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8. 마지막회)

교포신문사는 3.1운동 100주년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8회에 걸쳐 특집 면을 준비한다. 이번 기획 특집에서는 먼저 3.1운동의 전반을 살펴보며, 3.1운동이 우리 민족사에 차지하고 있는 의미를 되짚어 보며, 3.1운동의 결실인 상해 임시정부의 수립과정을 심층적으로 살펴본다. -편집자 주

IV. 임시정부 수립

3·1운동은 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법을 체계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3·1운동의 경험을 통해 민족의 주체역량에 기초해야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실력양성과 무장투쟁이 독립운동의 방법으로 체계화하였다. 그리고 왕조의 회복을 목표로 한 복벽주의(復辟主義)가 청산되고 민주공화제가 독립국가의 목표로 자리를 잡았다.

 

4) 유랑생활로 버틴 임시정부의 좌우합작운동

1920년대 민족유일당운동 실패 이후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세력들은 각자의 이념과 노선에 따라 정당을 조직하였다. 1930년 1월 김구와 조소앙 등은 임시정부 정당인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다. 그러나 1931년 7월 한인과 중국인 사이의 수로(水路)문제를 둘러싼 만보산사건과 9월의 만주사변 등으로 한·중 양국민 간의 대립과 갈등이 격화되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편으로 임시정부가 선택한 것이 특무조직을 결성하여 의열투쟁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1931년 10월 임시정부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하고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중 가장 대표적 성과는 1932년 1월의 이봉창의 일왕 저격 의거와 4월의 윤봉길의 홍구공원 의거였다. 이 의거로 임시정부는 국제사회에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으나, 이 일로 인해 임시정부는 일제를 피해 13년간 머물던 상해를 떠나 유랑길에 오르게 된다. 1932년 5월 항주(杭州)로 피신한 임시정부는 진강(鎭江, 1935. 11)·장사(長沙, 1937. 11)·광주(廣州, 1938. 7)·유주(柳州, 1938. 10)·기강(綦江, 1939. 3)을 거쳐 1940년 9월 중경(重慶)에 이르기까지 8년간 장정생활(長程生活)을 하였다.

이후 임시정부를 비롯하여 한국독립군 세력도 중국 관내로 이동하였다. 관내 이동후 한국독립운동 세력은 일제의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항하기 위해 분산된 각 독립운동단체의 정당을 하나로 통합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결성된 조직이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이었다. 이 동맹은 1935년 7월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으로 발전적으로 해소되었다. 통일전선의 일환으로 결성된 민족혁명당은 만주와 중국 관내와 미주지역의 독립운동단체 뿐 아니라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단체도 참여하는 등 좌우연합 정당이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터지자, 임시정부는 8월 김구가 이끄는 한국국민당을 중심으로 민족혁명당을 탈당한 재건 한국독립당과 조선혁명당, 그리고 미주세력인 현순의 대한인국민회, 이승만의 대한인동지회(大韓人同志會) 등 6개 단체를 연합하여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일명 광복진선)을 조직하였다. 광복진선(光復陳線)은 중국과의 연합작전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정부 조직이 효율적이라는 판단 아래 임시정부 옹호를 내세웠다. 또한 1938년에는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를 조직하여 군사활동을 추진하였다.

한편, 민족혁명당은 우익세력 이탈 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당명을 변경한 뒤, 좌파세력인 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혁명자연맹·조선청년전위동맹 등을 규합하여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였다. 조선민족전선연맹은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를 결성하였다. 이는 우익세력과 마찬가지로 중국군과의 연합작전을 통한 대일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러나 중국 국민당 정부의 강력한 권유로 1939년 8월 중국 사천성 기강에서 다시 좌우합작을 위해 한국혁명운동통일7단체회의(이른바 7당회의)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통일방식을 둘러싼 이견으로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조선청년전위동맹이 이탈하고 남은 5개 정당이 통일회의를 개최한 결과, 9월 전국연합진선협회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김원봉이 이끄는 민족혁명당이 탈퇴하자, 임시정부는 1940년 5월 우파세력인 한국국민당, 재건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3당을 합당하여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임시정부의 단일정당으로 만들었다.

 

5) 한국 광복군 창설과 국내진공작전 수립

임시정부는 중경에 안착한 후인 1940년 9월, 정식 국군인 한국광복군을 창설하는 한편, 10월에는 집단지도체제였던 국무위원제에서 1인지도체제인 주석제로 제도를 정비함으로써 당·정·군 체제를 완성하였다.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습격하자, 이틀 후인 10일 일본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는 임시정부가 연합국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여함으로써 후일 연합국의 지위를 인정받기 위한 것이었다.

그후 1942년 김원봉이 임시정부에 합류함으로써 임시정부는 다시 좌우합작정부로 탄생하였다. 5월 김원봉이 한국광복군 부사령으로 임명되고, 7월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됨으로써 좌우합작이 성사되었다.

