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학 편집장과 함께하는 역사산책(38)

제국의 도시, 슈파이어(Speyer)

역사산책은 사건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역사서가 아니라, 당시의 사람들, 그들의 삶속으로, 그들의 경험했던 시대의 현장으로 들어가 함께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기쁨과 좌절을 함께 공유하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이다.

또한 작은 벽돌 한 장, 야트막한 울타리, 보잘 것 없이 구석에 자리 잡은 허름한 건물의 한 자락이라도 관심과 애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면, 그들은 곧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따라서 역사산책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일뿐만 아니라, 동시에 내 삶의 터전과의 대화이기도 하다.


1990년 슈파이어 시는 도시 탄생 2000년 기념식을 거행했다. 역산해 보면 슈파이어 도시가 기원전 10년에 건설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렇듯 고대 로마제국의 시작부터 지역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해온 슈파이어는 신성로마제국 시대에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바로 살리어가문(Salier Familie)의 힘이다.

신성로마 황제의 초대 가문인 오토(Otto)가의 하인리히 2세가 후손 없이 사망하자, 보름스(Worms)와 슈파이어 지역을 기반으로 한 살리어(Salier) 가문에서 신성로마황제가 배출되게 된다. 콘라드 2세이다. 이후 슈파이어는 신성로마제국의 실질적인 수도역할을 하게 된다.

이 때 지어진 슈파이어 대성당(Speyerer Dom)은 마인츠(Mainz)와 보름스의 대성당과 함께 독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로마네스크 성당으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슈파이어 도시에는 아직까지도 시민들의 가슴에 남겨져있는 슬픈 역사가 존재한다. 바로 프랑스에 의한 파과와 정복의 역사이다.

태양의 왕이라 알려진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팔츠선제후 계승문제에 개입하며, 당시 유럽의 대부분의 제후국들과 전쟁을 치르는데, “9년 전쟁”, 또는 “팔츠 왕위계승전쟁” 이라 불리는 전쟁이다.

당시 루이 14세는 슈파이어를 정복하고, 사람이 거주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파괴한다. 이 때 슈파이어 대성당도 심하게 훼손되었다. 루이 14세는 이에 더해 모든 슈파이어 시민들을 강제로 퇴거시켜 이들을 프랑스로 압송한다(1689년). 그리고 9년 후에야 비로소 슈파이어 시민들은 고향에 돌아올 수가 있었고, 이들은 궁핍과 눈물 속에서 폐허가 되어버린 슈파이어 시를 재건한다. 슈파이어의 자부심인 대성당은 1778년이 돼서야 완전히 복구된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 후 1794년 프랑스 군이 다시 슈파이어를 점령, 나폴레옹의 퇴위시기인 1815년까지 슈파이어 대성당은 창고 겸 병원으로 사용되는 수모를 겪게 된다. 이후 1차세계대전 결과에 따라 1918년부터 1930년까지 프랑스가 슈파이어를 점령하게 되고, 2차세계대전 이후 1945년부터 1946년까지 재차 프랑스에 의해 통치 받게 된다.

이러한 프랑스와 슈파이어의 관계는 1954년 독일과 프랑스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평화의 상징으로 세워진 “성 베른하르트(Sankt Bernhard)교회”의 건립으로 “공식적인 화해”를 하게 되지만, 여전히 시민들 가슴 속에 자리한 이 아픈 역사는 쉽게 지워지지 않고 있다.

◈ 왜 슈파이어인가?

제국도시 슈파이어, 황제들의 안식처

기록에 의하면 기원 800년 12월 25일, 교황 레오 3세가 당시 프랑크 국왕 칼 대제(Karl der Gross)에게 황제의 관을 씌우고, 서로마 제국의 부활을 선언했다. 중세의 신성로마제국의 탄생이다. 이후 1806년 나폴레옹에 의해 해체될 때까지 신성로마제국은 1000년의 역사를 갖게 되었다.

