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9월이면

류 현옥

B여사는 9월이 가까워지면 어김없이 소식을 전해왔다

“우리같이 도착한날 만나서 밥이라도 같이 먹어야 할 거 아니야 !?”라는 말로 시작한 후

한동안 소식전하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이 뒤따랐다. 십여 년이나 연하인 내가 안부

드려야 하는데 오히려 제가 죄송스럽다고 하는 나에게 “너는 바쁜 사람이니까. 내가 이해하지!, 근무하고 두 아이 혼자 키우고 글 쓰고” 라는 말로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같은 비행기를 타고 와서 같은 직장에 도착한 중요한 인연을 재삼 상기시키며 보고 싶다고 했다. 서로의 근황을 짧게 교환하고 만날 날짜와 시간을 정하여 만나기도 했지만 자주 있었던 일은 아니다.

자녀와 남편을 두고 온 B여사는 약속한 3년이 지난 후에도 되돌아가지 않고 해마다 그날을 기억하고 햇수를 세며 사신분이다.

덕택에 비행기에서 내린 그날을 전후하여 몇 번인가 B여사의 표현대로 밥을 같이 먹었다.

B여사가 더해가는 기억력 상실로 혼자 살수가 없게 되자 공공시설에 입주했다는 소식을 듣고 방문을 했다. 벽에 붙여 세운 좁은 침대에 누웠다가 왜소한 체구를 일으키며 “네가 현옥이지?”의 한 마디를 한 후 곧 다시 기억상실의 세계 속으로 되돌아갔다.

눈에 익은 긴 장롱이 침대 반대쪽 벽에 붙어서 있었다. 묵은 살림살이의 일부로 따라와 B여사를 지켜주고 있었다.

방한 칸으로 줄어든 삶의 광장에서 혼자 희미해지는 옛일들을 붙드는 지팡이 역할을 하는 듯했다. 장롱 문을 열어보니 비어있었다. 지난날의 흔적을 알리는 향수냄새가 흘러나왔다. 반세기를 살며 사다 모은 옷을 어디다 버리고 왔는지 물어볼 수도 없고 무용지물인 빈 장롱을 왜 끌어다 놓아 오히려 방을 더 좁혔는지 묻지 못했다. 혼미상태에서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고 운반되어온 환자로 장롱이 따라오는 것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습관적으로 장롱 문을 열지도 모른다. 가끔 순간적으로 빤짝 의식이 돌라와 빈 장롱 문을 열면 그녀가 아는 향수가 반겨주었을 지도 모른다.

이날 동행한 근처에 사시는 R 여사는 손을 잡은 체 앉았다. 역시 같은 날 이곳에 온 분으로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기억을 더듬었다. 나는 짧은 방문시간이었지만 송두리 체 잡힌 마음을 되찾기에 전력을 다했다. 돌아오는 전철 속에서 한 달에 한 번씩 가자고 제안을 했다.

R여사는 그런 비현실적인 제안은 하지 않는 게 좋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불가능한 일이란다. 모두 정년퇴직으로 집에 앉아 있는 것 같지만 시간이 오히려 근무할 때 보다 더 없이 바쁜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D 여사의 예언대로 우리는 한 달에 한번은 고사하고 해가 바뀐 후에도 방문하지 않았다. 세월이 흘렀다.

내가 9월에 고국을 떠났다는 것을 가시 기억하게 하는 일은 부산에서도 있었다.

어느 해 귀국 여행 중에 있었던 일이다 지하철역에서 나를 알아보고 어깨를 치며 반가워하는 친구였다 “가시나야 아직 살아있나 ”

소식이 없다하여 다 죽어 없어진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대로 헤어질 수가 없다며 지하철 역 밖으로 나를 이끌었다.어디 가서 차라도 한잔 마시며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자고 하다가 15분 만 걸으면 얼마 전에 이사 온 아파트로 가잔다.나에게 줄 것이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고 했다. 파란만장의 인생살이에 여러 번 이사를 할 때마다 내가 남기고 간 우편엽서가 다른 묵은 서류 속에서 나와 손에 잡혔단다. 지금까지 버리지 못하고 보관하고 있단다.

