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7)

교포신문사는 3.1운동 100주년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8회에 걸쳐 특집 면을 준비한다. 이번 기획 특집에서는 먼저 3.1운동의 전반을 살펴보며, 3.1운동이 우리 민족사에 차지하고 있는 의미를 되짚어 보며, 3.1운동의 결실인 상해 임시정부의 수립과정을 심층적으로 살펴본다. -편집자 주

IV.  임시정부 수립

3·1운동은 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법을 체계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3·1운동의 경험을 통해 민족의 주체역량에 기초해야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실력양성과 무장투쟁이 독립운동의 방법으로 체계화하였다. 그리고 왕조의 회복을 목표로 한 복벽주의(復辟主義)가 청산되고 민주공화제가 독립국가의 목표로 자리를 잡았다.

 

1) 3·1운동 직후 각지에 수립된 임시정부와 통합과정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 발표를 시작으로 서울과 평양을 비롯한 전국 각지는 물론 중국의 간도,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미국의 한인사회에서도 독립만세시위와 독립선언이 일어났다. 이러한 독립국가 수립에 대한 열망은 곧바로 국내외 각지에서 독립국가 건설 움직임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때의 정부 수립은 정식 정부를 수립하기 이전 단계인 ‘임시정부’였다. 임시정부 수립이 추진된 곳은 국내의 조선공화국(朝鮮共和國, 세칭 漢城政府)과 신한민국정부(新韓民國政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 그리고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였다. 이외에도 실체는 확인되지 않으나 살포된 전단이나 보도기사 등에만 나타나는 이른바 ‘전단정부(傳單政府)’도 약 3~4개가 찾아진다.

물론 임시정부 수립의지는 이전에도 나타나고 있었다. 1910년 미주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에서 주창한 무형국가론(無形國家論)과 1917년 상해에서 신규식(申圭植) 등이 주장한 대동단결선언(大同團結宣言) 등을 통해 ‘제국’이 아닌 ‘공화정(共和政)’에 입각한 ‘민국’ 건설을 천명하였으나 국가 수립으로 이어지지는 못하였다.

이중 가장 먼저 임시정부 수립을 표방한 곳은 러시아 한인들을 총괄하던 전로한족중앙총회(全露韓族中央總會)였다. 전로한족중앙총회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곧바로 정부 수립에 착수하였다.

1919년 2월 니콜리스크(현 우수리스크)에서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를 조직하여 임시정부로서 역할할 것임을 천명하고 3월 대한국민의회 수립을 선포하였다. 이어 국내에서도 3월 초부터 임시정부 수립을 추진하여 4월 13도 대표자회의와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임시정부를 선포하였다. 이른바 ‘ 한성정부(漢城政府)’이다.

또한 상해에서도 1919년 초부터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과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상해로 건너온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프랑스조계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임시정부 수립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4월 10일 29명의 대표자들이 모여 ‘ 대한민국임시의정원(大韓民國臨時議政院)’을 결성하였다. 임시의정원은 오늘날의 입법기관인 ‘국회’에 해당한다.

임시의정원은 첫 회의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결정하는 한편, 정부 조직과 내각 구성원을 선출하고, 헌법에 해당하는 ‘임시헌장’을 선포하였다. 이로써 대한제국이 멸망한 지 9년 만에 ‘제국’에서 ‘민국’으로 전환하면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선언하였다. 이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민주공화국임을 선언한 것이었고, 해방 이후 정식으로 ‘대한민국’이 수립된 이후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4월 11일 공포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이후 상해의 임시의정원은 미흡한 정부 조직을 체계화하는 한편, 제4회 회의에서는 한성정부·대한국민의회 등 다른 임시정부 조직과도 통합을 의결하였다.

임시정부 통합 노력은 1919년 5월 내무총장으로 임명된 안창호가 미국에서 상해에 도착하면서 급진전되었다. 안창호의 역할로 상해 임시정부와 대한국민의회를 동시에 해산하고 13도 대표가 조직한 한성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여 새롭게 의회를 구성하자는 통합안을 통과시켰다. 다만 정부의 위치는 당분간 상해로 둘 것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대한국민의회는 8월 30일 총회를 열고 해산을 선언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임시의정원은 제6회 회의(8. 18~9. 17)에서 통합 정부에 걸맞는 임시정부 개조와 제1차 개헌을 단행하고 9월 11일 ‘대한민국임시헌법’을 공포함으로써 명실상부한 통합 임시정부가 발족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뒤 첫 1월1일에 임정 요인 58명이 태극기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

 

