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이해하자 / 149

또 다른 명품, 독일 총리들(14)

명품 왕국 독일에는 제품·인프라·시스템뿐만 아니라 인물에도 명품이 많다.
경제적으로 ‘라인강의 기적’과 정치적으로 ‘베를린의 기적’을 이끌어온 ‘서독과 통일독일의 연방총리들’이야 말로 나치 정권의 혹독한 시련을 겪은 독일이 길러낸 최고 명장들이며 독일 국민이 만들어낸 최고의 명품이다.
독일의 연방총리를 보면 자유민주주의와 강력한 서독(아데나워)- 시장경제와 경제기적(에르하르트)- 동방정책(빌리 브란트)-동서 데탕트 시대(슈미트)- 유럽 통합과 독일 통일(헬무트 콜)- 노동개혁과 독일병 처방(슈뢰더)- 독일병 치유와 EU 대주주(메르켈) 그리고 현재 올라프 숄츠로 이어지며, 제2차 세계대전 후 건국-분단-냉전-성장-통일-통합에 이르기까지 마치 한 편의 대하드라마처럼 잘 짜여진 시나리오로 구성되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초대 통일독일 총리 헬무트 콜(Helmut Kohl) ➂

헬무트 콜(Helmut Josef Michael Kohl, 1930년 4월 3일~2017년 6월 16일)은 1982년부터 1998년까지 독일의 총리와(1982-90년은 서독, 1990-98년은 통일 독일의 총리) 1973년부터 1998년까지 독일 기독교민주연합(CDU)의 총재를 역임한 정치인이다.

콜의 16년 남짓을 달하는 총리 임기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 이후 가장 긴 기간이었고, 전 세계 어디에도 민주적인 투표로 당선된 정부수반들 중 그보다 오래 재임한 사람은 없다. 특히 냉전 시대의 종말을 감독하고 독일 통일을 이끈 업적은 널리 칭송 받고 있다.

총리가 되기까지

야당의 지도자

1980년 전당대회에서 CSU의 지도자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가 CDU/CSU 연합의 총리 후보로 선출되자 콜은 차기 후보로 남았다. 하지만 슈트라우스는 그해 총선에서 독일 사회민주당-자유민주당 연합에게 패했고, 콜과 달리 CDU/CSU 연합의 대표직을 포기하고 바이에른 주의 총리로 복귀했다. 이후 콜은 슈미트 총리의 임기 기간 동안 기독민주연합의 대항마로 활동했다(1980-82).

1982년 9월 17일, 경제 제도에 대한 갈등이 독일 사회민주당-자유민주당 연합 내부에서 발생했다. 자유 민주당은 노동 시장을 기업 중심의 급진적 자유화로 가길 원했지만 독일 사회 민주당은 노조 중심의 안정된 노동 시장을 선호했다. 결국 자유 민주당은 콜의 주도아래 부분 적인 개혁노선을 걷던 기독민주연합(CDU/CSU)과 차기 정권 창출을 위한 양당 실무협상을 시작하기에 이른다.

서독 총리 자리에 오르다

1982년 10월 1일, CDU는 자유 민주당의 지지에 힘입어 총리 불신임 투표를 실시한다. 그 결과 3일 후, 연방 국회는 콜을 총리로 선출하는 것을 골자로 CDU/CSU-자유 민주당 연합 내각을 택하게 된다. 이 새로운 연합의 중요한 사안은 그해 9월 20일 대부분 타결되었고, 나머지 사안들은 후에 투표로 결정되었다.

콜의 총리 선출은 기본법에 의거하여 진행되었지만, 안팎으로 논란(선거법 위반)이 일어났다. 특히 자유 민주당(FDP)은 1980년 총선 기간 동안 독일 사회 민주당과 연합 정당이었고, 심지어 슈미트 총리의 사진을 포스터에 싣기도 했다. 또한 콜을 중심으로한 새 정부가 과연 다수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의문들을 해소하고자 콜 총리가 주도하는 새 정부는 신임투표라는 승부수를 던진다. 기본법에 따르면 신임 투표에 실패해도 국회는 해산만 되므로 콜 정부는 다른 논란을 신임투표를 강행한다. 콜은 그의 연합 정당(CDU/CSU) 일원들이 기권한 상태에서 신임 투표를 진행하게 된다. 그후 카를 카르스텐스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하고 새 선거를 진행한다. 당시 기독 민주당과 자유 민주당 연합의 이러한 움직임은 논란이 많았지만 독일 연방 헌법재판소는 이를 합법적으로 인정했고 2005년 다시 한 번 독일 사회 민주당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에 의해 적용된다.

재선

1983년 3월 연방 선거에서 콜은 큰 표 차이로 재선에 성공한다. CDU/CSU 연합은 48.8%의 표를 휩쓸 동안 자유 민주당 7%의 표만 얻었다.

콜의 두 번째 내각은 NATO의 중거리 미사일 배치 등 몇 가지 논란이 많은 계획들을 실행한다. 1984년 1월 24일 콜은 이스라엘 국회에서 전쟁 후 첫 독일 총리로서 연설도 하였다.

1984년 9월 22일, 콜은 제1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서 일어난 베르됭 전투의 장소인 베르됭에서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과 만났다. 이들은 함께 두 세계전쟁으로 희생된 이들의 죽음을 기념했다. 이들이 긴 악수를 하는 사진은 프랑스-독일 간의 화해의 상징으로 기억된다.

1985년 콜과 로널드 레이건 미합중국 대통령은 유럽 전승 기념일 40주년을 같이 기리며 독일과 미국의 유대 관계의 힘을 보여줄 기회를 찾았다. 1984년 11월 백악관을 방문한 콜은 레이건 대통령에게 독일 현충원에서 두 국가들간의 상징적인 화해에 동참해달라고 제안했다. 그 결과, 레이건이 본에서 열린 G7 정상 회의를 위해 독일을 찾았을 때, 이 둘은 5월 5일에 베르겐-벨젠 강제 수용소와 Waffen-SS 부대 소속 49명의 시신을 수용 중인 비트부르크 독일 현충원을 방문하였다.

삼선

1987년 연방 선거 때 콜은 3선에 성공한다. 이 때 독일 사회 민주당의 총리 후보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총리 요하네스 라우(Johannes Rau)였다.

1987년 콜은 동독의 지도자 중 처음으로 서독을 방문한 에리히 호네커를 맞이한다. 이는 콜이 1970년대 독일 사회 민주당이 내놓았던 대(對) 동유럽 정책을 채택해 동, 서독간의 협조 관계를 조성했음을 보여준다(이는 콜이 속해있던 CDU 당이 강하게 반대했던 정책이다).

다음 호에서는 통일 총리 헬무트 콜을 살펴본다.

1323호 29면, 2023년 7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