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독간호사의 대부 이수길 박사 별세

1960년대 간호사 파독의 물꼬를 튼 이수길 박사가 1월 13일 오전 2시 독일 마인츠 자택에서 별세했다.
교포신문에서는 파독 간호사의 대부 이수길 박사가 살아온 길을 살펴보며 고인을 추모하는 특별 지면을 제작한다. -편집자 주

파독간호사가 처음으로 독일 땅을 밟은 것은 1966년 1월 31일. 이른바 제 1차 파독간호사 128명이 그들이다. 이들이 온 해를 시작으로 ‘동양에서 온 백의의 천사“ 한국간호사들이 독일사회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파독간호사의 역사에서 빼어놓을 수 없는 인물 한 사람을 든다면 모두들 주저 없이 이수길 박사를 손꼽을 것이다. 아무도 시작하지 않은 길, 공관에서조차 개인 일로 치부하며 협조를 제공하지 않았던 1965년 당시 신념하나로 독일 관계기관을 찾아다니며 결국 모든 난관을 이겨내고 1966년 1월 31일 제 1차 파독간호사 128명과 함께 프랑크푸르트에 내린 이수길 박사의 삶은 신념과 끊임없는 노력의 길이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한 이수길 박사

이수길 박사는 19828년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났다.

세살 때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하게 되고 이를 통해 어린 시절 이수길 박사는 많은 고통을 감내하여야 했다. 고통이 심해 학교를 가지 못했던 일, 이를 극복하느라 집에서 홀로 공부하여 끝내 3개 학년을 월반하여 동료들과 보조를 맞추었고 이후 원산의전에 입학하여 평생을 몸 바친 천직인 의학도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1950년 6월 28일 원산의전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의학과 펠셀(조수의)의 자격을 획득하였다.

6.25의 와중에는 남한으로 피난을 나와 부산과 여수에서 생활하며 당시 어려운 환경에도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1953년 의사고시에 합격하여 정식의사로서 활동하게 된다.

이후 1955년 서울에서 ‘이수길 의원’을 개업하고 더불어 동아일보, 한국일보, 예원지에 의학상담을 담당하여 젊은 명사로 이름을 날렸으며 당시 한국의 명사첩에 당당히 사진과 함께 이름이 실리기도 하였다. 이수길 박사가 한국에서 계속 생활하였다면 아마도 의학계와 사회부분에 큰 인물이 되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이렇듯 의사의 길과 사회의 명성이 보장된 당시 이 박사는 보다 깊은 의학연구를 하기위해 유학을 결심하게 된다.

그러나 유학의 길에도 어려움은 따랐다. 의전출신과 국가고시를 통한 의사라는 점으로 당국에서는 의사로서 유학을 꺼려하여 이 박사는 당시 하늘의 별따기 보다 어렵다는 유학생 자격시험을 당당히 합격하고 1959년 뮌스터대학의 소아과 의사(Gast Arzt)로 독일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이후 베를린 대학 정형외과 의사로, 프랑크푸르트 의대 정형외과 정식 Assistant Arzt로 발령받았고 1962년 7월 1일 오늘날까지 거주하고 있는 마인츠 대학병원에 정형외과의 전문의사로 부임하게 된다.

마인츠대학병원에서 근무하며 당시 독일 의료계가 간호사부족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접하고 이수길 박사는 한국의 간호사들을 독일로 오게 할 수는 없을까 하고 백방으로 수소문하였다.

십여 군데의 병원에 서신을 내고, 직접 정치가와 의료인들을 방문하여 계획을 설명하며 노력한 결과 마인츠대학병원과 헤센주 의사협회에서 긍정적인 대답을 얻었다. 그러나 또 다른 어려움은 길을 막아섰다.

한국 간호사들을 모집한다고 해도 그들을 이곳으로 데려올 비행기 편을 얻을 수가 없었다. 천신만고 끝에 이제는 작고한 타이저 박사와 당시 일본항공(JAL)에 근무한 Winter씨의 도움으로 한국의 간호사들을 독일로 데려올 수가 있었다.

한국에서의 파독간호사 선발에 직접 면접을 담당하여 우수한 재원을 확보한 이수길 박사는 1966년 1월 31일 이들과 함께 독일로 돌아왔다. 이렇게 파독간호사의 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1966년 1월 31일 파독 간호사 1진의 도착 모습이 독일 언론에 대서특필 되었다.
사진 가운데, 플래카드 중간(‘오십시오’ 문구)에서 손을 흔드시는 분이 이수길 박사님이다.

이후 묵묵히 의사의 길을 최선을 다해 걷고 있던 이수길 박사는 생각지도 않은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게 된다. 바로 ‘동백림 사건’이다.

이수길 박사가 추진한 한국간호사들의 독일취업이 ‘북한의 지령을 받고 간호사들을 독일로 오게 했다’라는 얼토당토 않는 누명으로 1967년 이른바 ‘동백림 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결국 한 달여만에 혐의는 모두 벗겨지고 무사히 독일로 돌아오게 되었으나 이수길 박사와 가족들은 일생에서 가장 큰 아픔을 맛보게 되었다.

그렇게 다정하던 이웃들이 어느 날 하루아침에 모르는 타인으로 변하게 되는 것을 경험한 이 박사 가족에게는 하루하루 생활이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이후 1992년 이 박사 내외가 천주교에 나가기 시작할 때까지 늘 조심하며 마음의 벽을 쌓고 이웃과 왕래 없이 그렇게 25년을 외롭게 살았다. 사람을 좋아하는 이수길 박사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이었으리라.

또한 이 일로 인해 이수길 박사는 한국에 돌아가 의술을 베풀며 평생을 보내겠다는 소박한 끔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점은 이제 되돌려 질 수 없는 평생의 회한으로 남았다.

이수길 박사는 1974년 마인츠에 소아과 병원을 개업하고 1998년 정년퇴직을 하였다.

이수길 박사의 지난 95년의 삶은 ‘인간 승리’ 그 자체이다.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신념으로 그 난관을 극복한 이수길 박사의 삶속에서 치열한 자기성찰과 부단한 노력을 발견할 수가 있어 범인들은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파독간호 60년’을 앞두고 우리의 곁을 떠나신 이수길 박사님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한다. (편집실)

1299호 15면, 2023년 1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