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전쟁 – 전쟁과 약탈 그리고 회복 (20)

“보이는 대로 가져와라,” 소련의 ‘트로피 여단’ ➂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가 약탈한 문화재와 예술품이 속속 원래의 합법적 소유자나 그 상속인들을 찾아간다. 특히 반환 문제가 제기된 예술품과 문화재 소장자가 그 취득 경위와 역대 소장자의 획득 정당성을 입증하라는 ‘워싱턴 원칙’ 합의 이후 나치 시대 약탈품의 회복이 가속화하고 있다.
아시아에서 군국주의 일본에 의해 약탈당한 나라가 어디 한국뿐이랴. 중국과 대만을 비롯해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도 그렇다. 아프리카와 아시아권의 약탈 문화재 반환에 대해 이젠 식민제국주의를 거쳤던 국가들이 답할 차례이지만 가만히 있는 우리에게 그냥 돌려주지 않는다.
약탈 문화재 환수는 유물이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이동하는 단순한 물리적 위치 변경이나 한 나라의 컬렉션 부족 부분을 채운다는 문화적 자존심 높이기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다. 창조자들이 만든, 있어야 할 곳으로 되돌아가는 제자리 찾기라는 도덕적 당위성뿐만 아니라 약탈에 스며든 역사적 핏빛 폭력과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어루만지고 쓰다듬는 힐링의 길이다.

노다지를 발견한 트로피 여단’, 모두 모스크바로 이동

트로피 여단은 점령지에서 발견한 귀중품은 무엇이든지 소련으로 옮겼다. 주요 이동 수단은 기차였지만 선박과 항공기도 동원했다.

1945년 모스크바에 있는 푸시킨(Pushkin) 미술관은 작품이 든 상자를 무려 500개나 받았다. 작품이 너무 많아 처리할 수 없었던 푸시킨 미술관은 레닌그라드에 있는 국립 에르미타주Hermitage 미술관으로 상자들을 보냈다. 1946년 상반기 독일 도서관에서 약탈한 도서와 기록물 등 1만 2500상자와 함께 가져온 귀중품들은 모스크바에 있는 국립 역사박물관과 에르미타주 미술관뿐만 아니라 멀리 중앙아시아 투르크메니스탄과 타지키스탄까지 보내졌다.

소련 전리품 부대는 베를린 동물원 대피소에 포장된 예술품 상자들을 대거 발견했다. 나무 상자에는 히틀러 개인 컬렉션에서 나온 프랑스 화가 르누아르(Auguste Renoir, 1841~1919)의 1876년 작품 ‘계단에 선 여성(Woman on a Stairway)’, 드가의 ‘산책’, 쿠르베,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ázquez, 1599~1660) 등의 작품 수십 점이 나왔다.

시멘스 컬렉션에는 마네의 ‘검은 옷의 두 여인’을 비롯해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 1798~1863)의 꽃 그림, 스위스 태생의 상징주의 화가 페르디낭 호들러(Ferdinand Hodler, 1853~1918(가 그린 누드화 등이 있었다. 프랑스 사실주의 풍자화가 오노레 도미에(Honor Daumier, 1808~1879)가 1850~1853년에 그린 ‘세탁부(The Laundress)’와 ‘혁명’, 고야의 여성 초상화, 쿠르베의 풍경화, 드가의 발레리나가 공습 대피소에서 발견되었다.

세 개의 상자에는 베를린 ‘선사 및 초기 역사박물관’에서 나온 고고학보물이 가득했다. 베를린 북쪽 에베르스발데의 B.C. 6세기 유물, 콧부스 A.D. 5세기 유물 등이었다. 한 상자에는 구박물관에서 나온 보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곳에서 발견된 상자들은 모스크바로 이동했고, 대다수는 여전히 소련을 계승한 러시아에 남아 있다.

전쟁 기간에 많은 독일 미술관들은 소장품을 꼭꼭 숨겼다 1945년 대공습이 시작되자 대다수 걸작들을 박물관 지하창고나 대피소 및 동굴 등으로 옮겼다. 트로피 여단은 소비에트 적군의 진격에 맞춰 숨겨진 예술품을 찾아다녔다. 이들이 활동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호엔발트 마을의 지하 대피소에서 대규모 컬렉션을 발견했는데, 이 소장품들이 처음으로 독일에서 소련으로 이동한 중요 예술품들이다.

이어 수개월 동안 트로피 여단의 이와 비슷한 탐색이 계속 이어졌다. 전리품 부대는 소련 점령지의 미술관과 개인 소장품들을 싹쓸이했다. 250만 점의 예술품과 1000만 권의 도서와 원고를 가져갔다. 여기에는 대가의 작품,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1397~1468)가 인쇄한 성경들, 메로빙거 왕조(Merovinger dynasty, 5~8세기 프랑크 왕국 최초의 왕조)의 보물과 같은 국가적 자부심의 유물도 싹 가져갔다.

◈ 냉전의 서막

■ 소련의 비밀 약탈은 연합군 불신의 시작

소련이 전리품 부대, 즉 트로피 여단을 창설한 목적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 다른 연합군뿐만 아니라 소련도 참여하는 연합군통제위원회(ACC)의 목적과 배치된다. 나치 약탈품이 발견되면 ACC는 예술품을 합법적 소유자나 그 국가에게 반환했다. 그러나 소련은 트로피 여단 임무가 연합군의 목표와 달라 비밀리에 운영했다

트로피 여단의 활동이 연합국에 알려지자 소련 적군은 드레스덴에서 예술품을 모아 모스크바로 실어 나르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나치가 약탈한 컬렉션을 찾아 모아 반환하던 연합군 MFAA는 나치가 소련에서 약탈한 것을 되돌려주었기에 독일에 남은 소련 문화재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소련은 자신들이 약탈한 예술품이 나치 독일의 재산인지, 개인 소장품인지에 상관없이 가져감으로써 논란을 일으켰다. 적군이 약탈한 예술품 상당수는 나치의 약탈품이었고, 곧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의 유물이었다.

전쟁 기간에 소련이 계속해서 그리고 의도적으로 점령지에서 저지른 문화재 약탈 행위를 같은 승전국인 미국과 영국, 프랑스에 숨겼다는 것은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두 진영이 서로 불신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리품 부대를 비밀리에 운영한 것은 소비에트가 서방 국가들을 공개적이지는 않지만, 적으로 간주했다는 의미다. 냉전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

기도 전에 서막이 올랐다.

소련 정부는 처음에는 전리품으로 획득한 대규모 문화재 및 예술품 확보 사실을 비밀로 유지했지만, 1946년 스탈린이 소련 영향권에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정당을 단합할 목적으로 이 정책을 바꾸었다. 소련은 점령한 다른 나라들을 ‘괴뢰 국가’로 두면서 동독과 폴란드 같은 위성국가는 소련에 반환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1299호 30면, 2023년 1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