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독광부 60년 (9)

독일 광산생활 수기(1)

이종우 (1971년 2월 10일 내독, 함부르크 거주)

1963년 12월 22일 오후 6시,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뒤셀도르프시의 ‘뒤셀도르프 공항’. 에어 프랑스 제트기 한 대가 도착했다.
탑승객들이 차례차례 내리기 시작했다. 말쑥하게 신사복을 차려 입은 검은 머리의 한국인, 바로 파독광부 1차1진이었다. 1차1진은 모두 123명. 그리고 5일 12월 27일, 1차1진 나머지인 124명이 독일에 도착했다. 이렇게 1차 1진 247명을 시작으로 파독 근로자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교포신문사에서는 파독 광부 60주년을 맞아, 1월부터 매월 4 째주 “파독광부 60년” 특집을 이들이 도착한 12월 22일까지 12회에 걸쳐 연재한다. 독자들의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린다. -편집자 주

나의 회고를 시작하며

파독 이래 지난50여 년의 세월을 응시, 음미해 보면 내 일생의 절반 이상인 시간이 얼마나 길고 긴 건지 까마득한 게, 낮 선 땅 낮 선 문화권에 동조해 가며 살아가려고 하니 희로애락과 애환의 뒤범벅 속에 무슨 재미가 있었겠나 싶다. 그러나 한 가지, 기왕지사 독일에 왔으니 사회 전반에 걸쳐 우리 조국 대한민국보다는 월등히 높은 이곳에서 “아이들 낳아 교육 잘 시켜서 성장 후에 독일사회 일원으로 떳떳이 살 수 있게 터전을 마련하자! 이까짓 고생 뭔들 못하겠나”하고 팔 걷어 부치고 나선 내가 아니던가!

최종고 서울법대교수. 한국인물전기 학회장(2009년 3월 현재)의 말씀대로, 파독광부 역사는 희로애락과 애환의 육성이 생생히 담긴 역사이고 “역사는 이야기”라는데 힘입어, 우리들의 많은 이야기는 그야말로 진정한 독일동포사회의 한 토막 퍼즐 같은 역사라고 보고 용기를 내어 기술해 본다.

대한민국 정부 스스로가 기록하고 있는 사실은, 60-70년대 한국의 개발 시대에 해외로 문을 열었던 진정한 당사자들은 지금도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며 반세기를 넘기고 있는 셈이라 했다. 그래서 긴긴 독일광산생활수기를 이야기로 계속 펼쳐 보고자 한다.

토악질로 시작한 입항 첫 날

야코비광산(Zeche Jacobi) 수직항(Schacht)에 설치된 인부탑승용 승강기(Personal Aufzug)는 각개 반경 6m짜리 한 쌍을 이뤄 나란히 설치되어 있고 각개 3층식 구조로 설계되어 있어 칸 당 약 20명씩 타게 돼있는 거대 구조물이다. 지하로 내려가는 속력은 초속 약 5-6m로 내리꽂는 속도감에 속이 몹시 울렁거려 900m 자하 본갱도에 도착하니, 술에 취한 놈 마냥 비틀 거리며 저쪽 갱도 벽쪽으로 달려가 그만 토악질을 했다. 다행이도 중간 중간 승강기는 멈춰서 각개 작업장으로 분산해 가는 광부들을 내려 주고 하여, 단 한 번에 본갱도 까지 도착 하는 건 아니다. 그랬음에도 나는 그걸 못 참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새벽 4시반경에 기상하고 출근 채비를 하느라, 입항 첫날에 대한 설레임도 있어서 그렇겠지만, 내가 살아생전에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밥을 먹어 본적이 없으니 무슨 입맛이 있었겠나? 공복에 출근을 했으니 다행이도 헛구역질 만 하고 끝냈다. 지금의 허기는 나중 준비해온 빵(샌드위치 형)을 먹으면 적어도 6-7여 시간은 견디기 충분하다 생각하며 자위를 했다.

이런 현상을 본 나의 선임 작업동료(Kumpel) Erwin씨는 유심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 당시 내 추측이지만 그는 날더러 “괜찮냐”고 묻는 것 같았다. 다시 그가 시키는 대로 소형기차(Personal Zug)를 타고 어딘가 계속 간다.

이 조그마한 장난감 같은 기차지만 협소 하게 앉으면 6-7명은 탈수 있는 공간이 제공돼 있다. 덜그렁 거리며 곧지 않은 선로를 따라 힘차게 달려가고 있고, 대부분의 승차 인원은 조는 건지, 자는 건지 머리를 푹 수그리고 간다. 뭐 예쁘다고 상대편 얼굴을 빤히 보며 가겠나. 안보는 게 상책이지 하며 나 또한 머리를 숙인 채 덜컹이는 차량에 몸을 맡기고 간다.

