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제프 보이스 탄생 100주년

요제프 보이스(Joseph Beuys, 1921년 5월 12일 ~ 1986년 1월 23일)는 독일의 예술가로서, 조각, 드로잉, 설치 미술, 행위 예술 등 다양한 작품 활동을 하였고, 교육가, 정치가로도 활동하였다.

“모든 사람은 예술가이다”라고 주장하며 ‘사회 조각’이라는 확장된 예술 개념을 통해 사회의 치유와 변화를 꿈꾸었던 보이스는 비디오 아트의 거장 백남준과 함께 20세기 새로운 예술분야를 개척하였다.

교포신문사는 보이스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생애와 예술을 살펴보는 특집면을 준비하였다.

요제프 보이스: “모든 사람은 예술가이다

1921년 라인강 지역에 위치한 도시 크레펠트에서 태어난 이 예술가는 20세기 중반, 무엇보다 기존의 장르 경계를 넘나들며 돌풍을 일으켰다. 보이스는 화가이자 조각가, 개념 예술가이자 정치사상가, 예술 철학자이면서 영성주의자였다.

그의 작품집뿐만 아니라 그가 전한 인용구와 문구에는 그의 보편주의적 사유가 반영되어 있다. “모든 사람은 예술가이다”, “지금 쓰레기 처리장에 있든, 간호사이든, 의사이든, 기술자이거나 농부이거나”라고 보이스는 주장했다.

뒤셀도르프 예술대학에서 공부하고 후에 그곳에서 교수로 일하기도 했던 보이스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곳에서 모든 사람은 예술가가 된다고 믿었다.

생애

요제프 보이스는 1921년 5월 12일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크레펠트에서 태어났다. 보이스가 태어나고 얼마 후, 그의 가족이 클레베로 이사하여 보이스는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동식물, 조각, 과학과 기술 등에 흥미가 많았으며, 소아과 의사가 되기를 꿈꾸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보이스는 1940년에 고등학교 졸업시험을 마치고 독일 공군)에 입대하여 폭격기 부조종사로 복무하였다. 1943년, 그가 탄 JU-87기가 러시아 크림 반도에서 격추되었다.

보이스는 저서에서 의식 불명 상태에 있던 자신을 유목민족인 타타르인이 발견하여 구조하고, 동물의 지방과 펠트 천으로 감싸 치료해주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그의 예술 경력에서 가장 논쟁적인 부분이다. 이는 자전적 신화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확실한 목격자들에 따르면 충돌후 곧 조종사는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독일 수색특공대가 발견했을 때 보이스는 의식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당시 사고 장소에는 타타르인이 없었다고 한다.

보이스는 군병원으로 후송되었고 3월 17일에서 4월 7일까지 3주간 입원했었다. 부상에도 불구하고 1944년 8월 보이스는 낙하산병 훈련을 받고 서부전선에 재배치되었다. 1945년 5월 8일 패전후에는 독일 쿡스하펜의 영국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으며, 그해 8월 5일 풀려나 클레베로 귀향하였다.

전쟁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며 그는 미술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1947년 뒤셀도르프 예술 아카데미(Kunstakademie Düsseldorf)에 입학하여 조각을 공부하였다. 1950년대 초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였고, 1953년 부퍼탈에 있는 폰 더 하이트 박물관(Von der Heydt Museum)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1961년에 그는 뒤셀도르프 예술 아카데미의 조각과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 후 플럭서스(Fluxus)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고, 1963년 플럭서스 페스티벌에서 그의 첫 행위 예술(Performance)인 《플럭서스 시베리안 심포니 1악장》이 행해졌다. 그 후 보이스는 평생 동안 약 70여 회의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국내외적으로 그의 명성을 떨쳤다.

그는 사회와 정치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예술로 사회를 변화시키려 함은 물론, 직접 정치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67년에 학생들의 요구를 대변해주는 독일 학생당(DSP)을 창당하였고, 1972년 카셀 도큐멘타 5(Documenta V)에서는 프리데리치아눔(Fridericianum) 박물관 안에 ‘국민투표를 통한 직접 민주주의 조직’이라는 사무실을 열어 100일 동안 민주주의, 예술에 대해 강연하고 관람객들과 토론하였다. 1976년에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의원 선거에 출마하였고, 1979년 유럽 의회 선거에서 녹색당 후보로 출마하기도 하였다.

보이스는 교육에 있어서도 그의 신념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1971년 뒤셀도르프 예술 아카데미 안에 자유 국제 대학(FIU: Freie Internationale Universitaet)을 설립하여 누구나 자유롭게 공부하고 토론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였다.

또한 아카데미 입학 시험에서 떨어진 학생들을 입학시키기 위해 아카데미 사무실을 점거하며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1972년에도 낙방한 학생들의 입학 허가를 받아 내려 또 한 번 사무실을 점거하며 시위하다가 결국 교수직에서 해임되었다.

1979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보이스의 대규모 회고전이 개최되어 그의 명성이 국제적으로 떨쳐졌다. 1982년에 보이스는 카셀 시에 7000그루의 나무를 심는 환경운동이자 퍼포먼스의 일종인 《7000그루 참나무》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보이스는 1986년 1월 23일 뒤셀도르프에서 심장 질환으로 사망하였으며, 이듬해인 1987년 그의 아들인 벤젤(Wenzel)이 마지막 7000번째 나무를 심으며 프로젝트가 완성되었다.