2) 상해시절 임시정부의 초기 활동

통합 임시정부가 출발부터 순조로운 것은 아니었다. 대한국민의회를 이끌었던 문창범은 상해 임시정부 조직이 한성정부 개조 수준에 그치자 이에 반발하여 내각 취임을 거부하였고, 신채호(申采浩)를 비롯한 무장투쟁세력은 이승만이 대통령에 취임하자 그의 위임통치를 비판하면서 북경으로 돌아가 버렸다. 결국 안창호의 설득으로 11월 러시아의 이동휘가 국무총리로 취임하면서 불완전하나마 통합 정부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7부 1국 체제로 조직된 임시정부는 통일·군사·외교·교육·사법·재정 등 다양한 방략을 동시에 추진하였다. 그중 가장 먼저 추진한 것은 안창호의 주도로 실시된 연통제(聯通制)와 교통국(交通局)을 설치였다. 이를 통해 국내의 행정을 장악하고 교통망을 확보하여 임시정부의 통신 연락과 주요 거점으로 활용하였다. 이 연통제와 교통국은 선전활동과 군자금 모집,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이러한 거점 조직 확보와 함께 임시정부는 1919년 12월부터 군사활동계획을 수립하여 추진하였다. 이는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군대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같은 해 말 상해에 육군사관학교를 설립하고 3기생까지 모집하였다. 또한 공군 창설을 위해 비행사 양성을 추진하여 군무총장 노백린이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주 윌로우스에서 비행사양성소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이 두 학교는 모두 재정난으로 폐교되었다. 이외에도 임시정부는 독립전쟁을 전개하기 위해 국내 비밀결사 조직과 연계하였는데, 대한독립애국단(일명 철원애국단)을 비롯하여 조선민족대동단· 대한민국청년외교단· 대한민국애국부인회· 대한국민회 등이었다. 또한 만주에서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임시정부 군무부 산하로 편입시키는 한편, 서간도의 대한청년연합회 의용대·한국독립군비단·대한독립단 등을 통합하여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을 조직하고, 주만참의부(駐滿參議府)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한편, 임시정부를 후원하기 위한 가장 큰 재정기지는 재미한인사회였고, 재미한인사회를 대표하는 기구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였다. 3.1운동 직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김규식 등 대표단에게 3,500 달러의 경비를 송금하였고, 안창호를 상해 임시정부로 파견하면서 2만 달러의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 이후 재미한인사회는 약 100만 달러에 달하는 자금을 임시정부에 지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외에도 외교 등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벌인 임시정부는 1919년 말부터 임시정부의 재정을 담당하던 연통제와 교통국이 일제에 의해 발각되기 시작하였고, 1920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에서의 승리 이후 만주지역 독립군 조직이 러시아 자유시(自由市)로 이동하면서 임시정부의 활동은 1920년 말부터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3) 임시정부 개혁을 둘러싼 국민대표회의 개최와 민족유일당 운동

통합 임시정부가 위기에 처한 것은 독립운동 방략을 둘러싼 갈등이 가장 크게 작용하였다. 임시정부는 출범 직후 이승만의 외교 활동에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외교 활동은 별다른 소득이 없고, 이승만이 미국에 대해 위임통치를 제기하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임시정부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어났다.

1921년 2월 박은식· 김창숙 등 14인이 임시정부의 무능과 분열을 비판하면서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여 새롭게 임시정부를 개혁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어 일찍이 이승만과 임시정부의 외교노선에 반대하여 북경에 자리잡은 신채호· 박용만· 신숙 등은 1921년 4월 군사통일주비회(軍事統一籌備會)를 결성하고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에 대한 불신임안을 가결하고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결정하였다. 게다가 같은 해 5월 초 만주 액목현(額穆縣)에서 평소 임시정부를 지지하던 여준· 김동삼 등 만주지역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이승만의 사임과 임시정부 개조를 요구하면서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하였다. 이에 반발한 이승만은 임시정부에 머문지 불과 6개월 만인 1921년 5월 상해를 떠나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국제적 상황과 재정문제, 국민대표회의를 둘러싼 찬반논쟁 등으로 국민대표회의는 1923년 1월 개최되었다. 상세정보 국내외 대표 140여 명이 참가한 국민대표회의는 1월 3일부터 5일 15일까지 63회에 걸친 마라톤 회의를 거듭하였다. 이 회의의 가장 주된 이슈는 임시정부를 개혁하여 독립운동세력을 강화하자는 주장(개조파)과 임시정부를 해체한 뒤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자는 주장(창조파)이었다. 그러나 개조파와 창조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을 지지하는 정부옹호파의 반발로 정부개조안마저 기각되자, 16일 개조파가 국민대표회의 탈퇴를 선언하였고, 창조파 역시 6월 3일 ‘한(韓)’이라는 국호의 독자적인 정부 수립을 결정함으로써 국민대표회의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국민대표회의 폐막 이후 임시정부는 사실상 정부로서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국민대표대회 이후 각지 대표들과 독립군 세력이 이탈한 까닭에 임시정부는 일개 독립운동단체와 다를 바 없는 형국이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자 지휘부인 임시정부를 쇄신하는 것과 임시정부 분열에 대한 책임 소재를 규명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925년 3월 임시의정원은 이승만을 탄핵하였으며, 7월에는 대통령제의 폐단을 막기 위해 개헌작업을 통해 지도체제를 내각책임제로, 내각 수반을 대통령이 아닌 ‘국무령(國務領)’으로 변경하였다. 그러나 국무령으로 선임된 인사들이 취임하지 않는 등 문제가 발생하자 1927년 다시 국무위원제라는 집단지도체제를 채택하였다. 국무위원제는 1940년 10월 주석제로 변경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임시정부는 1926년 5월 안창호의 제창으로 민족유일당운동을 전개하였다. 민족유일당운동은 중국국민당의 ‘이당치국(以黨治國)’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당을 중심으로 국가를 운영한다는 원리였다. 즉 당시 상황으로 볼 때, 독립운동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정부보다는 정당 형태가 더 낫다는 판단이었다. 1926년 10월 안창호는 러시아의 원세훈 등 북경의 좌파세력과 통합하여 대독립당북경촉성회(大獨立黨北京促成會)를 결성하였고, 1927년 3월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韓國唯一獨立黨上海促成會)가 조직되면서 좌우합작을 이루어냈다. 이를 계기로 상해·광주·무한·남경 등에서도 촉성회가 성립되자, 중국 각지의 촉성회를 연합하려는 움직임이 전개되었다. 1927년 11월 상해에서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韓國獨立黨關內促成會聯合會)’를 개최하여 유일당 결성을 위한 작업을 논의하였다. 좌우파가 다 참여한 이 모임은 각자 자신의 위상과 역할 강화, 독립운동의 노선 차이 등으로 인해 결실을 거두지 못하였다.

2019년 2월 22일, 1112호 14-1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