근 한 시간가량 타고 가서 정차 후 날더러 내리라는 시늉을 하는 Erwin씨를 뒤 따라 내려서 어디론 가 또 휘적휘적 20여분은 족히 간 것 같다. 드디어 우리들의 작업장에 도착한 모양이다. 결국 지상에서 입항하여 작업장까지 오는데 만 무려 한 시간 반 이상이 걸렸다.

도대체 이놈의 땅속에 무슨 탄맥이 도사리고 있기에 이리 지루하고 긴긴 시간을 달려와야 겨우 탄맥을 볼 수 있고 이러한 장대한 시설물이 들어찬 공간을 확보한 막장을 보며, 아니 이런 규모의 탄광이 한국에도 있나 의심스럽고, 게다가 입항 첫날이라 더욱더 온갖 관심에 쌓여 흥미롭기만 하다. 이런 장비들이 꽉꽉 들어찬 지하막장을 대하고 보니, 한마디로 기가 막히고 역시 독일이구나 하며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곳 현장에 시설 돼 있는 각종 장비들이 돌아가는 소리가 너무도 시끄러워 Erwind씨가 내게 뭐를 지시해도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고 답답하며 이내 두렵기 까지 하다.

Jacobi광산(Zeche Jacobi) 간략 소개

소재지: Oberhausen-Osterfeld- Klosterhardt, 북위51도 31부 32‘ /동경 6도 53부 26‘

-Ruhrkohle AG에 귀속

-연간 석탄생산량: max. 2.447.089t

-총인원: 최다 5328명

-채탄작업기간:1913~1974, 근 60여년간 운영하다,1974년 5월 31일에 문을 닫음

-연면적: 220 Hekate로서, 원조 제철소 구테호프능스휘태(Gutehoffnungshütte)에서 1904년에 백작 폰베스터홀트로부터 이 땅을 매입하고 석탄산업을 시작하게 된다.

1913년 초기에는 항내 석탄운반수단으로 당나귀를 이용했고, 하루 평균 5.000t 을 생산 을 목표로 삼았으나, 이후 1912 ~ 1920년 사이에는 대대적인 광산개발지역으로 등장 하게 된다.

1913년부터 본격적인 탄생산으로 연간 총683.074t 달성했으며,이를 깊이 890m 짜리 Schacht 1과 874m Schacht 2가 감당해 냈다.

-max.생산기록: 1942년 2.447.089t, 연인원 5.328명

-1913 ~ 1974년 4월까지 전체기간 연석탄생산량 – 78.000.000t

-연평균 : 1~2 Mio. ton 채탄

지금은, Golf-u. Sportanlage Jacobi로 푸른 잔디가 광활하게 펼쳐져 있어 그 웅장하고 시끌벅적 했던 옛 광산(Zeche)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세월의 무상함을 여기서도 또 느껴본다.

항내 작업장이 월남전보다 더 시끄럽다는 토로

월남파병복무를 마치고 온 조XX 동료의 얘기로는 한참 Hobel로 탄을 긁어 깎을 때, 파내진 탄이 Panzerkette를 타고 밖에 본 갱도 석탄 집합장으로 가게 되는 이 모든 과정의 장비들이 동시에 함께 돌아가는 괴음은 가히 고막이 찢어질 정도로 심하다.

그렇기 때문에 위험하거나 급한 일로 잠시 돌아가는 장비들을 Stop시키려면, 항내 도처에 설치되어 있는 압축공기 통로호스(Schlauch)에 장치되어 있는 버튼을 짧고 빠르게 두 번 연거푸 누르면 “작동 stop하라”는 신호요, 재가동을 알리려면 길게 한번 누르면 되었다.

말로는 1 m 사이 거리에서도 뭐라고 전혀 알릴 수가 없다. Steiger나 작업반장들은 압축공기통로 Schlauch에 수화기를 꼽게 Steckdose처럼 돼 있는 곳에 연결 통화를 하긴 한다. 압축공기 사용을 고안한 것은 탄가루(탄진)가 꽉 찬 항내에 전기를 사용하면 어떤 충격파에 의한 폭발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검정들깨를 잔뜩 뿌려 먹던 빵과 사과, 귤등 먹을 때가 잠시 값진 휴식이다.

항내 묵계사항중 하나로, 아무리 작업이 바빠도 빵 먹을 땐 Steiger도 참견 안한다. 일 못하는 내 주재에 자주 뭐라도 꺼내 먹는 것이, 일하다 잠시 쉬는 한 요령이었다.