3지대로 구성된 광복군의 주요 목표는 연합군과 공동으로 대일항전을 전개하는 것과 국내진공작전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1943년 8월 광복군은 공동작전의 일환으로 영국군과 인도와 버마 전선에 공작대를 파견하였다. 1945년에는 광복군 선발 요원들이 국내진공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미국 전략첩보기구인 OSS에서 3개월간 군사훈련을 받고 국내침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제가 항복하기 불과 5일 전인 8월 10일, 임시정부는 OSS와 국내진공작전인 ‘ 독수리작전’을 추진하였다. 김구 주석은 8월 4일 제1기생이 특수훈련을 마치자 광복군 총사령 이청천과 함께 서안으로 가 OSS 책임자인 도노반 소장과 함께 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켜 일제의 주요 시설을 파괴하고 점령한다는 작전을 실행하기로 결정하였다. 바로 이때 일제의 항복소식이 전해지자, 김구는 바로 광복군 제2지대 본부로 달려가 이범석 장군과 협의해 광복군 대원 중 선발요원을 정진대(挺進隊)로 편성하여 국내로 파견하기로 하였다. 이에 대해 OSS도 동의하였다. 이범석·김준엽· 장준하 등은 미군 비행기 C-47편으로 8월 18일 여의도비행장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이들을 포위하고 입국을 허락하지 않는 까닭에 부득이 다시 중국 서안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8월 18일 임시정부는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하고 환국을 결정하였다. 이어 9월 3일에는 정부 형태로 환국한 뒤, 국내 각계 대표들로 구성된 회의를 소집하여 과도정권을 수립하고 임시정부의 모든 것을 과도정권에 인계한다는 당면정책을 발표하였다. 이외에도 임시정부는 중국내 한인들의 보호와 귀국을 돕기 위해 한교선무단(韓僑宣撫團)을 조직하는 한편, 귀국 후 수립될 정부의 건군(建軍) 기초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한교선무단은 10월부터 중국 각지에 파견되어 한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한편, 동남아 지역은 중국 외교부에 부탁하여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한교선무단은 임시정부 환국 직전, 주화대표단(駐華代表團)으로 개편되어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까지 주중대사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6) 환국과 통일정부 수립 노력

이러한 준비 끝에 임시정부는 환국하였다. 해방된 지 석 달 만이었다. 임시정부는 정부 차원의 환국 방침을 결정한 바 있었지만, 중국과 미국의 협조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에 대해 중국은 적극 지원하며 각종 편의를 제공해주었으나, 미국은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았던 까닭에 정부가 아닌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것을 통보하였다. 이에 대해 임시정부 내에서 찬반논란이 있었으나 부득이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임시정부는 환국 직후 정치공작대와 행정연구위원회를 조직하여 내무부 산하에 두었다. 당시 내무부장은 신익희였다. 정치공작대는 임시정부 조직망 확대와 국민적 기반 확보를 목적으로 활동하였고, 행정연구위원회는 향후 수립될 정부 수립에 필요한 행정을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1946년 2월 정치공작대 조직은 면 단위까지 조직을 완료하여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되었다. 한편, 12월 28일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한국에 대해 신탁통치를 결의하였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임시정부는 즉각 국무회의를 소집하고 신탁통치 반대를 결의하였다. 이어 4개국 원수(元首)에게 보내는 결의문을 채택하여 발송하는 한편, 정당·종교·언론 등 각 단체 대표들과 비상대책회의를 개최하고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설치하고 반탁투쟁을 주도하였다.

이 원칙에 따라 정치공작대와 행정연구위원회는 반탁시위운동을 준비하는 한편, 12월 31일 내무부장 명의로 포고문 「국자1호」와 「국자2호」를 발표하여 사실상 정부로서 역할을 수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포고문을 본 미군정은 임시정부가 미군정의 정권을 빼앗으려는 ‘임시정부의 쿠데타’로 규정하고 신익희를 체포하여 신문하였다. 이를 계기로 임시정부는 미군정의 감시와 견제를 받게 되는 한편, 더 이상 정부로서 활동할 수 없게 되었다.

환국 직전 임시정부는 과도정권 수립을 결의한 바 있었다. 그리하여 1946년 2월 과도정권 수립을 위해 각계 인사 195명을 규합하여 비상국민회의를 조직하였다. 비상국민회의는 과도정권 수립을 위해 좌우합작을 추진하였으나 실패하자, 결국 대한독립촉성국민회와 민족통일본부와 통합을 추진하여 1947년 2월 국민의회를 결성하였다. 국민의회는 1947년 3월 과도정권을 수립하고 주석에 이승만, 부주석에 김구를 추대하고 국무위원을 선출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이 과도정권에 불참한 데다가 과도정권의 존재마저 무시하는 바람에 국민의회는 9월 대한국민회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대한국민회 역시 이승만이 주석직을 거부하는 바람에 그 역할을 정상적으로 수행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 1947년 들어 미국과 소련의 대립으로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한국문제는 유엔으로 넘어갔다. 유엔은 한국에서 총선거를 실시해 통일정부를 수립하면 미군과 소련군이 철수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총선거 실시와 정부 수립을 감독하기 위해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파견하였다.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은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였고, 김구와 김규식 등 임시정부 세력은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유엔위원단은 1948년 2월 임무수행이 가능한 지역인 남한에서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 결정에 대해 임시정부 요인들은 남한의 단독선거 불참을 선언하고 북한에 남북지도자회담을 제의하였다.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에 참가한 김구·김규식 등은 통일된 민주정부 수립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이 합의는 남과 북 어느 곳에서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1948년 5월 10일 남한은 유엔위원단의 감시하에 총선거를 실시하고,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었다.

2019년 3월 1일, 1113호 14-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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