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박정희 대통령의 방독
1963년 12월 22일 오후 6시,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뒤셀도르프시의 ‘뒤셀도르프 공항’. 에어 프랑스 제트기 한 대가 도착했다.
탑승객들이 차례차례 내리기 시작했다. 말쑥하게 신사복을 차려 입은 검은 머리의 한국인, 바로 파독광부 1차1진이었다. 1차1진은 모두 123명. 그리고 5일 12월 27일, 1차1진 나머지인 124명이 독일에 도착했다. 이렇게 1차 1진 247명을 시작으로 파독 근로자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교포신문사에서는 파독 광부 60주년을 맞아, 1월부터 매월 4 째주 “파독광부 60년” 특집을 이들이 도착한 12월 22일까지 12회에 걸쳐 연재한다. 독자들의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린다. -편집자 주
1964년 12월6일 오후 1시40분 김포공항. 박정희 대통령은 하인리히 뤼프케 서독대통령의 초청으로 독일 루프트한자 649호기를 타고 서독 방문에 나섰다. 대통령 전용기가 없던 터라, 박 대통령 일행은 다른 승객들과 함께 1등석에 위치했다.
수행원은 육영수 여사를 비롯한 공식 수행원 13명, 백영훈 중앙대 교수(통역) 등 비공식 수행원 11명 등 모두 24명이었다. 동행 기자는 11명이었다.
공식수행원으로는 대통령부인 육영수 여사, 장기영 부총리, 이동원 외무부장관, 박충훈 상공부장관, 김동환 국회외무위원장, 김성진 의원(공화당), 조윤형 의원(민정당), 이후락 청와대비서실장, 최덕신 주서독한국대사, 김동오 합동참모회의의장, 박종규 청와대경호실장, 정도순 외무부 의전실장, 조상호 청와대의전비서관 등 13명이었다.
비공식수행원으로는 노석찬 공보차관, 박상길 청와대대변인, 백영훈 중앙대교수(대통령 통역), 지홍창 대통령주치의, 신동관 청와대경호과장, 이복형 청와대의전비서관, 이천배 청와대경호관, 나은실 육영수여사통역, 황경분 미용사, 이정섭 공보부사진기사, 박진석 공보부사진기사 등 11명이었다(『한국일보 1964년 12월 6일』, 1면 참고).
박정희 대통령을 태운 비행기는 김포공항을 이륙, 12월7일 오전 9시40분쯤 0도를 약간 넘는 흐린 날씨 속에 본의 쾰른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박 대통령은 하인리히 뤼프케 서독대통령과 에르하르트 수상과 악수하고 21발의 예포와 한독 양국가가 연주되는 가운데 의장대를 사열했다. 뤼프케 대통령의 환영사에 호응해 도착 성명을 발표하며 일정을 시작했다. 본-베를린-뮌헨으로 이어진 일정은 다음과 같았다.
▲7일 오후 8시 뤼프케 대통령 주최 비공식 만찬(대통령 관저) ▲8일 오전 10시40분 박 대통령 부처 뤼프케 대통령 부처 예방, 11시50분 무명용사묘지 화환증정, 오후 7시 뤼프케 대통령 만찬(대통령 사저), 오후 9시 뤼프케 대통령 부처 주최 음악회 및 리셉션 ▲9일 오전 11시40분 서독 하원 방문, 낮 12시30분 에르하르트 수상과 회담, 오후 1시 에르하르트 수상 부처 오찬(수상 관저), 오후 8시 뤼프케 대통령 부처를 위한 만찬 주최(쾨니스호프 호텔) ▲10일 오전 10시30분 한국 광부 접견(함본 광산회사), 오후 5시40분 베를린 도착, 오후 8시 빌리 브란트 베를린 시장 주최 만찬회(베를린) ▲11일 낮 12시 베를린 공과대에서 연설 ▲12일 정오 뮌헨 도착, 오후 3시20분 구아지역 공관장 회담 참석(뮌헨) ▲13일 오전 8시 재독유학생들과의 조찬 ▲14일 오전 7시15분 뮌헨 출발, 15일 오후 7시5분 김포공항 도착(『한국일보 1964년 12월 6일』, 1면 참고)
12월7일부터 14일까지 7일 동안 이뤄진 박정희 대통령의 서독 방문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외견상으로는 ‘라인강의 기적’을 확인하고 한-독간 우호증진이 목적이었지만, 실제로는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필요한 차관을 빌리기 위해서였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 당시 서독 정부와 차관교섭을 벌였던 오원철의 설명이다. “말로만 전해 듣던 ‘라인강의 기적’은 과연 어떤 것인가. 내 눈으로 그 실체를 정확하게 보고,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원동력이 무엇인가 알고 싶었다. 보다 넓은 세계로 뻗어나가기 위하여,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어떤 것인가 궁금했다. 이것이 공식적인 서독방문 이유였다.