그런데 아주 괴로운 게 있는바, 빵이나 사과나 음식을 한입 베어 먹으면 순간 이빨로 벤 자국에 새까맣게 석탄가루가 수북하다시피 쌓인다. 왜? 항내에는 폭발이나 호흡용 공기공급 때문에 환기통시설이 엄청 잘 돼 있어, 통풍이 무척 세기 때문에 전등으로 지나는 바람을 비쳐보면 탄가루가 거의 수평으로 날라 이동 하는 것이 뚜렷이 보인다.

바람이 워낙 센 까닭에, 탄가루가 밑으로 떨어지질 못한다는 말이다. 탄가루범벅으로 항내에선 음식을 먹는다. 어떻게 뭘로 음식을 가릴건가? 탄가루 묻지않게……

김치담가 항내에서 익혀 먹던 동료 홍XX

대게 나이든 동료(71년 2월 당시 35세 이상으로 짐작 됨)들은 빵보단 한식을 선호하기 때문에 음식 솜씨가 있고 농촌출신일 수록 그런 성향이 농후하다.

가령 항내작업장에 빵 보다는 김밥을 말아 온다던지, 아예 밥으로 도시락을 싸오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그 홍씨는 유리병에 김치를 막 담가서 다음 날 항내로 가져와, 지하갱도 벽마다 무너지지 말라고 적절히 긴 나무를 이용 X형으로 엮어 밖으로(갱도 안쪽으로) 돌이나 잡석들이 튀어 나오지 못하도록 얼기설기 막아놓은 사이사이 공간이 꽤 있다.

독일 Supermarkt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오이지 담은 유리병(400g 들이)에 김치를 담가서 항내로 반입하고, 자기의 당분간 고정된 작업장 어딘가에 숨겨놓으면 이틀이면 잘 익는다고 한다. 비록 나는 빵을 싸왔지만 거기에 곁들여 김치를 얻어먹으니 맛이 무척 좋았다. 강한 통풍 때문에 김치냄새도 얼른 빠져 나가고, 버릴 찌꺼기가 있나, 나중에는 국물까지 후르룩 다 마시는 판인데. 고향생각이 절로 나는 시간이다. 항내 어디 던지 고온상태 하에 있지만 세찬 통풍시스템 때문에 땀이 식을 땐 춥게 느껴지는 경우 도 많다.

항내에서 ‘김치백반!’은 기가 막히다. 한국인의 부지런과 재치가 보여 준 극치다.

호강길인가 고생길인가?

우리는 1971년 2월 10일 저녁 6시경 Düsseldorf 공항에 Air France항공기를 통해 독일에 첫 발을 내 디뎠다. 우리를 묵직하게 내려다보듯 하는 거인이 반겨주는 독일의 첫 인상은, 우중충한 겨울 날씨에 가랑비까지 내려 심난하고 우울한 심경에 쌓인 채, 각자 개인 짐 보따리를 챙겨 대기 중인 Bus에 나뉘어 타느라 야단법석ㅇ;다. 하임통역자라는 강XX씨의 호명에 따라 일행 140명중 42명은 Aachen으로 98명은 Oberhausen-Osterfeld Kettelerhaus 행 Bus를 탔다.

차장으로 투두둑 소리를 내며 지붕에서 몰려 흘러내리는 빗물과 가랑비를 내다보며 20여 시간 전 고국에서의 사랑하는 가족들과 김포 공항에서 작별할 때 흉토록 벌겋게 상기된 내 눈시울을 식구들한테 안보이려 애써 나는 되도록 빨리 탑승하려고 기체에 길게 걸쳐있는 트랩 쪽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했다. 촌스러운 연두색깔 비닐가방, 요즘에 기내로 반입할 수 있는 사이즈의 가방 하나가 내가 가진 보물 단지 전부였다.

치약, 칫솔, 수건, 손수건 3. 속옷 한두 벌, 외출복이라 할 양복상하 한 벌. 허기 채우라고 국화빵 한 봉지. 군밤 한 봉지, 내 바로 밑 아우가 공항 밖으로 향해 막 돌아서려는 내 손에 들려주며, “형! 배고프면 안돼” – 울음 섞긴 떨림으로 외마디-. 지금도 그 소리가 쟁쟁히 들려 오는 듯 하다. 벌써 50년이 지났는데도…

그런 아우한테 지금껏 그 흔해빠진 Solingen Messer Set 하나를 흔쾌히 선사 못하고 지낸다. 이게 내가 선택한 호강길 이었나?

다음 연재(10월 4주)에 계속됩니다.

1332호 14면, 2023년 9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