“이렇게 너를 만날 줄을 누가 알았겠어. 좋은 전조로 내가 버리지 않고 보관한 게 아니겠어?” 바다가 멀리보이는 부산 해운대에 자리한 아파트의 꼭대기 층에 살면서 이제는 더 이상 이사를 안 하기로 작정했단다. 친구는 혼자살고 있었다. 남편이 떠나고 자식들이 출가한 후 아침저녁으로 바다를 바라보며 살기로 했단다.

바다 쪽으로 난 거실 문을 열어 제치고 앉으니 정말 살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누렇게 변한 우편엽서를 들고 나왔다. 나도 기억할 수 없는 나의 손 글씨로 쓴 한 줄의 글이 적힌 우편엽서다. 잉크 빛이 지워져 희미하게 지워진 상태다.

너는 그때 만년필 로 편지를 썼지!

“친구야 나 9월 29일 출국한다!”그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나는 사라졌다고 했다.

1970년 여름 내내 더위와 싸우며 귀국준비를 했고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한 9월말에 출국을 했다. 많은 친구들 나를 아껴준 은사님들 그 외 친지들 한태 일일이 찾아가지 못하고 우편엽서로 작별인사를 했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나 나는 이 친구에게 그 이후로 편지를 하지 않았고 그녀 역시 종종 생각을 하면서 주소를 구할 길이 없었다고 했다.

“너는 새 세상에 가서 새 친구를 찾아야 해서니 옛 친구는 잊었겠지 !네가 왔다갔다는 소식을 종종 들었어. 이제는 메일도 있고 국제전화도 쉽게 할 수 있으니 연락하며 살자!”

“뭐 지금 와서 억지로 그럴 필요는 없어!” 그녀는 의외로 냉정했다. 세사에 시달린 흔적이 역력했다. 이미 죽마고우는 아니었다. 나는 그해도 그녀와 헤어져 9월 말에 독일로 돌아왔다

세월은 흘렀다.타향살이 햇수를 세는 것까지 잊은 B여사의 연락이 없는 대신 올해는 50 년이 되는 해라 같이 온 사람들이 밥같이 먹자는 소식이 왔다.그동안 귀국하신 분 돌아가신 분 외에도 연락이 안 되는 분들로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숫자였다. 코로나를 피해 우리 집 정원에서나물한가지씩 들고 와서 만나기로 결정했다. 9월 30 일에 도착한 우리에게 다음날부터 독일어 수업을 시작한 옛 독일어 선생님 부부도 초대했다.

그동안 수그러졌던 코로나 가 다시 기세를 보이기 시작하자 한사람 두 사람 우리의 만남에 오지 않겠다는 소식이 왔다.

어디 겁나서 바깥에 나가겠느냐는 것이다. 그동안 안 만나고 살았는데 지금 와서 늙은 얼굴 마주대고 앉아봐야 무슨 큰 의미가 있느냐고 물으면서코로나를 피해야 할 나이들이라고 말했다.

이민 50주년 만남이 취소되었다. D여사와 함께 그동안 가보지 못한 B여사를 방문하자는 전화가 오갔다. 우선 담당자와 미리전화라도 한통하고 근황을 알아보고 혹시 필요한 물건 이 있는지 알자고 전화번호를 찾았다. 전화번호를 알 만한 사람을 물색하는 중에 또 며칠이 지나갔다. 어느새 9월 중순이 지나가고 있는 어느 날 외출에서 돌아오는데 전화 자동응답기의 불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B여사가 8월말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B여사는 이제는 더 셀 수 없는 해를 넘기지 않으려고 미리 서둘러 떠나신 건가?

나는 해마다 9월이 다가오면 B여사를 생각하고 이민의 연수를 셀 것이다. 지난날을 세는 일은 남은 날이 줄어드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B여사는 줄어가는 남은 날을 보았기에 지난날을 더 세지 않기로 했는지 모른다.

1197호 14면, 2020년 12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