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어를 정말 잘하시네요”는 칭찬인가
연재를 시작하며
정체성의 문제는 타언어, 타문화와 함께 살아가는 우리에게 뿐만 아니라, (같은 언어를 쓰는) 타인과 소통하고 살아가는 모두에게 중요한 문제이다. 새로운 기고는 언어와 정체성에 관련된 신변잡기적인 이야기들을 해보고자 한다. 독일에 살고 있는 동포들이 매일 느끼고 생각하고 억울해하고 감사해하는 이야기들을 편안하게 풀어가면서 읽는 이도 쓰는 나도 함께 위안과 치유를 누리고자 한다.
지치고 힘든 타국 살이에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지속시키고 타인과 잘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은 의미 있을 것이라 감히 믿는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그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어떤)언어로 말한다면 그 메시지는 그의 머리로 전달되지만, 당신이 그의 모국어로 말한다면 그 메시지는 (직접) 그의 가슴으로 간다 .
If you talk to a man in a language he understands, that goes to his head. If you talk to him in his language, that goes to his heart. – 넬슨 만델라 –
모르는 사람을 처음 만나 이야기할 때 “독일어 잘하시네요” 혹은 “당신의 독일어는 훌륭합니다” 등의 칭찬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처음에 독일어를 배워가며 이 말을 들으면 이 칭찬은 한없이 고맙고 독일어 공부에 박차를 가하게 하는 커다란 에너지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십 년 넘게 독일에 살고 있는 사람이 한두 마디 독일어를 내뱉었을 때 이 말을 듣는다면 더 이상 칭찬으로 들리지 않는다.
이런 칭찬이 해외에 오래 산 사람들에게 왜 불편한 것일까? 일단 이 칭찬은 내가 별말 하지 않았는데도 거저 듣는 칭찬이라 그럴 것이다. 가령 “이게 얼마예요?” 라거나 간단하게 길을 알려 준다거나 어려울 것 하나 없는 표현을 해도 “독일어 잘하시네요”라는 칭찬을 듣는다. 독일어 학원에서 선생님께 듣는 칭찬이면 얼마나 좋을까… 학원에서 배울 때에는 이런 칭찬을 별로 들은 적이 없었다. 십
수 년을 살았는데 이 정도의 독일어로 칭찬을 받아야 하는가 하는 자괴감이 든 후에는 이 말은 나를 독일인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들린다. 왜냐하면 그 칭찬 후에 오는 질문은 보통 “어느 나라 사람이에요?”거나 혹은 “중국 사람이세요?” 조금 더 문화 차이에 대해 지각이 있는 사람들은 “아시아의 어느 나라에서 오셨어요?” 이기 때문이다.
나라는 사람이 끊임없이 나의 짧은 독일어 실력과 아시아인의 외모로 제일 먼저 평가받아야 하는 상황이 독일에 오래 살다 보니 불편해 지기 시작했다.
내가 살고 있는 뒤셀도르프는 잘 알려진 데로 일본, 중국인을 위시한 아시아인들이 많이 살기 때문에 이곳 주민들은 아시아 사람과 문화에 많이 노출되어 있다. 소위 일본 거리에 있는 일본 서점, 대형 아시아 슈퍼, 일본 호텔, 아시아 식당, 일본 및 한국 헤어숍, 기타 등등 어느 도시에나 있는 중국 음식점 이외에도 다양한 일본 먹거리와 서적 및 문방용품을 구입할 수 있고 그 거리가 시내 한 가운데에 특화돼 있어서 그런지 독일 사람들의 아시아인에 대한 거부감은 다른 도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하다.
또한 아시아 인구뿐 아니라 다양한 민족들이 뒤엉켜 살고 있다 보니 영어로 소통이 잘 된다. 가끔 거리에서나 쇼핑센터에서 아시아 관광객에게 익숙한 점원들은 먼저 영어로 말을 걸어 오기도 하는데 그래서 영어로 답변하면 여지없이 다시 “영어를 정말 잘하시네요”라고 칭찬하기도 한다. 대학 영어학과에서도 수업을 하고 있는 나에게 이 칭찬은 정말 어이없지만 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질문이다. 나에게 이 질문은 “당신의 모국어는 영어가 아니고, 당신이 영어를 잘 할 리가 없는데, 영어를 꽤 하시네요”로 들리거나 “당신이 나에게 영어로 말하고 있지만 영국인이나 미국인이 아닌데 대체 당신은 어느나라 사람이냐?” 혹은 “아시아인이면 영어를 못해야 하는데 왜 영어를 잘하느냐?”로 들린다. 내가 너무 꼬였나? 이렇게 해외에서 오래 살다 보니 더 이상 내가 독일어나 영어를 말할 때 칭찬받는 것이 기쁘지 않다. 왜일까?