그러나 더 다급한 속사정은 차관을 얻어내는 일이었다. 5․16 이듬해,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착수되었다. 우리는 여러 면에서 경험이 부족했다. 우리 실정에 맞는 5개년계획을 만든다는 것부터 생소했다. 그것은 고도의 전문지식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설사 남의 도움으로 그럴싸한 5개년계획을 만들었다 해도, 그것을 차질 없이 운용해 나갈 테크노크라트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공장을 지으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 1963년 9월말 달러보유고는 고작 1억 달러도 되지 않는 9300만달러에 불과했다…5개년계획을 세워 놓았으나, 추진할 자금이 없었다.
군사정부를 탐탁하지 않게 여기는 미국은, 무상원조를 받는 국가에게 차관을 줄 수 없다고 주장했고, 일본은 국교가 없는 나라와 차관협정을 맺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벼랑에 선 격이었다. 대통령의 서독방문은 공식적 이유가 무엇이건, 차관을 얻어내기 위한 방문이었다는 게, 더 솔직하고 절실한 사정이었다.”(오원철, 『한국형 경제건설1』, 기아경제연구소: 서울, 1995, 108~110쪽)
차관지원 약속은 박 대통령이 방독하기 전에 양국 실무협상에서 어느 정도 논의가 됐지만, 박 대통령은 하인리히 뤼프케 서독대통령과 루드비히 에르하르트 수상, 서독 하원 방문 때마다 거듭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결국 1억5900만마르크(약 4000만 달러)의 차관지원 약속을 받아냈다.
특히 방독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파독 광부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겼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와의 추억은 주요한 방독 일정을 거의 마친 12월10일, 서독 뒤스부르크시의 시민회관을 방문하면서 만들어졌다. 그는 이역만리 서독에서 고생하는 파독 광부와 간호사의 노력에 감사를 표시하고, 공로를 인정했던 것이다.
당시 언론보도를 종합하면, 정장을 차려 입은 파독 광부 300여명과 한복을 입은 간호학생 30여명이 1964년 12월10일 오전 함본 광산회사가 있는 서독 뒤스부르크시의 시민회관에서 긴장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태극기가 들려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코트 차림으로 강당에 들어선 시각은 이날 오전 10시40분쯤. 뤼브케 대통령과의 만남, 에르하르트 수상과의 회담 등 주요 일정이 끝난 뒤였다. 박 대통령을 뒤에는 한복 차림에 밍크목도리를 한 육영수 여사 등이 따랐다. 파독 광부와 간호학생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환영했고, 박 대통령 내외도 손을 흔들어 답례했다.
박 대통령이 코트를 벗자, 1차1진 파독광부 조립씨가 옷을 받아 옷걸이에 걸었다. 화환 증정 등에 어어 애국가가 연주되기 시작했다. 우렁차게 시작된 노래는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구절에서부터 목멘 소리가 나오기 시작하더니, 마지막 구절인 ‘대한사람 대한으로…’에선 아예 흐느낌으로 변했다. 설움의 눈물이었다.
박 대통령 내외도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 회사 측의 환영사가 있은 뒤 박 대통령이 격려사를 시작했다. “우리가 잘 산다면 왜 여러분이 부모형제를 저버리고 이역만리인 이곳에서 노동을 하게끔 하겠습니까. 우리도 남의 나라 못지않게 잘 살기 위해서 피와 땀을 흘려서 부강한 나라를 이룩해서 우리의 자손에게는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이 설움을 남겨주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오소백 외, 『해방 20년』, 세문사: 서울, 1965, 720쪽)
박 대통령의 연설이 이뤄지는 사이, 설움에 복받친 파독 광부들과 간호사들이 여기저기서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연설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고, 박 대통령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파독광부 1차 1진 조립씨의 기억이다. “단상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는 대통령 내외나, 밑에서 위를 쳐다보는 우리나, 모두 무능함을 통감했다. 아니 무능함보다는 아무 것도 없다는 설움 같은 것을 느꼈다. 우리는 그날 많이 울었다.”
박 대통령의 연설에 이어 파독 광부 대표의 답사가 있었고, 곧이어 광산 노동자와 간호요원들이 건의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파독 광부 유제천씨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긴장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저희들은 본래 3년 계약으로 이곳에 왔습니다. 3년 계약이 끝나서 다시 조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직장을 보장해 주십시오.” 파독 광부들은 이어서 ▲국내로 송금하는데 환율을 조정, 부담을 줄여달라 ▲계약기간이 만료된 후 계속 서독에서 일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달라 등 건의사항을 밝혔다.
박 대통령은 파독 광부들의 이 같은 건의에 대해 “건의사항이 차질 없이 이뤄지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분명히 답했다.
파고다 담배 500갑을 선물하고 기숙사를 둘러본 박 대통령이 승용차로 향하자 일부 파독 광부는 악수를 청했다. 다른 일부 광부는 뤼브케 서독대통령의 의전실장 아놀드 쉐이퍼 앞에서 무릎을 끓고 “대한민국을 살려달라”고 절을 하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차에 오르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울먹이는 소리를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차가 사라질 때까지 계속 됐다. 그것은 절망의 끝자락에서 부르는 광부들의 노래였다. 만세! 만세!
대한민국 만세!….
*본 글은 김용출기자의 ‘독일아리랑’에서 인용하였습니다 -편집자주
1312호 14면, 2023년 4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