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소녀상, 못다한 이야기 (3)
집회를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은 단 이틀뿐이었다. 집회 전엔 기자회견도 하기로 했다. 소녀상은 단순히 반일이 아니라 인류가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여성에 대한 범죄를 상징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매우 신중하게 기획했다. 지난 30년간 우리와 함께 해온 <베를린 일본여성모임>, <야지디족 베를린 여성협의회>, 독일 성폭력피해자 보호 인권단체 <메디카 몬디알레>를 섭외했다. KV의 한정화 대표를 포함하여 다양한 단체의 여성 4명이 나란히 회견장에 앉아 있으니 마음이 든든했다.
기자회견 후 소녀상 앞에는 기자들을 비롯, 300여 명의 인파가 몰려와 있었고 우리는 다 함께 주택가를 지나 구청까지 소란스럽게 가두행진을 했다. 닷새 만에 1만 2000명이 서명한 성명서를 구청장에게 전달하겠노라고 그 전날 비서에게 통보해 놓았지만 구청장이 직접 내려와 우릴 기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시민들이 구청장에게 야유를 보내면서 집회는 해산되었다. 나중에 한 기자에게 들은 바로는 구청장은 그날 우리가 보여준 엄청난 파급력에 깜짝 놀랐다고 했다.
구청장은 일본 측과 함께 소녀상 관련 합의를 보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2주 후 구청장과 KV팀은 각각 변호사를 대동하고 소녀상 비문을 수정하기 위해 만났다. 일본 정부처럼 구청장이 비문에 쓰인 “성노예”란 단어에 대해 문제제기 했을 때, 2007년 유럽의회에서 통과된 결의안에 이미 “성노예”라는 개념이 공식적으로 사용된 것을 보여주자 그는 난감해했다. (유럽의회 결의안은 27개 국어로 번역되었다. 뜻밖의 순간에 효력을 발휘한 결의안이 새삼 뿌듯했다.)
구청장은 서슬이 시퍼런 한정화 대표에게 잘 보이고 싶었는지 대화 사이사이에, 소녀상 관련 항의메일이 전세계에서 빗발치고 있는데, 곧 북극에서도 메일이 올 것 같다는 둥, 심지어 KV가 트럼프 선거캠프에서 활약해주면, 트럼프가 대통령 선거에게 이길 거라는 둥 썰렁한 독일식 농담을 날렸다. 그 후 구청장은 새로운 비문 내용을 몇 차례 수정해서 일본정부에 제안했지만, 일본 측은 수정된 비문에 대해서는 아랑곳 않고 집요하게 소녀상만 치워달라고 하여, 구청장도 일본대사관에 실망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10월부터 11월 사이에만 열 차례가 넘는 작은음악회와 집회가 열렸다. 동포들이 조직한 소녀상 앞 음악회에는 단골 청중이 생기기도 했다. 소녀상에 대한 지역주민들의 애착도 컸다. 하루는 이른 아침에 전화가 걸려 왔다. 소녀상 앞에 큰 트럭이 섰는데 소녀상을 싣고 갈 모양이니 빨리 와보라는 것이다. 정신없이 달려갔더니 대형 트럭은 그냥 주차중일 뿐이었다. 기념비를 세우고 지키는 데는 지역주민이 가장 중요하다는 미테구 공무원의 말이 떠올랐다.
소녀상 철거를 막아준 것은 행정법원 소송, 서명운동, 전세계인들의 청원서, 시위, 주민들의 애틋한 정성이었지만, 실질적인 역할은 미테구 의회에 속한 정당들의 몫이었다. 철거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의회를 구성하고 있는 다수당인 3개 당이 각각 우리에게 연락을 취해 도움을 주겠노라고 했다. 좌파당이 제일 먼저 달려왔는데, 소수당인 본인들이 앞서면 다른 당이 반대할 수 있으니 조금 기다려 보자고 했다.
그 후 사민당이 소녀상 철거 반대 성명서를 먼저 냈고, 다음으로 구청장이 소속된 녹색당이 내자, 좌파당도 그 즉시 홈페이지를 통해 반대의 목소리를 냈다. 구의회는 정부 차원의 국회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에 의회의 결의안 채택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11월 5일 열린 지역의회에서, 해적당이 낸 소녀상 안건이 찬성 27표 반대 9표로 가결되었다. 예정대로 1년간 그 자리에 존치되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역시 이 날 제출된 좌파당과 녹색당의 ‘소녀상 영구존치 결의안’은 시간 관계상 다뤄지지 못해 한 달 뒤인 12월 1일로 미뤄졌다.
이 한 달간 독일 언론에서는 소녀상 관련 기사, 전시 및 일상적 여성 성폭력 문제를 주제로 한 기사들이 쏟아졌고 이는 독일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같은 날인 11월 5일, 일본 나고야(市)시의 시장이 미테구청장에게 “(소녀상은) 예술작품이 아니라 정치적 주장을 표현하고 있어 이대로 두면 일•독 우호 관계에 큰 손해가 된다”는 편지를 보냈다는 보도가 나왔다. 다음 지역의회 때 ‘소녀상 영구 존치 안건’을 통과시키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결집된 힘을 다시 한 번 보여줄 때였다.
11월 25일은 마침 세계 여성 폭력 추방의 날, 다른 여성인권단체들과 함께 대규모 집회를 기획했다. 바로 젠다멘광장(Gendarmenmarkt)에 무대와 함께 400개의 의자를 설치하기로 한 것이다. 집회 참가자들 옆 빈 의자는 소녀상의 의자를 연상시킴과 동시에 코로나로 인한 간격 유지 방역수칙도 지킬 수 있는 묘안이었다. KV가 창립된 이후 가장 큰 시위였고, 제일 많은 비용이 든 시위였다. 전세계 시민들이 상당한 금액을 모금해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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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소녀상 정보: www.trostfrauen.de
1254호 17면, 2022년 2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