 언어문제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교포신문사에서는 이를 위해 윤재원 박사의 논문 “ 다중 언어 시스템 속 우리의 아이들”을 매월 첫째 주에 연재한다. 전문적인 논문을 일반인들이 이해 할 수 있게 새로이 쉽게 풀어 연재를 해주시는 윤재원 박사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편집자
<기고자 소개>
• 현 독일 루르 보훔대학교 한국학 강사, 쾰른대학교 영어교육학과 사회 언어학 및
어린이 다중언어 발달 교육 강사
• 기업 이문화 컨설턴트 (Interkuturelle Beratung, Cross-cultural consultant)
• 독일 쾰른대학교, 다중언어 어린이 한국어 습득에 관한 연구로 언어학 박사
• 미국 메릴랜드주립대 (UMBC) 언어문화교육 석사
• 현 11학년과 10학년 자녀의 엄마
부모의 언어 정책 1
아이를 가지기 전부터 태어나기 까지
“부모의 언어정책”이란 말은 많은 사람들에게 생경하게 들릴 것이다. 나라의 언어정책, 언어 관련 교육정책 등은 들어 봤어도 아이를 키우는 부모에게 무슨 언어 정책이 필요하단 말인가. 이 말에 대한 생소함을 줄이기 위해 잠시 우리나라의 언어 정책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박정희 시대인 1970년 경 한자 폐지를 선언했던 것, 여러 논란 끝에 한자 사용이 다시 부활되었다가 1980년대 후반부터 신문 및 잡지에 점차 한자를 쓰지 않게 된 점 등, 한글전용을 할 것인가 한자를 혼용해서 쓸 것인가 등에 관한 국가적 결정이 바로 언어 정책에 해당된다. 또한 세계화라는 국정 지표를 이루기 위해 김영삼 정부가1997년 초등학교에 처음으로 영어를 교과목으로 도입시킨 것도 국가 언어 정책의 일환이다.
그렇다면 가정에서의 언어 정책이란 무엇일까. 한국어만 쓰는 사회에서 양쪽 부모가 한국인인 경우, 독일에서 양쪽 부모가 독일인인 가정에서 아이를 양육하는 경우, 특별한 언어 정책은 필요 없다. 자연스럽게 한국에서는 부모가 자녀와 한국어를 사용하면서 한국어를 전수하고, 독일 부모는 독일어를 전수하게 된다.
그러나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환경에서 아이들을 키워야 하는 부모들은 이야기가 다르다. 자녀를 건강한 이중/다중 언어 사용자로 키워 나가기 위해서 어떤 언어를, 언제, 어떻게 사용하고 가르치기 시작할 지에 대해 한 번쯤은 생각해 보게 된다. 이것을 미리 체계적으로 계획하는 것이 가정 내 언어 정책 수립이고 이 논의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누가 이중 또는 다중 언어자인가
이 질문의 답은 학자마다 다르다. 단순하게 생각한다 해도 두 가지의 언어를 얼마만큼 구사할 수 있어야 이중 언어 구사자라 명명할 것인가는 답변하기 곤란한 문제다.
두 개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으면 이중 언어자인가? 얼마만큼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하는가? 두 개의 언어를 말하고 듣고 이해할 수 있으면 되는가?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수준으로 말하고 들을 수 있어야 하는가? 읽고 쓰지 못해도 이중언어자인가? 각각의 영역, 즉 말하기, 듣기, 읽고, 쓰기를 얼마나 잘해야 이중 언어자인가? 무슨 기준으로 얼마나 잘하는지는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등 여러 가지 결정하기 힘든 문제들이 산재해 있다.
또한 언제부터 누구에게 어떻게 배웠는지 등등 언어 능력만이 아닌 습득의 방법에 대한 문제까지 더해져 누구를 이중/다중 언어 구사자라고 해야 할지에 대한 분명하고 통일된 기준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 한 일이다.
대학에서 언어학 수업을 하면서 나는 학기 초에 학생들에게 항상 이런 질문을 한다. “당신은 `현재´ (살면서 새로운 언어를 배우게 될 수도 있기에) 이중/다중언어자입니까?“ 내 수업은 영어로 진행되기에 일단 내 수업을 수강하는 학생들은 영어로 수업을 받는데 문제가 없는 독일어 원어민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자신을 선뜻 이중언어자라고 칭하지 않고, “저는 학교에서 영어를 배웠고 독일인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이중언어자가 아닙니다“라고 답하는 학생들이 많다.