새로운 물질 언어: 지방과 펠트 천

제2차 세계대전 중 보이스가 겪은 죽을 뻔한 경험은 그의 예술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비행기에서 추락하여 의식을 잃은 보이스를 타타르족이 발견하고 동물의 지방과 펠트(Felt, 독일어 Filz) 천으로 그를 치료해주었는데, 이 지방과 펠트는 그의 작품에서 매우 중요한 재료가 된다.

타타르족은 상처를 치료하고 몸에 온기를 촉진시키기 위해 동물의 지방(비계)을 그의 몸에 발랐고, 추위로부터 열을 보존하기 위해 펠트 천을 덮어주었다. 즉 보이스의 작품에서 지방은 생명을 주는 에너지를 상징하고, 펠트는 에너지를 보존하는 따뜻함을 상징한다. 보이스는 이러한 소재들을 사용하여 예술로서 개인적, 사회적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였다.

보이스는 가령 ‘새로운 물질 언어’를 도입하기도 했다. 전설적인 1963년 작 ‘지방 의자(Stuhl mit Fett)’의 경우, 지방은 “무질서하게 분산되고 에너지가 산만한 형태에서 하나의 형태로 가는 길”을 택한다고 후에 보이스는 설명했다.

그의 작품 ‘지방 귀퉁이(Fettecke)’의 경우, 그의 뒤셀도르프 작업실 한구석에 붙은 10파운드의 버터 덩어리로 1986년 보이스가 사망하고 몇 개월 뒤에 건물 관리인이 이를 작품인지 모르고 긁어내고 말았다. 그 건물 관리인은 “그간 심각하게 냄새가 났을 것이다”라며 자신의 청소작업을 해명한 것 도한 유명세를 얻었다. 보이스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1970년 작 ‘펠트 양복(Filzanzug)’ 역시 집단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다. 보이스가 반복해서 설명했듯, 그에게 펠트는 열에너지를 저장할 수 있는 절연체이고, 이 열에너지는 그에게 창작을 위한 동력 같은 것이다.

예술과 삶은 하나다

보이스에 따르면 사유, 예술,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담론은 예술과 삶이 서로 개입하는 하나의 통일성으로 이해해야 한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예술계에서 이는 급진적이고 새로운 사유였다.

보이스는 예술작품 내지 전시공간의 신비화를 걷어내고, 이에 생기를 불어넣고자 했다. 예술 작품에 대해 그는, 아이디어가 작품 안에서 굳어버려 “결국에는 뒤처질 것”이라고 말하며, 그 대신 “아이디어가 앞으로 나아갔던” 것은 사람들을 통해서라고 주장했다.

보이스에게 미술관은 보물 창고가 아닌 “지속적인 회담을 위한 살아있는 장소”였다.

이는 1972년 카셀에서도 잘 드러났다. 명망 있는 현대 예술 전시 행사인 도큐멘타 5에 보이스가 참여했을 때, 그는 조각품을 가져오거나 그림을 거는 대신 ‘국민투표를 통한 직접 민주주의를 위한 사무실(Büro für direkte Demokratie durch Volksabstimmung)’이라는 이름을 단 사무실을 자신에게 할당된 전시 공간으로 급히 이전하였다. 그는 이곳에 앉아 사람들과 직접 민주주의의 디자인 문제를 논하기 위해 방문객을 기다렸다.

사회를 조각처럼 형성하다

1972년 자신이 재직 중이던 예술 학교를 상대로 한 시위에서 볼 수 있듯, 요제프 보이스는 경계를 향해 밀어붙이고, 이를 통해 후대 예술가 세대에 영향을 미쳤다.

보이스는 사회의 급격한 변화를 요구했다. 그 시대의 다른 예술가들과 달리, 그는 예술을 사회와 결합했고, 이를 다시 정치, 과학, 철학 그리고 경제와 연결했다. 출발점은 그의 사회적 조각이라는 이론이었다.

특히 1982년 카셀의 도큐멘타 전시에서 그의 사회 생태적 작품 ‘7000그루의 떡갈나무 : 도시 행정 대신 도시 삼림화(7000 Eichen – Stadtverwaldung statt Stadtverwaltung)’를 현실화한 것을 기점으로 볼 수 있다. 보이스와 다수의 자원봉사자는 5년의 기간 동안 7000개의 나무와 함께, 나무 하나당 하나의 현무암을 카셀 곳곳에 심었다. 이 프로젝트는 초기에 논란이 많았지만, 오늘날에는 카셀 도시 경관을 정의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보이스는 사회적 조각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완성된 작품에 국한되지 않은, 인간의 창의적인 생각과 행위를 포괄하는 행동들. 그는 이 개념으로 현재 지배적인 예술 이해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 이후로 예술은 스튜디오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의 거점에도 직접 등장한다. 예술가들은 참여적 접근 방식을 통해 취약 계층의 생활 환경을 개선하고자 한다. “사회 질서를 조각처럼 형성하는 것은 나의 과제이자, 예술의 과제이다”라며 보이스 스스로 말했다고 한다.

1219호 30면, 2021년 5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