어떠한 자아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가는 우리 삶의 전반적인 질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자아 정체성은 자기가 자신에게 부여한 정체성 (avowed identity)과 상대방이 자신에게 부여한 정체성 (ascribed identity)으로 구분 지을 수 있는데 자신이 자신에게 부여하는 정체성이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이렇게” 보아 주기를 바라는 정체성이다.
개인과 집단은 자유롭게 남들에게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선택해서 보여줄 수 있다. 즉 자신이 한국인임이 자랑스러우면 한글이 쓰여 있는 티셔츠를 입거나, 태극기 모양이 들어간 배낭을 매거나 한복을 입고 다니면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한국인으로 보아주길 바라고 표현할 수 있다. 독일 젊은이들 중에 일본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만화 캐릭터 같은 복장을 하고 삼삼오오 뭉쳐서 일본 거리를 몰려다닌다. 이것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나는 일본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다.
요즘 코로나 규제가 풀리고 주말마다 K-pop 콘서트가 지역마다 열리고 있는데 콘서트를 참석했던 학생들이 K-pop콘서트에서 구입한 티셔츠를 입고 수업에 와서 자랑스럽게 말한다, “선생님, 저 지난 주말에 K-pop 콘서트에 다녀왔어요.” 티셔츠에는 (나는 잘 모르는) 한국 아이돌 가수의 얼굴과 이름이 대문짝만 하게 새겨 있다. 이것이 자신이 자신에게 부여한 K-pop을 사랑하고 그 문화 이벤트에 참여한다는 정체성을 나타내는 행위이다.
또한 우리는 정체성을 직접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나는 한국 사람이에요, 여성이고요, 채식주의자이고, 학생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직접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공고하게 피력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중국 사람이에요?” 물었을 때 굳이 변명하기 귀찮으니 “그렇다”라고 말하고 그냥 지나치지 않고 꼭 “아니요, 한국 사람인데요.” 하고 답하는 행위가 이에 해당한다. 심지어 중국 사람이냐는 질문에 지친 한국인들이 “아시아인이 모두 중국 사람은 아닙니다!” 하고 일침을 날려주는 행위는 자신의 정체성이 타인에 의해 잘못 받아들여졌을 때에 불쾌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행위이다.
안타깝게도 남들은 항상 우리를 우리가 원하는 정체성으로 보아주지 않는다. 즉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에 대한 완벽한 통제는 불가능하다. 한국이나 일본 사람들이 서양에서 종종 (아니 항상?) 중국인으로 오해받는 것은 특별하게 중국인처럼 생겨서가 아니라 (중국인처럼 생겼다, 한국인처럼 생겼다는 구분이 가능하기나 한가) 서양 사람들에게 동양인을 대표하는 것은 중국인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과거에 서양인은 무조건 미국 사람이었고 국제도시가 된 서울은 이제 좀 덜하지만 외국인의 접촉이 많지 않은 지방의 작은 소도시나 마을에서는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당신은 중국에서 왔나요?” “당신은 중국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이 불쾌한 이유는 나는 내가 한국 사람으로 보이길 원하는데 (자신에게 부여하는 정체성) 타인은 나를 중국 사람(상대방이 자신에게 부여한 정체성)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기가 자신에게 부여한 정체성과 상대방이 나에게 부여한 정체성 사이에 차이가 생기면 갈등이 생긴다. 그 갈등의 골은 대부분 매우 깊어서 개인이나 집단에게 큰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국적이나 민족성뿐만 아니라 다른 조건에 대해서도 내가 원하는 데로 상대가 나를 보아 주지 않으면 갈등이 생긴다. 실제로 나의 나이는 30세인데 사람들이 나를 터무니없이 어리게 보거나 나이 들게 봐서 내가 기대한 것과 다르게 나를 취급한다면 갈등이 생기지 아니하겠는가.
직장에 갓 입사한 신입사원은 커다란 포부를 가지고 책임감 있는 조직 구성원으로 일하고자 출근했는데 상사가 “너는 아직 아무것도 모르니 복사나 하여라”라고 하면 MZ세대 신입사원은 자괴감을 느끼고 일할 맛이 뚝 떨어질 것이다. 또한 상사에 입장에서 볼 때 새로 들어왔으니 배우는 마음으로 일에 임해야 하는 신입사원이 마치 당장 내일이라도 계약을 하나 물어 올 것 같이 거만을 떤다면 그러한 태도를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이렇게 내가 원하는 대로 타인이 나를 보아 주지 않아서 생기는 갈등이 정체성 문제에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럼 원점으로 돌아가서 수년 혹은 수십 년간 독일에서 산 사람들에게 “독일어를 잘하네요”가 왜 칭찬이 아닌지를 생각해 보자.
