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속의 한국 문화재 (10)
라이프치히그라시민속박물관 한국문화재 ③

그라시민속박물관에는 3000 여 점의 한국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다.
라이프치히 그라시민속박물관(GRASSI Museum für Völkerkunde zu Leipzig)은 독일 작센 주 라이프치히 시내에 있다. 라이프치히는 천년의 전통이 있는 동부 독일의 대도시이며, 교육·문화의 도시로도 유명하다. 근대시기의 산업 발전으로 도시(라이프치히)가 부유해지면서 문화적으로도 윤택해졌고, 이러한 산업과 문화기반이 현재의 라이프치히를 형성했다고 볼 수 있다.
라이프치히 그라시민속박물관은 경제·문화적으로 윤택했던 19세기 후반 라이프치히의 자본가들이 세계의 민속문화를 수집하기 위해 1869년에 만든 박물관이다. 이들은 세계 각지에 나가있는 독일 외교관이나 상인을 통하여 외국의 민속·문화자료를 수집했고, 이 자료들이 라이프치히그라시민속박물관 소장품의 토대를 이루었다. 또한, 이러한 수집과정 속에서 현재 소장하고 있는 대부분의 한국 문화재도 수집된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 보관 중인 우리나라 문화재는 다양한 분야에 걸쳐 3000점에 달한다. 대부분 19세기쯤 우리나라를 드나들었던 외교관, 상인 등이 수집한 근대기 유물이다.
또한 동독시절 북한에서 기증받은 민속유물도 있다. 박물관은 한국문화재를 소장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소규모 상설전시로 지속적인 소개를 하고 있다.

묄렌도르프 소장품

그라시 박물관의 한국 컬렉션

Paul Georg von Möllendorff

한반도에 관해 그라시박물관이 소장한 가장 오래된 컬렉션은 폰 묄렌도르프 소장품이다. 이는 또한 독일의 박물관을 위해 조성된 한국 컬렉션 중 가장 오래되고 체계적으로 수집된 것이기도 하다.

파울 게오르그 폰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öllendorff는 청나라의 재상이자 직예지역을 통치하던 리홍장의 고문이었으나 1882년 말 조선 조정에 고종의 고문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조선이 서구와의 통상을 위해 문호를 개방하고 이에 필요한 조약을 만들어내는 데 고종을 보좌하기위해서 파견되었다.

폰 묄렌도르프가 서울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박물관의 이사진들과 연락이 닿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연락이 어떻게 이루어졌고 라이프치히 민속박물관을 위해서 왜 폰 묄렌도르프가 유물을 수집하게 되었는지를 증빙해주는 기록물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그 이듬해 8월 15일 그는 5개의 운송 상자에 첫 번째 민속유물들을 상해를 거쳐 박물관으로 보냈다.

박물관의 첫 번째 관장이자 라이프치히 민속박물관회의 부회장이었던 헤르만 옵스트(Herman Obst)는 이 컬렉션의 의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폰 묄렌도르프의 기증품에 대해서 다른 것과 더불어 이렇게 평을 하였다.

“이는 오로지 한국의 물품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한국의 고립된 상황으로 인하여 여태까지 유럽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거나 아주 드물게만 볼 수 있었던 것들이다.” 이에 덧붙여 그는 “… 이(컬렉션)는 이 나라와 이 사람들에 대해서 가능한 한 포괄적으로 이해를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고 평하였다.

보관된 편지들 중 하나에서 폰 묄렌도르프는 물건의 선택과 습득에 박물관이 보내준 “수집계획표”를 사용하였다고 언급한다. 같은 편지에서 그는 박물관을 위한 수집을 계속해서 하고 싶은 의향을 표현하고 곧 추가로 수집품을 보낼 예정임을 밝힌다. 실제로 두 번째 묶음의 소장품들은 1884년에 라이프치히 민속박물관에 도착하였다.

285건의 유물을 기증한 폰 묄렌도르프의 주된 목적은 그 당시 아시아의 동쪽 끝에 있으면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국가에 대해서 알리고 싶었던 것이었으며 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과 기술에 대한 사실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소장품을 보면 폰 묄렌도르프는 독일인 관람객이 보고 자신의 일상생활에 비추어보아 익숙할만한 문화적인 물품들을 선정하여 구성하였다. 익숙한 물건에 상응하는 물건들을 조합함으로써 그는 한국인의 문화가 다른 형태를 띨 수는 있으나 서구의 것보다 원시적이거나 수준이 낮은 것이 아님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19세기에 박물관이 주로 따랐던 수집 요건은 세계의 다른 사람들에 대한 복합적인 모습을 관람객에게 보여주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이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목표는 관람객에게 서로의 차이를 강조하기 보다는 자신의 문화에 있는 익숙한 사물이나 현상과 비교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였다.

폰 묄렌도르프의 컬렉션 역시 한국인들의 일상생활 속에서의 물건을 선택하였고 이는 적어도 한국에서 지낸 지 갓 6개월 된 폰 묄렌도르프가 생각하기에 일상적이라고 생각한 물건들이었다. 그러나 아직 민속학의 초창기였던 19세기의 80년대라는 시기에 비추어 보아 그의 컬렉션은 매우 급진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1885년 가을, 자주국가로서의 조선의 독립성을 어떤 방식으로 보존할 것인지에 대한 내부적인 정치 갈등으로 말미암아 폰 묄렌도르프는 조선 조정에서의 직책에서 해제되어 중국으로 돌아가게 됐다.

같은 해 박물관은 작은 규모의 한국 물품들을 받았다. 주로 복식과 무기, 그리고 악기가 하나 포함된 컬렉션으로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J. H. 랑엘뤼톄(J. H. Langelütje)라는 사업가로부터 받은 기증품들이었다. 기증품과 함께 박물관에 도착한 편지에 의하면 랑엘뤼톄가 직접 한국에 여행을 한 것이 아님은 명백했지만 그는 자신이 어떠한 경로로 이러한 수집품을 모으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장 타당한 추론으로는 그가 블라디보스톡에 있는 한국인들에게서 직접 이러한 물건들을 샀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물건들은 1860년대에 시베리아 동남쪽으로 이주해 간 한국 이주민들의 증가에 대한 증거물이 될 수 있다.

1184호 30면, 2020년 8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