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돌아와야 할 우리 문화유산
-잃고, 잊고 또는 숨겨진 우리 문화유산 이야기(18)

하늘도 놀란 ‘메이지시기 산업시설’의 유네스코 등재

2015년 6월 28일, 독일의 옛 수도 본(Bonn)에서 유네스코 제39차 세계유산 총회가 열렸다. 총회의 핵심 이슈는 일본이 신청한 ‘메이지시기 산업시설’의 세계유산 등재였다. 아베 정권이 기독교 유산의 등재 신청을 보류하면서까지 오랫동안 치밀하게 준비한 메이지시기 산업시설의 등재 여부는 세계적인 이슈가 되었다.

문화재환수국제연대는 강제노동 등 추악한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 등재는 세계유산 등재가 오히려 역사를 은폐하고 세탁하는 나쁜 선례가 될 것이라며 총회가 열리는 독일 본에서 재독 동포들과 등재저지 캠페인을 거세게 벌였다.

문화재환수국제연대와 재독 동포들이 총회 장소 앞에서 등재저지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국제사회와 한국의 반발로 일본의 의제는 총회에서 두 번이나 심사가 연기되었다. 총회 의장은 일본 정부에 직접 피해국인 한국 정부와 합의할 것을 종용하기에 이른다.

2015년 7월 5일, 오후 2시부터 열린 등재심사는 “강제노동을 인정하고 기록하겠다”고 합의했다는 한국과 일본의 보고를 바탕으로 반대 의견 하나 없이 속전속결로 마무리되었다. 한국 정부는 ‘강제노동(forced labour)’이 아닌 ‘강제로 노역한(forced to work)’으로 합의함으로써 어설프게 협상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다음 날 일본 노동상은 강제노동이 없었다고 발표했고 몇 달 후 아베 총리는 한국 정부의 항의가 없었다고 인터뷰를 했다. 실로 끔찍한 결과가 아닐수 없다.

100년의 폭염, 등재 결정 직후 쏟아진 우박

독일 본의 7월 초 낮 기온은 평균 25도를 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2015년 6월 28일, 제39차 세계유산 총회가 열리던 날은 39도까지 기온이 치솟았다. 100년 만의 폭염이었다. 이러다 보니 국제회의센터(WCCB) 앞에는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참가자들도 그늘에 숨기 바빴다.

폭염 속에도 7월 2일부터 한국에서 온 등재저지단 7명과 독일 전역에서 온 동포들은 총회 장소 앞에서 “강제노동 인정하지 않은 일본 산업시설 등재 반대”를 외치며 총회 참석자들에게 홍보물을 나눠 주는 등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동포 중에는 소식을 듣고 자동차로 7시간을 달려온 분과, 함부르크에서 교민신문을 보고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달려온 교민도 있었다.

독일 경찰은 총회 장소 앞이라 그늘막도 설치할 수 없다고 하다가 이튿날부터 텐트 설치를 허락했다. 폭염 속에도 멈추지 않는 우리의 활동에 각국의 총회 참석자들이 방문해 격려를 하곤 했다. 세네갈에서 온 참석자는 음료수와 과일을 주었고, 프랑스 참석자는 지금 회의장에서 “당신들의 캠페인이 화제다”라며 격려의 말을 전하고 갔다.

외신들의 취재도 이어졌다. 로이터 통신, UPI 통신, 신화통신이 방문 취재하고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선지 한국의 언론사는 단 한 곳도 교민들과 우리의 캠페인에 대해 방문 취재를 하지 않았다. 교포신문 등이 연일 현장을 취재하면서 “총회장에 참석한 한국 기자는 왜 한 번도 이곳을 취재하러 오지 않나”라며 의심할 정도였다. 이후에도 국내 보도진의 직접 취재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외신들의 보도가 이어지자 외신을 인용해 보도하는 정도에 그쳤다.

일본 산업유산의 등재 보류가 된 4일, 국내 방송에서 ‘등재 무산될 것’이라는 뉴스가 나왔고 이를 본 등재저지단은 서로의 등을 두드리며 성과를 자축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일본 취재단의 한마디에 분위기는 싸늘히 식어버렸다. 일본의 한 언론사 특파원으로 한국에서부터 등재 저지 활동을 취재하던 모 기자가 “어제 한국 정부와 합의했으니 오늘 등재될 것”이라며 “폭염에 고생들 많았고 여러분들의 캠페인은 총회장에서 이슈였다”고 촌평하자 이를 함께 듣고 있던 이들은 한국 정부를 강하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총회에 참가한 한 중국인은 총회 참석 자격을 빌려줄 테니 결정이 나기 전에 회의장에 들어가서 항의하라고 격려해 주었지만 외부인의 회의장 참석은 불가능했다. 이날 오후 3시 등재가 결정되었고 한국의 외교부 차관은 동포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으면서 그 자리를 떠났다.

지금도 잊지 못할 그날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등재 발표 이후 1시간이 지나자 하늘이 순식간에 먹구름으로 덮였다. 그리고 우레와 함께 손톱 크기의 우박이 쏟아졌다. 그날 여러 곳에서 유리창이 파손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강제징용으로 끌려가 억울하게 죽어간 원혼들의 한탄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에 마음이 한없이 무거웠다.

역사를 왜곡하는 나쁜 사례, 등재 취소로 바로잡자

아베 정부는 유네스코의 권고를 끝내 이행하지 않았다. 2015년 등재 당시 일본 대표는 “한국인 등이 가혹한 환경과 조건에서 강제 노역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정보센터를 설치하며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했지만 아직까지 이행하지 않고 있다.

세계문화유산위원회는 두 차례에 걸쳐 결정문에서 ‘2015년 권고를 이행할 것을 요구하고 2019년 12월 1일까지 결과보고를 세계유산센터에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2018년 문화재환수국제연대는 ‘메이지 산업유산 모니터링’을 실시했다. 하시마(군함도)를 포함 7곳을 방문 조사한 결과, 단 한 군데도 강제노동을 인정하거나 희생자를 기리는 조치가 되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해설자들은 “당시 조선인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산업발전에 기여했다”고 터무니없는 주장만 늘어놓았다.

일제강점기 강제동원의 피해 문제는 여전히 일본의 과거사 청산에서 중요한 과제다. 2019년 한일관계가 악화된 이유도 강제징용자 피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가깝고도 먼 이웃 나라 일본에게 독일처럼 지속적인 반성과 진심 어린 사죄, 합당한 배상으로 나치 청산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기대하는 것이 어리석은 짓일까.

1267호 30면, 2022년 5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