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돌아와야 할 우리 문화유산 -잃고, 잊고 또는 숨겨진 우리 문화유산 이야기(12)

‘아침의 나라 조선’을 수집한 사람들

“한국 정신의 명석함은 아름다운 도서 인쇄에서, 현존하는 가장 단순한 자모(字母)의 완성도에서, 그리고 세계 최초의 인쇄 활자 구상에서 드러나는데, 나는 굳이 여기서 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갖가지 지식과 기술을 발전시켜 일본으로 전수시킨 점을 말하지 않겠다. 극동문화에 한국의 역할은 엄청난 것이어서, 만일 그 입지가 유럽과 흡사한 것이었다면 한국의 사상과 발명은 인접 국가들을 모두 흔들어 놓았을 것이다.

모리스 쿠랑 『조선서지』 권1 서문(1895년판)

1901년, 세계최초 금속활자본인 ‘직지’를 소개한 프랑스의 동양학자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 1865~1935)이 저술한 『조선서지』의 서문 내용이다. 그는 “서울의 거의 모든 책방을 뒤지며 장서를 살폈으며 가장 흥미로워 보이는 책들을 사들였다”고 했다.

18세기 중반부터 조선에는 파란 눈의 낯선 이들의 방문이 시작되었다. 물론 1627년, 표류하다 조선에 정착해 살았던 네덜란드인 벨데브레(조선이름 박연)와, 1654년, 역시 바다를 표류하다 제주도 등지에서 지낸 하멜 같은 이가 있었지만 그것은 계획된 방문이 아닌 표류의 결과였다.

조선이 사대(事大)라는 명분으로 나라의 빗장을 걸어 잠그지 않고 삼국시대나 고려 때처럼 아라비아 권역까지 교역을 했더라면 이들과의 만남은 좀 더 일찍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18세기 중반까지 오직 중국을 통해서만 문물을 나눴으니 조선을 방문한 이들이나 느닷없이 방문객을 맞았던 조선인들이나 어리둥절하고 낯설기는 매한가지였을 것이다.

서양인에겐 조선의 무엇이 그리 흥미로웠을까

‘조용한 아침의 나라’ 또는 ‘은둔의 나라’로 불리던 조선을 방문한 서양 사람들은 급변하는 국제정세에도 아랑곳없이 놀라울 정도로 평온을 유지하고 있는 조선의 사상적 경향과 높은 수준의 문명에 놀라움을 금치못했다.

그들도 쉽게 구하지 못하던 동양의 고전들이 시장의 책방에 널려 있었으며, 중국에만 있을 줄 알았던 고급스러운 도자기 또한 어디서든 볼수 있다는 사실에 한편으로 충격 받았을 듯하다. 마치 마블의 영화 「블랙팬서」에 등장하는 ‘와칸다국’을 본 느낌이었다고 할까.

자기들만이 최고 수준의 문명을 누리고 있다고 여겼는데 바다 건너에서 찾은 작은 나라 ‘조선’이 그 통념을 깨버린 것이다. 대문을 걸어 잠그고 들어앉은 조선이 간직하고 있던 문물은 서양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으니 이들이 앞다투어 조선을 ‘수집’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영국에서 불기 시작한 자유무역의 바람은 이익을 위해서라면 국경도 양심도 넘어설 수 있다는 일종의 새로운 기준을 세웠다. 영국이 정의나 종교의 문제가 아닌 오로지 ‘돈’ 때문에 중국을 공격했던 아편전쟁이 그 예다. 이처럼 ‘돈’ 되는 일에 혈안이 된 일부 서양인들에게 신비한 ‘조선의 보물’은 훌륭한 먹잇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물론 이들 중에는 친절을 베풀고 신식 교육을 함께하며 조선의 운명을 걱정하던 이들도 있었다. 그때 방문한 대표적인 인물들로 콜랭 드 플랑쉬, 샤를 바라, 뮈텔 주교, 앙투아네트 손탁, 묄렌도르프, 노르베르트 베버, 쟁어, 마이어, 베베르, 슈페이예르, 파블로프 등을 꼽을 수 있다.

독일에서 발행한 박물관 자료 『한국의 재발견! 독일 박물관의 보물 Korea Rediscovered! Treasures from German Museums』에는 조선을 찾은 방문자들의 직업을 외교관, 선교사, 사업가, 학자, 여행자, 수집가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방문자들은 본격적으로 조선을 ‘수집’하고 ‘분석’하기 시작했다. 이때 왕실, 불교, 민속 등 전 분야에 걸쳐 대대적인 수집이 이루어졌고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을 비롯하여 무수한 도서와 도자기, 그림 등이 해외로 반출되었다.

100년이 지나 귀환하는 조선의 유물들

현재 나라 밖에 있는 한국 문화재는 약 18만 점, 물론 전수 조사한 결과는 아니다. 지금도 해마다 조사를 진행함에 따라 증가하고 있다. 2005년에 처음으로 국내에 발표될 당시에는 74,434점이었다.

외국에 남아 있는 문화재는 21개국 600여 곳에 흩어져 있다. 조사하면 할수록 더 많은 곳에서 더 많은 수의 유물의 존재가 밝혀질 것이다.

겸재 정선의 「금강산전도」

한편 반출된 유물의 일부가 고향으로 귀환하고 있다.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은 2005년 『겸재 정선의 화첩』을 영구대여 형식으로 한국에 돌려주었다. 명분은 한국선교 120주년 기념이다.

대한제국 시기인 1883년, 독일 상인 에두아르트 마이어와 카를 안드레아스 볼터가 인천에 ‘세창양행’이라는 최초의 무역회사를 설립했다. 이때 볼터가 수집한 「해상군선도」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독 수교 130주년이 되는 2013년 볼터의 외손녀에 의해 귀환하게 되었으니 그 의미가 남다르다.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으로 유명한 비운의 왕세자 효명세자의 부인인 신정왕후를 세자빈으로 책봉한 죽책이 프랑스에서 발견되었다. 죽책은 1857년까지 강화도 외규장각에 있다가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로 반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죽책 역시 150여 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2019년 3월에는 독일 로텐바움세계문화예술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던. 조선시대 문인석 한 쌍을 반출 과정에서 불법성이 의심된다며 한국으로 돌려주었다. 이유는 문인석은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이기 때문에 애초 거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처럼 여러 경로를 통해 마치 태어나 곳으로 돌아오는 연어처럼 유물들이 귀환하고 있다. 1945년 광복 이후 2019년까지 12개국에서 10,140점의 문화재가 환수 되었다. 이 중에 특히 유럽으로 반출되었던 유물들의 귀환이 많아지고 있다.

1261호 30면, 2022년 4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