슈파이어는 칼 대제시대부터 중요 도시의 위상을 지녔다. 칼 대제뿐만 아니라 이후 황제들도 슈파이어를 자주 방문했으며, 948년에는 슈파이어 도시 전체를 둘러싸는 성벽 건설을 시작했으며, 오토 1세는 969년 주교관구 설치와 함께 자체 주조권과 관세권을 허용하며, 특권적 지위를 부여했다.

1024년 오토가문의 하인리히 2세가 후손 없이 사망하자, 보름스와 슈파이어 지역을 기반으로 한 살리어 가문에서 신성로마황제가 배출되게 된다. 바로 콘라드 2세이다. 이후 슈파이어는 신성로마제국의 실질적인 수도역할을 하며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한편 슈파이어는 제국의 도시이자 황제들의 안식처로서도 유명하다,

슈파이어대성당 지하에는 황제들의 묘소가 있는데, 이곳에는 신성로마황제와 황후 등 10명의 석관이 안치되어 있다. 이 지하 묘소는 콘라드 2세가 자신과 후대 황제들의 묘소로 지정하고 건축한 곳으로, 살리어 가문의 신성로마황제와 황후들의 자리하고 있다.

이런 연유로 슈파이어 대성당은 통치자들의 안식처인 영국의 웨스터민스터 사원, 프랑스 파리의 생 드니 대성당과 비교되곤 한다.

– ‘프로테스탄트명칭이 슈파이어에서 시작되다

1529년 4월 19일, 슈파이어 제국회의(Reichstag zu Speyer) 에 참석한 루터파 영주 6명과 14개 제국자유시 대표들이 위기감 속에 머리를 맞댔다. 3년 전 열렸던 슈파이어 1차 제국회의에서 어렵게 얻어낸 신앙의 자유가 위협받았기 때문이다.

마르틴 루터가 면죄부를 판매하는 교황과 교회에 대해 95개조의 반박문을 발표하며 개혁을 주창했던 게 불과 12년 전인 1517년 10월 말. 빠르게 세를 불려 나간 루터파가 ‘가톨릭 신앙의 도시’인 슈파이어에서 1526년 열렸던 1차 제국회의를 통해 제한적이나마 최소한의 신앙 자유를 인정받을 수 있었던 원인은 유럽의 정세 덕분이었다.

그러나 카를 5세는 슈파이어 2차 제국회의에 대리인을 내보내 루터파 제후들에게 가톨릭으로의 복귀를 강요했다.

루터파 제후들과 자유도시 대표들은 공포에 짓눌렸어도 굴복하지 않았다. 카를 5세의 신성로마제국에 맞서 종교적 자유를 인정한 3년 전 약속을 지키라고 역공했다. 똘똘 뭉친 루터파는 약속 불이행에 대한 ‘항의 서한(protestation von Speyer)’을 들이밀었다. 루터파가 이때 얻었던 별명인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항의하는 자)’는 시간이 흐르며 신교도 전체를 통칭하는 용어로 굳어졌다.

SchUM-Städte: 유대인 공동체 유적

지난해(2021년) 7월 라인강 유역에 유대인의 공동체가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이른바 “SchUM 도시” 라 불리는 이 세 도시는 Mainz, Speyer, Worms로서, SchUM이라는 단어는 이 세 도시의 중세시대 헬라어 명칭에서 유래되는데, (Sch)는 Schpira (Speyer), (U)는 Warmaisa (Worms) 그리고 (M) Magenza (Mainz)에서 앞 문자들의 조합이다.