“영어로 무리 없이 수업을 들을 수 있는데 왜 학생은 자신을 이중언어자라고 생각하지 않느냐“라고 되물으면, 태어날 때부터 영어를 배운 것이 아니기에 자신은 이중언어자가 아니라고 한다.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학생들은 이 질문에 답변할 때 기세가 등등하다. 양쪽 부모님이 터키 인이고 독일에서 태어났기에 터키어•독일어가 모국어이고 학교에서 영어, 프랑스어를 배워 4개국어가 가능하다, 혹은 부모님이 러시아 분이셔서 러시아어, 독일어, 영어를 할 수 있다, 또는 모로코인 아버지와 프랑스 어머니 사이에서 독일에서 태어났기에 아랍어,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를 구사한다 등등… 일곱 개의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한다는 학생도 만나본 적이 있다.
그렇다면 이 학생들은 러시아어, 터키어, 독일어, 영어, 아랍어 등을 다 동일한 수준으로 구사할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태어나서부터 다른 언어를 접했으면 그 언어의 구사 수준과 관계없이 모두 이중/다중언어자인가? 몇 살부터 그 언어를 접했어야 모국어라 부를 수 있는가? 대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들이다.
언어를 배우는 방식
독일에서 자라는 우리 아이들을 생각해 보자. 한국인 부모를 둔 이민 가정의 자녀들, 업무차 주재원으로 혹은 교육상의 이유로 단기간 독일로 이주해 온 가정의 자녀들, 급증하는 국제결혼으로 인한 한독 가정의 자녀들은 모두 다른 환경에서 다른 시기에 한국어와 독일어를 배우고 사용하게 된다.
교민 가정의 자녀나 한독 가정 자녀의 경우는 사회어인 독일어를 한국어보다 훨씬 잘하게 될 확률이 높기에 균형 잡힌 이중언어자가 되기 위해서는 한국어를 어떻게 꾸준히 배워 나갈 것인가가 언어 습득의 관건이고, 주재원 자녀의 경우는 한국어 습득과 사용이 안정된 단계에 독일로 이주 오는 경우가 많기에 독일어나 영어를(국제 학교를 다닌다면) 효과적으로 배워 나가는 것이 관건일 것이다.
한독 가정 자녀의 경우, 한 부모만 한국어를 쓰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에 유치원을 다니기 전 3세 이전까지는 주로 아이를 돌보는 부모의 언어가 우세하다가, 3세 이후 독일어를 사용하는 유치원에 가고 취학 시점이 되면 독일어는 한국어 보다 훨씬 더 우세해지기 십상이다.
보통 가정에서 한국어를 주로 사용하면 아이가 유치원에서 독일어를 잘 배울까, 나아가 독일 학교에 잘 적응할까 전전긍긍하게 되는데 그 생각은 곧 아이가 초등학교를 입학하면서 사라지게 되고 부모들은 거꾸로 아이의 한국어가 일상적인 대화의 수준에서 멈추게되는 것에 아쉬워하게 된다.
이중/다중 언어를 자녀에게 전수하기 위해 던져야 할 질문들
아이를 가졌을 때부터 태어날 자녀가 다중언어 사용 환경에서 자라게 된다면 무슨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일단, 한국어를 아이에게 전수할 것인가? 그렇다면 언제부터 시작할 것인가? 특히 한독 가정의 경우 잘 생각해야 할 문제다.
내가 아는 독•러 부부는 독일 남편의 강력한 반대로 인해 러시아 부인이 남편과 함께 있을 때 아이와 모국어인 러시아어를 쓰지 못한다고 한다. 남편이 자신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은 하지 말라 했단다. 언젠가 내가 아이들과 자유롭게 한국말로 소통하는 것을 보면서 속상해하면서 그 이야기를 털어놓았는데 처음에 나는 이 말을 듣고 내 귀를 의심했다.
모든 국제결혼 부부가 아이를 이중언어자로 키워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이 반드시 좋은 선택이 아닌 경우도 있다. 각각의 가정마다 자녀 양육 사정은 다르고, 부모의 양육 능력 및 여타 가족들의 정신적, 물리적 지원의 정도도 다르기에 찬찬히 잘 따져보고 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 독•러 부부의 경우 엄마가 자녀에게 러시아어를 전수하고 싶어하고 자녀와 러시아어로 소통하고 싶어 하는데 남편이 자신이 못 알아듣는다는 이기적인 이유로 막는다는데 문제가 있다.
