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포신문 문화사업단의 문화이야기(79)

미술관 밖의 미술, 공공미술

길을 가다 무심코 지나치는 구조물들, 최근 지은 빌딩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그림이나 조각들, 지하철역이나 골목길 등에서 우리 눈을 밝게 해주는 벽화들과 같이 오늘날 도시는 시민들에게 휴식공간과 심적 풍요로움을 선사하고 있다.

이렇듯 미술관이 아니라 우리 주변 공공 장소에서 만나는 미술작품들이 바로 공공미술(Kunst im Öffentlichen Raum)이다.

“문화사업단의 문화이야기”에서는 ‘공공미술’을 주제로 공공미술이 무엇이며,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또 어떤 역할과 기능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한다.

공공미술이란

공공미술은 일반인들이 자주 이용하고 접근하기 쉬운 공공장소인 건물, 공원, 광장, 가로, 도로, 등에 조성된 미술작품을 말하는 바, 집 주변 공원을 산책하다 마주치는 동상이나 작은 설치물뿐만 아니라, 프랑크푸르트 메세 건물 앞의 ‘Hammering Man’과 같이 특별한 건물과 연관된 조형물도 모두 공공미술 작품인 것이다.

이렇듯 공공미술은 미술관이나 화랑 같은 제도화된 공간에서만 유통되는 미술을 일상생활 공간으로 들여오기 위한 노력에서 비롯된 것으로 오늘날 비인간적인 도시환경에 대한 문화적 치유와 지속가능한 도시 형성의 주요한 방법으로 인식되고 있다.

공공미술의 정의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공공미술은 그동안 구축해 왔던 미술관의 권위에 대한 반발, 즉 ‘탈미술관’의 문맥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공공미술은 미술관을 뛰쳐나온 미술이자 기존의 전시장 미술에 대한 반작용이라 하겠다. 그것은 전통 미술계의 순수주의, 엘리트주의, 형식주의를 공격 대상으로 삼고 있다. 미술 밖의 세계(대중, 일상, 사회 등)와 단절된 미술, 혹은 가부장적 권위로 가득 차 있는 미술제도(창작과 수용의 위계)에 대한 반성에 기초하고 있다.

여기에서 공공미술은 작품 설치 장소가 공공적일 뿐만 아니라 작품 자체가 공공적인 목표로 제작하는 것으로까지 발전하고 있다. 따라서 공공미술은 공공장소를 단순히 물리적 장소로 보지 않고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역사적 소통의 공간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장소 개념보다는 대중과 환경, 공간의 공공성으로 시각을 넓히고 있기에, 그 키워드는 ‘공동체’라 할 수가 있다.

탈미술관의 문맥에서 보면, 공공미술은 하나의 새로운 운동으로 파악하는 일도 가능하다. 그렇게 되면, 공공미술은 반드시 항구적일 필요가 없고, 일시적인 옥외 작품도, 한번 지나치는 퍼포먼스도, 포스터나 전광판의 메시지도, 나아가 웹상에서의 표현조차 공공미술에 포함될 수 있다.

공공미술은 미국의 뉴딜시대에 태동한 개념이다. 1930년대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미 정부가 실직 예술가들을 고용해 공공장소를 디자인하게 한데서 공공미술이라는 개념이 생겨났다. 이후 공공미술은 건물을 장식하는 디자인의 일종으로, 도시개발 프로젝트에서 도시의 미관을 조성하는 한 분야로 발전했다.

공공미술의 기능

오늘날 공공미술의 기능이 확장되고 있다. 공공미술은 이전까지의 작가, 설치자 등 소수 생산(창작) 중심의 독재 권위주의에서 벗어나 보는 사람, 공간, 환경 등 다수 수용(감상) 중심의 참여민주주의로 역할을 옮겨가고 있다.

공공미술의 기능 또한 단순한 장식 효과를 넘어서 ‘다기능적’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창작의 목표를 공동체의 사용자, 수용자에게 두고 미술의 쓰임새를 사람과 공간의 정서를 어루만지는 기능으로 확장한다. 여기에서 공공미술은 스스로 사회에 ‘참여’하고 ‘개입’한다. 공공미술은 미술작품을 단순한 미적 대상으로서 보지 않고, 미술을 사회적 발언과 비전 제시의 적극적인 표현매체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공공미술은 삶의 공간에 창의적으로 개입하고 관람객과의 소통과 참여를 유도한다.

그런데 ‘미술관 안의 미술’이 아닌 ‘미술관 밖의 미술’인 공공미술은 예술성과 사회적 공익성을 모두 만족시켜야 한다는 데 딜레마가 있다. 예술성에 경도되면 자칫 사회적 공익성에 충실하지 못할 우려가 있고 사회적 공익성에 초점을 맞추면 예술성이 훼손되기 때문이다. 이 둘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가 문제인데 예술과 삶을 유기적으로 연결시켜야 조화의 빛이 발하며 공공미술의 가치도 결정된다.

그렇다면 예술과 삶을 유기적으로 연결시켰느냐 연결시키지 못했느냐는 어떻게 증명할까? 가장 손쉬운 방법은 시민들의 참여 정도로 파악하는 것이다. 시민들이 작품에 참여하고 그것을 ‘사용’할 때 비로소 공공미술은 완성된다.

가령 작가가 길거리에 의자를 작품으로 내놓았다고 하자. ‘관객’인 시민들이 그 작품을 눈으로만 보는 데 그치지 않고 손으로 만지고, 직접 앉아볼 때 공공미술로서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공공미술을 화룡점정하는 주체는 작가가 아닌 시민인 셈이다. ‘예술작품이니 만지지 마시오’ ‘앉지 마시오’와 같은 문구가 달려 있는 작품은 공공미술이 될 수 없다. 그런 문구를 써붙인 미술작품은 공공장소보다는 미술관 안에 전시되는 것이 적합하다.

왜 공공미술인가

도시가 체제를 선전하고 개발을 자랑하는 시대는 지났다. 오늘날 도시는 시민들에게 충분한 휴식공간을 제공하고 심적으로 풍요로움을 선사해야 한다. 갈수록 개인주의에 함몰되는 시민들에게 소통의 장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공공미술의 역할과 존재 의의는 바로 여기에 있다.

공공미술이란 공공성을 띄는 미술이다. 거리, 공원, 광장 등 대중이 함께 이용하는 공간을 꾸미는 것을 이르기도 하고 마을이나 직장 등 공동체를 이루는 구성원들이 모여 지역문화를 담은 디자인을 하는 것 역시 공공미술의 일종이다. 공공미술의 개념 정의는 아직도 이견이 분분하지만 지향점은 미술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주체들의 삶과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1254호 23면, 2022년 2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