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독동포사회에도 큰 족적 남겨
독일 유도계의 대부로서 ‘타이거 한‘으로 잘 알려진 한호산 전 독일유도국가대표 감독이 지난 8월 14일 향년 87세로 별세하였다.
파독광부 1진이 독일 도착하기도 전인 1963년 8월 니더작센 유도협회 선수이자 감독으로 독일에 오게 된 고 한호산 감독은 지난 63년의 독일생활은 바로 독일한인사회의 역사이기도 하다.
교포신문사는 고인을 추모하며, 고 한호산 감독의 발자취를 돌아본다. – 편집자주
독일 체육회가 선정한 7대 명감독, 고(故) 한호산 감독
1963년 니더작센 유도협회 선수이자 감독으로 시작된 그의 독일 생활은 1965년부터 2001년 정년퇴임까지 36년을 독일 유도국가대표 감독을 지냈고, 은퇴 후에는 유도기술 및 지도자 세미나를 열며 유도 보급에 힘을 더했다.
2001년 뮌헨에서 열린 세계 유도선수권대회에서 한호산감독의 36년 독일유도 대표팀 감독의 은퇴식이 거행되었다. 은퇴식에는 독일 정치계 인사는 물론 체육계의 인사들 그리고 자크 로케 IOC위원장, 토마스바흐 현 IOC위원장을 비롯한 유럽의 많은 인사들이 참가하여 한감독의 은퇴식을 지켜보았다.

이 자리에서 독일유도연맹으로부터 독일에서 유일한 9단을 수여받았고, 독일 체육회가 선정한 7대 명감독에 올라 독일 축구영웅 베켄 바우어 감독과 함께 독일 명예감독으로 추대되는 영광을 누렸다.
독일로 오기까지
1960년 장충체육관에서 제1회 대통령기 전국유도대회 겸 재일교포 환영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는 국내 선수들뿐만 아니라,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교포들도 대거 참가하여 명실상부한 최고의 대회로 인정되어, 대회 시작 전부터 유도인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큰 주목을 받고 있었다.

대회전 유도관계자들은 일본에서 큰 활약을 펼치고 있는 김이태, 김덕영 두 재일교포 선수에게 관심을 집중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한호산감독의 우승이었다. 더욱이 당시 모든 유도 대회는 체급별 대회가 아니라, 체중에 관계없이 모든 참가선수들이 시합을 벌이는 방식으로, 말 그대로 참가 선수 전원 가운데 최강자를 가리는 대회로 진행되어, 한감독의 우승은 매스컴에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었다.
이어 1961년 파리에서 열린 세계선수권 대회에 김이태, 김덕영 선수와 함께 한국 대표로 출전, 세계 강호들과 겨뤘다. 각국에서 3명의 선수가 참가하여 시합을 치렀는데, 이 대회 운영 역시 단일 체급 대회였다.
대회결과는 네덜란드 선수가 우승하였고, 김이태 선수가 4위, 한감독은 5위, 그리고 김덕영 선수가 7위에 올랐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한국의 쾌거였다. 당시 국제 유도계는 한국대표팀의 성적에 놀라움을 표하며, “ 네덜란드가 우승을 하였지만 유도의 미래는 한국에 있다” 며 우리가 거둔 성적을 경이롭게 바라보았다.
한감독은 1964년 일본 동경에서 개최될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고, 세계 최고 유도선수로 등극하는 것만을 목표로 하고, 여러 스카우트제의에 일절 응하지 않았다. 올림픽만을 바라보며 오로지 유도에만 전념하며 하루하루 구슬땀을 흘리며 훈련에만 매진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유도협회 관계자로부터 서독 유도계로부터 “한호산“이라는 이름을 명시해서 특별 초청장이 왔다며, 독일에서 지도자 생활을 할 것을 적극 권하였다. 유도협회 관계자뿐만 아니라, 대한체육회에서도 국위선양 할 좋은 기회라며 단순한 권유가 아니라, 강권, 이러한 여러 단체의 권유로 고민을 거듭한 끝에, 한호산 감독은 독일행을 결심하고 1963년 8월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에 몸을 싣게 되었다.
독일 유도 국가대표 감독으로의 36년
1963년 니더작센 유도협회 선수이자 감독으로 시작된 그의 독일 생활은 1965년부터 2001년 정년퇴임까지 36년을 독일 유도국가대표 감독을 지냈고, 은퇴 후에는 유도기술 및 지도자 세미나를 열며 유도 보급에 힘을 더했다.
수지도를 시작한 초청 첫해인 1963년 서독선수권대회에서 니더작센주 선수 5명이 메달을 따는 쾌거를 이룩하였다. 독일선수권대회에서 메달을 딴 5명 중 2명이 동경올림픽 출전 독일 대표선수로 선발되면서 지도자로서의 한호산의 명성도 서독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다. 한감독은 동경올림픽에 참가하는 독일(당시 동, 서독이 평가전을 거쳐 독일 단일팀으로 참가)유도 국가 대표팀의 지도자의 일원이 되었다.
1964년 동경올림픽에서 독일 유도팀은 미들급에서 호프만이 은메달을, 헤비급에서 그란이 동메달을 따내는, 독일 유도 역사상 최대의 성과를 내었다. 이들의 장거로 한호산 감독은 일약 세계적인 지도자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동경올림픽 참가 선수들의 프랑크푸르트로 귀환 할 당시,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부터 “한호산”이 연호되었고, 하노버 시에서는 유도팀을 오픈카에 태워 시내 카퍼레이드를 벌여주었다. 한호산 감독이 서독에 온지 1년만에 독일 유도계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 유명인사가 된 것이다.