오랜 시간 동안 독일에서 생활 한 사람들은 완벽하게 독일어를 구사하지 못할지라 하더라도 문안하게 독일 생활을 해 나간다. 한국 정치보다 내 생활이 직접 맞닥뜨려있는 독일 정치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내가 살고 있는 독일 법률과 제도에 더 익숙하게 되며, 독일에서 자녀를 낳고 기른 부모라면 독일 학교 시스템과 학교생활, 입시 제도 및 각종 혜택들에 대해 익숙하게 된다. 일하는 사람이면 지역 정부, 독일 정부의 사회, 경제발전에도 기여를 하고 또한 세금을 내니 납세자로써 참정권을 주장하게 된다 (이번 정부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그러다 보면 자신이 사는 지역에 몸만 정착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생각도 정착하게 된다. 이렇게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 교육, 정치, 문화와 끈끈하게 연을 맺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몇 마디 독일어를 했다고 독일어를 잘했다는 말은 그래서 모욕이다. 지역 정체성을 견고하게 장착한 사람에게 굳이 “당신은 독일 사람처럼 생기지 않았으니 외국인이지 않소?” 하는 말로 들리기 때문이다.
이웃 중에 독일인과 결혼한 일본 여성이 있는데 남편과 한적한 독일 시골에 휴가를 가서 저녁을 먹고 있는 중에 옆 테이블 남성이 독일 남편에게 “부인을 어떤 인터넷 웹사이트에서 주문했냐”라고 물어서 커플을 당황하게 했다고 한다. 남편이 가까스로 정신을 챙겨 자신의 일본 부인은 독일로 유학 와서 자신을 만나게 되었다고 답해주었다는 소름 끼치게 기가 막힌 이야기가 있다. 자신은 독일에 유학 온 학생이었고 독일 남자를 만나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타인은 독일 남편이 인터넷 사이트에서 주문해서 지구 반바퀴를 돌아 독일로 배달된 여인으로 보았다는 이야기. 도저히 웃어넘길 수가 없다.
이런 기막힌 이야기보다는 그래도 칭찬이 낫지 않을까. 칭찬하는 사람들이 잘못되었다거나 그들에게 그런 칭찬을 하지 못하도록 하자는 것이 아니다. 왜 이런 칭찬은 불편하며 그 불편함의 근본을 파헤쳐 보자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나의 불편함을 이해해야 상대방의 몰지각과 무례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이 물색되고, 고칠 수 없는 일이라면 적어도 상대를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생기면서 나의 정체성에 대한 생각의 깊어지고 정체성을 견고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자 이제 불편의 깊은 심지를 알았으니 상대를 이해할 방법을 모색해 보자. 칭찬해 주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고 내 모습을 보니 동양인이니 독일인이 아닌데 독일어를 짧게라도 구사한다면 칭찬해 줘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으로 건넨 칭찬일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거기에 목숨 걸고 독립운동 하듯이 바락바락 그러지 말라고 하기도 우습다는 생각에 고맙다고 윙크하고 넘어갈 수도 있겠다.
혹은 수십 년씩 독일에서 살며 독일이 제2의 고향이거나 심지어 한국에서 산 시간보다 독일에서 산 시간이 더 길어 자신이 사는 지역 정체성을 견고하게 가진 사람들이라면 그런 질문은 무지하다는 것을 타인에게 알려 줄 수 있겠다. “이 지역에 산 지 오~래 되었어요”라고. 이런 마음의 여유가 생겨야 나의 정체성을 오해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상처 받지 않을 수 있다. (여담이지만 우리는 한국 사람이라 겸손이 미덕이라 이런 칭찬에 독일어 아직 잘 못한다고 손사래치며 더 잘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우리에게는 정답이지만 타인에게 이 말은 다른 의도로 들릴 수 있다.)
지피지기 (知彼知己)면 백전불패(百戰不殆)이라 하였다. 살짝 의역하여 나의 불편함에 대해서 먼저 잘 파악하면, 남도 상대적으로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그러면 어떤 갈등도 해결할 수 있는 문이 열리지 않겠는가. 앞으로의 글들이 해외살이에서 우리의 내적 갈등을 해결할 작은 등대 역할을 할 수 있기를 소원한다.
<기고자 소개>
• 현 독일 루르 보훔대학교 한국학 강사, 쾰른대학교 영어교육학과 사회 언어학 및 어린이 다중언어 발달 교육 강사
• 기업 이문화 컨설턴트 (Interkuturelle Beratung, Cross-cultural consultant)
• 독일 쾰른대학교, 다중언어 어린이 한국어 습득에 관한 연구로 언어학 박사
• 미국 메릴랜드주립대 (UMBC) 언어문화교육 석사
• 현 11학년과 10학년 자녀의 엄마
1273호 14면, 2022년 7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