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돌아와야 할 우리 문화유산

-잃고, 잊고 또는 숨겨진 우리 문화유산 이야기(7)

하나의 유물, 두 나라로 소개된 금은상감동관

스페인의 오래된 도시 톨레도(Toledo)는 무기를 생산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인구 8만여 명이 사는 톨레도에는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관광객으로 늘 거리가 붐빈다. 기념품 공방에서는 금이나 은으로 ‘상감의 장인’들이 열심히 작업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관광객에게 ‘상감 입힌 기념품’은 필수 구입품이기도 하다. 그중에 ‘톨레도의 칼날(The Toledo Blade)’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기술의 활용이 다양하고 아름다운 우리의 상감기법

그럼 우리의 상감기술은 어떠했을까? 흔히 ‘고려 상감청자’를 떠올리며 도자기 같은 그릇에만 상감기술을 입혔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보다 기술의 활용이 훨씬 다양하고 아름답다.

한반도에서 상감기법이 등장하는 것은 낙랑(樂浪)시대로 알려져 있다. 기원 전후 1세기경이니 2천여 년 전이다. 유물로는 평양에서 출토된 ‘금은상감동관’, ‘허리띠 장식’ 등이 있다.

우리나라 상감기술의 확립 시기는 대체로 백제의 한성 · 웅진기라고 평가한다. 상감 자료는 5~6세기에 걸쳐 약 1세기 정도의 한정적인 시기동안 경기 오산, 충남 천안 · 공주 · 서산, 전북 완주 · 고창, 전남 나주 등 백제권 전역에서 출토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백제유적 출토 상감 유물 중 대표적인 것은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에 소장중인 ‘칠지도(七支刀)’ 가 있다.

‘칠지도’는 제작 시기와 칼에 새긴 글의 내용으로 유명해졌다. 그동안 일본은 칠지도의 일부 내용을 조작하여 신하인 백제가 일본의 황후에게 선물로 바쳤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최근 X-레이 투시검사 등을 한 결과 지워진 글의 내용을 해석할 수 있었다. 건국대 홍성화 교수의 발표문 「고대 한반도계 대도 명문에 대한 재조명」 <동양예술> 제21호(한국동양예술학회, 2013년 4월 30일)에 그 내용이 잘 나와 있다.

발표문에 따르면, 칠지도의 제작은 백제 전지왕 4년인 408년이고 목적은 왕세자인 구이신(제19대 구이신왕)이 탄생한 것을 기념하여 백제가 왜에 하사했던 칼이 확실하다는 것이다.

‘칠지도’의 길이는 74.8센티미터이고 나뭇가지 모양의 일곱 개의 가지가 있다. 그중 몸통 부분에 금상감기법으로 황금문자 62자를 새겼다. 16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대부분의 글이 명료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최고의 금속공예 기술이 바탕임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대표적인 고대 상감 유물은 공주, 천안, 오산 등 백제 권역은 물론 대가야의 합천 옥전 35호분, 일본의 구마모토현 에다후나 양마고분 출토품, 효고현 미야야마고분 출토품, 야마가타현 다이노코시고분 출토품 등이 있다.

오구라 컬렉션에도 공주 송산리 6호분 출토 원두대도 등 30건, 51점이 있으며 철기, 삼국, 고려시대에 걸친 유물이 모두 망라되어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백제의 상감기술은 당대 최고의 기술에 도달하여 주변국인 대가야, 신라, 왜 등에 전파되고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일본이나 미국, 유럽 등지로 유물의 상당수가 반출되었고, 그 결과 우리나라에서 상감기술이 더욱 발전되고 문화산업으로 성장하는 데 크나큰 장애가 되었다.

현재 도쿄국립박물관에 있는 금은상감도관

국립도쿄예술대학 미술관에 소장된 금은상감동관
제작시기: 기원 1-2세기
출토지: 평양 낙랑고분
크기: 길이 25.4cm, 지름 3,9cm

같은 유물이 어떻게 제작한 나라와 연도가 다를 수 있나?

한반도에서 발견된 최고 오래된 금상감기법의 유물은 ‘금은상감동관’ 또는 ‘상감수렵문동관’으로 소개되고 있다. 평양의 낙랑고분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제작 시기는 1~2세기, 길이는 25.4센티미터로 섬세하고 화려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다. 당시 신분이 높은 귀족이 사냥을 할 때 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중요한 유물이 어떤 이유로 일본에 갔는지 아직 밝혀진 바는 없지만, 현재는 국립도쿄예술대학 미술관에 있다. 참고로 국립도쿄예술대학 미술관에는 399건, 447점의 한국 문화재가 보관되어 있다.

‘금은상감동관’ 또는 ‘상감수렵문동관’으로 이름을 소개한 것은 우리나라이다. 일본이 1941년 7월 3일 중요문화재로 지정할 당시의 유물 이름은 ‘금착수렵문동통’으로, 여기서 말하는 ‘금착(金錯)’은 청동으로 만든 후 표면에 금사(金絲)나 금편(金片)을 박아 넣는 입사(入絲)공예 기법이다.

이러다 보니 ‘금상감기법’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보가 없었다. 현재 일본 정부가 국보나 중요문화재로 지정한 한국 기원 문화재 명칭에는 ‘상감기법’에 대한 소개가 없다. 이유는 의도적으로 백제나 고려의 상감기법을 소개하지 않으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한반도에서 출토된 가장 오래된 ‘금은상감동관’ 또는 ‘상감수렵문동관’을 중국과 고려에서 제작한 것으로 일본 문화청 홈페이지에서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홈페이지의 내용을 보면 하나는 제작 시기를 고려로, 1941년 중요문화재로 지정했다고 소개하고, 다른 곳에는 중국 후한시대인 1~2세기로 소개하면서 ‘조선 낙랑고분 출토’라는 내용도 덧붙여 놓았다. 내용이 이렇다 보니 하나의 유물이 두 나라의

금착수렵문동통(고려 / 중요문화재지정 1941년 7월 8일) 것으로, 제작 시기도 1천여 년의 차이가 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금은상감동관’ 또는 ‘상감수렵문동관’의 표기 오류에 대해 2015년 한국의 한 언론사에서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일본 문화청 장관은 “예전부터 그런 것이고 최근에 낸 것이 아니다”며 “지금까지 줄곧 아무것도 바뀐것이 없으므로 특별히 어떤 대응도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답변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남의 나라에서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푸대접을 받고 있고, 또한 이후에도 이를 바로잡을 생각이 없다면 환수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외규장각의궤』도 박병선 선생이 발견하기 전까지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중국 도서로 분류되어 있었다. 이로 인해 국민적 공분이 일어 2011년 되찾아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