한호산감독은 1965년 4월 독일체육회와 정식으로 유도 국가대표팀 감독직 계약을 하고, 서독 최초의 유도 전임국가대표팀 감독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2001년까지 36년간 대표팀 감독을 하리라고는 한감독 스스로도 전혀 생각하지 못하였다.
한호산감독에게 가장 감격스러웠던 순간은 1967년 유럽선수권 대회의 종합우승이다. 국가대표 감독직을 맡고 얼마 되지 않아 당당히 종합우승을 일구어 낸 것이었다. 서독 정부도 이를 높이 인정하여 그해 체육계 최고의 영광인 “Silbernes Lorbeerblatt” 상을 한호산 감독에게 수여하였다.
1969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일본에 이어 단체전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세계 선수권대회에서의 준우승은 당시 독일 유도계분만 아니라 체육계 전체의 큰 경사였으며, 독일 제1TV 방송인 ARD의 “Sportschau”에도 한호산 감독이 출연하였으며, 서독 유력 주간지인 “Spiegel” 에서도 “Tiger Han”이라는 제목으로 한감독에 대해 전면 기사를 싣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1984년 LA올림픽,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Frank Wieneke 선수가 연속해서 금메달을 목에 거는 감격도 경험하였다.
통독 후 처녀 출전한 1991년 세계유도선수권대회(7월·바르셀로나)에서 독일이 종합준우승(금3·동2)을 차지하자 독일매스컴들은 앞 다퉈 이 사실을 체육면 톱으로 보도하였다.
한호산감독은 1965년부터 2001년까지 36년간 독일 유도 국가대표 감독직을 수행하였다. 그 시기 올림픽과 유럽선수권, 국제대회 등을 통해 56개의 금메달을 포함, 200개가 넘는 메달을 독일에 안겨주었다.
한국과 독일의 스포츠 교류에도 헌신하다
고 한호산 감독은 1964년 동경올림픽을 시작으로 2000년 시드니 올림픽까지 매번 독일유도 대표팀 감독으로 참가를 하였는데 단 한번만 대표팀 감독으로 참가하지 못하였다. 바로 1988년 서울 올림픽이다.
독일올림픽위원회(NOC)은 서울올림픽을 준비하면서 한호산감독에게 독일 NOC에서 일해 줄 것을 부탁해 왔다. 한국 사정을 잘 알 것이기에 올림픽 준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전체 선수단 관리를 함께 할 것을 제안하였다.
한감독은 한국을 떠난 지 25년 만에 독일 올림픽 선수단과 함께 귀국하여, 한독체육계 교류에 이바지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두 번 생각하지 않고 바로 수락하였다. 이 당시 독일 올림픽 선수단 대변인으로 활약한 이가 현재 국제올림위원회(IOC) 토마스 바흐 위원장이다.
서울올림픽이 진행되는 동안, 조그만 어려움만 생겨도, 모두들 “한호산”을 찾았다. 한감독은 소속인 독일팀을 위해, 그리고 조국 한국을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며, 두 국가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고 한호산감독은 독일유도 대표팀 감독으로서도 평소부터 한국과 독일의 스포츠 교류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한국 유도지도자들의 유럽 진출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선수들의 교류에도 정성을 쏟았다.
일본이 유도의 종주국이라는 이유로 다른 유럽국가들이 일본으로 훈련을 떠날 때도, 한감독은 선수들을 이끌고 매해 한국에서 개최되는 국제대회에 참가 한-독 양국 선수들의 친목을 도모하였고, 이를 통해 양국 유도계의 보다 깊이 있는 교류로 발전시켜 나갔다.
또한 오랜 기간 대표팀 감독으로 재임하면서 한호산 감독은 독일은 물론 스웨덴 핀란드 노르웨이 네덜란드 등지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들과도 깊은 친분을 맺게 되었다. 이것을 바탕으로 한호산감독은 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원회 홍보대사로 활동하며 막판 득표활동에 큰 역할을 할 수가 있었다.
재독도포사회에도 큰 족적 남겨
고 한호산감독은 독일 동포사회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며, 한인사회 주춧돌과도 같은 역할을 하였으며, 한인사회 대소사와 경조사에도 늘 함께 하며 한인사회의 기둥과도 같은 역할을 하였다..
특히 (구)재독대한체육회의 설립과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다.
(구)재독대한체육회는 1971년 8월 15일, 오버하우젠의 지역 한인회가 주관한 제1회 재독한인체육대회가 열리면서 결성되었는데, 이후 재독 한인들끼리의 체육 활동 범위를 벗어나서 한국에서 열리는 제 56회 전국체육대회까지 참가하는 등 그 활동 범위를 넓혀갔다.
1975년까지 대한체육회 지부가 아닌 이유로 한국의 전국체전에 옵저버 자격으로 참가한 뒤. 1976년 본 인근 Siegburg에서 재독대한체육회 창립총회를 개최, 고 한호산 감독을 초대회장으로 선출하였다. 이후 고인의 노력으로, 1976년 7월 3일 재독한체육회는 재일본, 재미국에 이어 세 번째 대한체육회 해외지부로 인준 받는 쾌거를 이루었다. 고인은 2대 회장으로 연임하며, 4년간의 회장 임기동안 (구)재독대한체육회의 든든한 기틀을 다졌다.
고 한호산 감독은 1961년 대한민국체육상을 수상하고, 1999년에는 대한민국 국민훈장을, 2004년에는 독일정부로부터 민간인 최고 훈장인 ‘1등 십자공로훈장’을 받았다.
고 한호산 감독님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합니다.
1471호 14면, 2026년 8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