유네스코의 SchUM 공동체 ‘세계유산’ 선정은 유대 역사의 보존과 함께 더 이상 한 국가가 민족의 배타적인 공간이 아니라, 다양성을 담보하는 생활공동체로의 발전에 기여하는 기념비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슈파이어 대성당 광장에서 매우 가까운 거리에 유서 깊은 유대인 지구가 있다. 슈파이어 대성당과 유대인 지구 사이의 근접성은 중세 시대에 특별했는데, 슈파이어의 주교는 1084년에 유대인 가족들에게 광범위한 특권과 토지를 제공함으로써 슈파이어로의 이주를 권장하였다. 그것은 오늘날 도시 개발 프로젝트와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Judenhof는 당시 슈파이어 유대인 구역의 종교 중심지였으며, 오늘날에도 예식이 거행된 건물의 유적이 서 있다. 1104년에 지어진 회당 바로 옆에는 1250년에 지어진 여성들을 위한 교회(Synagoge)가 있었으며, 조금 떨어진 곳에는 110년부터 1120년 사이 지어진 유대교 의식의 하나인 목욕의식이 거행된 Mikwe가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장식적인 요소에 있어서 당시의 기독교 건물과 유사하다는 점으로, 이는 기독교 장인들과 유대교 공동체의 긴밀한 협력을 시사하고 있다.

통일 총리, 헬무트 콜이 사랑한 도시

독일 통일의 주인공인 콜(Helmut kohl)총리는 슈파이어를 매우 사랑했다. 고향인 루드빅스하펜(Ludwigshafen)의 김나지움이 폐쇄되자, 슈파이어 김나지움에서 수학한 콜은 총리시절 중요 국가(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체코 등) 정상들을 자주 슈파이어로 초대하였으며, 그의 고별열병식(Große Zapfenstreich) 장소를 슈파이어 돔 앞 광장을 선정할 정도로 슈파이어에 깊은 애착을 갖고 있었다.

고별열병식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고향이나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을 택하는데, 슈뢰더 총리는 자신이 주총리를 역임한 니더작센의 하노버에서, 메르켈은 베를린을 선택한 바 있다.

콜 총리의 장례식은 유럽연합의 수도와도 같은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치러졌고, 이후 고향인 루드빅스하펜의 노제를 거쳐 그는 현재 슈파이어 성 베른하르트(Sankt Bernhard)교회 뒤쪽 작은 공원에 잠들어 있다.

브레첼의 탄생지 그리고 기술박물관

슈파이어에는 이러한 역사적 유적만이 있는 것이 아니기에, 자녀들과 함께 하루 소풍으로 다녀오기에도 적당한 도시이다.

슈파이어 시내에서는 브레첼 판매대를 자주 보게 되는데, 슈파이어 시민들은 브레첼이 슈파이어에서 탄생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실 브레첼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으나, 슈파이어만큼 도시 전체가 브레첼을 기념하는 겨우는 찾아볼 수 없다. 슈파이어 시는 매 해 7월 둘째 주 목요일부터 다음 주 화요일까지 “브레첼 축제(Bretzelfest)”를 개최하는데, 이는 슈파이어 최대의 시민축제로 치러지고 있다.

1910년에 처음으로 열린 “ 슈파이어 브레첼 축제”는 30만명이 축제에 다녀갈 정도로 라인강 상류지역의 대표적인 민속축제로 성장하였다.

슈파이어의 또 다른 대표적인 명소로는 기술박물관(Technik-Museum Speyer)이다.

슈파이어가 중세의 종교도시 이미지가 강하지만 오늘날 독일에서 매우 중요한 산업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항공기 부품 공장, 조선소 등 현대 기술의 집약체라 할 수 있는 고도 산업의 중심지가 바로 슈파이어다.

슈파이어 기술박물관에는 항공기, 잠수함, 헬리콥터, 기차, 심지어 우주왕복선 등의 실물이 전시되어 있는 곳. 전시를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용되던 기계들이다. 가령, 항공기는 루프트한자에서 사용하던 보잉747기를 기증받은 것이라고 한다.

단지 전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내부를 구경해볼 수도 있다. 첨단산업의 집약체를 그 속살까지 직접 볼 수 있는 것이다. 15만 평방미터 이상의 넓은 면적의 야외 곳곳에 전시되어 있고, 아이맥스 영화관도 함게 있다.

다음 호부터는 슈파이어 대성당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슈파이어 역사산책을 시작해 본다.

1288호 14면, 2022년 10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