유럽 내 국제결혼 부부들 중에는 서로의 언어를 자유롭게 사용하는 부부들이 많다. 나의 이웃은 독일 남편•프랑스 부인-부부인데 서로 자유롭게 독일어와 프랑스어로 소통하고 그러기에 자녀는 독일어와 프랑스어를 균형 있게 잘 구사한다. 특히 독일에 살면서 프랑스 학교에 다녀서 혹시 뒤처질 수 있었던 프랑스어에 힘이 팍 들어가 아이는 두 개의 언어를 일상생활에서 문제없이 구사한다.
이렇게 부부가 서로의 언어를 자유롭고 평등하게 구사하면 힘들이지 않고 가정의 언어적 평화를 유지하면서 자녀의 이중언어 발달을 달성해 낼 수 있다.
나의 경우는 남편이 한국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지만, 내가 아이들과 한국어를 쓰는 것을 전적으로 지원해 준다. 그러한 남편에게 정말 고맙지만 한국어를 사용하는 나에게는 커다란 고충이 따른다. 가족이 함께 모여 있을 때 아이들과 내가 나누는 한국어 대화를 남편에게 틈틈이 영어로 설명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남편이 대화에서 소외되기 때문에 위에 언급한 독•러 부부와 같이 남편이 보이콧을 선언하게 만들지 않으려면, 나에게 동시통역이라는 불편함이 따른다. 아이와 내가 발화하는 모든 문장을 매번 번역하지는 않지만 일련의 대화가 끝나면 남편에게 내가 방금 이런 말을 했고 아이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브리핑을 해준다.
아이들이 어려서 말이 짧았을 때 이 일은 나에게도 남편에게도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발화가 길어질수록 매번 동시통역은 힘들어졌다. 나는 통역하기 귀찮고 힘들어서 괴롭고 남편은 다 못 알아듣게 되는 상황이 빈번하게 일어나도 인내해야 해서 괴롭다.
이렇게 다중 언어 사용 환경은 편안하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누군가의 희생과 노력으로 만들어진다. 단단하게 각오하지 않으면 하다가 포기하게 되고 괜히 어린 자녀만 들들 볶다가 한국어도 독일어도 주눅 들어 잘 못하게 만들거나, 자녀에게 한국어 낙오자라는 오명을 씌우게 된다.
반대로 양부모가 모두 한국 사람인 경우 아이를 언제 독일어에 노출시킬 것인가? 가정에서 한국어만으로 소통하다가 독일어는 아무 준비 없이 유치원 입학 첫날부터 맞닥뜨리도록 할 것인가?
물론 아이들은 유연하기 때문에 언어가 달라도 친구들과 놀면서 금방 적응하고 언어를 배운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나는 주변에서 한국 아이들뿐 아니라 일본 아이들도 독일 유치원에 가서 적응하지 못하여 아이는 물론이고 엄마들이 고생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물론 유치원 부적응은 언어만이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전혀 독일어가 안되는 아이를 유치원에 그냥 입학 시키면 감당해야 할 문제가 커지는 것은 자명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서 가정에서 한국어만 쓴다기 보다 독일어와 혼용할 것인가? 독일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가정에 없다면, 다른 조력자들을 찾을 것인가? 또한 각각의 언어에 대한 부모로서 목표와 기대치는 어떠한가? 아이의 한국말이 어느 정도까지 발달되기를 원하는가? (물론 한국어 원어민처럼 잘하게 되길 원하겠으나 이 기대치는 한국에 살지 않는 한 현실적이지 않다.) 이 과정이 얼마나 힘든 것이며, 또한 얼마만큼의 비용이 드는지 아는가?
이 외에도 아이에게 어떤 여권을 만들어 줄 것인가? 어떤 이름을 지어줄 것인가? 이중 국적, 이중 시민권을 부여하도록 도울 것인가? 직계 가족 이외의 가족들에게 이 계획을 알릴 것인가? 혹시 그들과 마찰이 예상되지는 않는가?
이 모든 질문들에 정해진 답은 없다. 가정마다 사정이 다르고 구성원들의 성격과 능력이 다르기에 무엇이 정답인지는 당장 알 수가 없다. 중요한 것은 출산 전부터 이러한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알아보고, 가정의 사정에 맞는 계획을 세워 놓고 아이를 키우면서 유연성 있게 조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중언어 아이들의 양육에 대한 정보에도 밝아야 하겠지만 우리 아이가 왜 이중/다중언어자로 자라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이유와 그에 따른 단단한 각오가 필요하다.
122호 20면, 2021년 8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