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학 편집장과 함께하는 역사산책(43)

독일 정신의 발원지 보름스(Worms)

역사산책은 사건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역사서가 아니라, 당시의 사람들, 그들의 삶속으로, 그들의 경험했던 시대의 현장으로 들어가 함께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기쁨과 좌절을 함께 공유하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이다.
또한 작은 벽돌 한 장, 야트막한 울타리, 보잘 것 없이 구석에 자리 잡은 허름한 건물의 한 자락이라도 관심과 애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면, 그들은 곧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따라서 역사산책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일뿐만 아니라, 동시에 내 삶의 터전과의 대화이기도 하다.

중세 게르만 문학 서사시 니벨룽엔(Nibelungenlied)의 전설이 전해 내려오며, 라인강이 흐르는 보름스는 루터(Martin Luther)의 외침과 종교개혁의 정당성을 이끌어낸 역사의 장소이다. 이렇듯 보름스는 자연과 개신교라는 종교 그리고 게르만족 고유의 문화를 아우르는 독일 정신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일반인들에게는 루터에 대한 종교재판이 열린 도시, 루터가 거대한 위협과 핍박 속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지켜낸 곳으로 보름스는 잘 알려져 있다. 2021년 보름스 시는 이 종교재판을 기념하기 위해 “500 Jahre Luther in Worms”라는 표어로 대대적인 행사를 준비하였으나, 코로나로 인해 많은 행사들이 취소되어 많은 아쉬움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루터에 대한 종교재판의 유명세로 인해 2000년 역사 도시 보름스의 가치가 매우 제한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점도 사실이다.

이번 “역사산책 보름스” 편에서는 중세시대 중요 도시로서의 보름스, 루터의 종교재판 현장,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유대인공동체 유적, 그리고 독일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니벨룽엔의 노래”의 주 무대 보름스를 함께 살펴보며, 보름스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한다.

왜 보름스인가?

보름스는 고대 로마의 아우구스투스시대 (기원전 27년 – 기원후 14년)에 이미 로마군의 중요 주둔 도시로서 확고한 지위를 갖고 있었으며, 중세시대에는 유럽 전역에서 몇 안 되는 대도시(Metropole)의 위상을 보유, 보름스 대성당은 황제의 돔(Kaiser Dom)이라 칭해질 정도였다.

중세 보름스의 상징 보름스 대성당

1521년 열린 루터에 대한 종교재판은 독일 개신교, 루터파의 탄생을 알리는 출발점이었고, 이후 독일 사회 전반에 대해 큰 영향을 끼쳤다. 이른바 독일적인 것이라 부르는, 근검, 절약, 자선활동, 공교육 강화 등이 루터의 종교개혁과 그의 생활이 사회에 끼친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대표적인 독일 중세 서사시인 “리벨룽엔 노래(Nibelungenlied)”는 게르만의 중세 기사문학(驥士文學)의 최대걸작이자 최고의 게르만 고전(古典) 중의 하나로 꼽힌다. 그 주된 무대가 바로 보름스이다.

바그너는 <니벨룽의 노래>와 고대 북유럽 신화를 참조하여 4부로 구성된 방대한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를 작곡했다. 아리아인들의 정기를 찾으려했던 히틀러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기는 했지만, 독일인들의 정신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꼭 한번 대본을 읽고, 전 악극을 관람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이다.

또한 보름스는 라인 강의 작은 예루살렘이라 불리며, 중세 시대의 중요한 랍비들이 거주하고 활동했던 곳으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대 문화에서 높은 명성을 누리고 있다.

중세의 대도시(Metropole) 보름스

보름스는 원래 켈트족의 정착지로서 보르베토마구스(Borbetomagus)라고 하였다.

기원전 14년 네로 드루수스(Nero Drusus)가 지휘하는 로마군이 점령하여 요새화함으로써 키비타스 방기오눔(Civitas Vangionum)으로 알려졌으며, 5세기에는 부르고뉴 지방의 수도가 되었다.

435년 주민들이 로마 총독 플라비우스 아이티우스(Flavius Aetius)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아이티우스는 훈족 군대를 동원하였고 이들은 436년 도시를 파괴하였다.

훈족의 보름스 파괴와 부르고뉴 왕국의 이야기가 서사시 《니벨룽의 노래》(1200년경)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주교관구 성립 이후 보름스는 가톨릭의 중심지가 되었고, 이어 신성로마 제국이 형성되자, 신성로마제국의 주요도시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신성로마 제국의 전체회의라 할 수 있는 제국의회가 100여 차례나 보름스에서 열렸는데,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1076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폐위를 선언한 주교회의, 1122년 보름스협약으로 이어진 회의, 1495년 황제 막시밀리안 1세 때의 의회,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황제 카를 5세 앞에서 자기의 신념을 표명한 1521년의 의회 등이다.

보름스: 라인 강의 작은 예루살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유대인 묘지 “Heiliger Sand”

라인 강의 작은 예루살렘으로 불리는 보름스는 중세 시대의 중요한 랍비들이 거주하고 활동했던 곳으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대 문화에서 높은 명성을 누리고 있다. 보름스의 유대인 공동체는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공동체 가운데 하나로, 12세기에 마인츠와 슈파이어와 함께 SchUM 공동체를 형성 그 전성기를 누렸다. 최초의 유대인 회당(Synagoge)은 1034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1212년에는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것 여성들을 위한 예배당이 건립되었다. 이 여성을 위한 예배당이자 학교는 Speyer에도 영향을 주어, Speyer에도 건립되게 된다. 이렇듯 SchUM 공동체 도시들은 긴밀한 교류를 갖고 있었다.

교회당 인근의 “Tanzhaus”는 모임과 축제 행사에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그 부속건물은 오늘날 도시 기록 보관소와 유대인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보름스에는 중세시대의 많은 유대인 유적이 남아있다.

교회당 지역 외에도 유대인 묘지인 “Heiliger Sand”도 세계유산으로 선정되었는데, 약 2,500개의 보존된 묘비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058년의 것이며 가장 최근 것은 1930년대의 것이다.

보름스는 2021년 마인츠, 슈파이어와 함께 SchUM 도시(유대인 공동체)로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루터: 종교재판에 서다 내가 여기 섰나이다

루터광장(Lutherplatz)에 서있는 루터동상

보름스대성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루터광장(Lutherplatz)이 있다. 이 광장에는 1868년 프로이센의 왕 빌헬름 1세를 비롯 2만여명의 인파가 모인가운데, 루터동상의 제막식이 열렸다.

루터 동상 밑에는 “나는 여기에 서 있다. 나는 달리 할 수 없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Hier stehe ich, ich cann nicht anders. Gott helfe mir, Amen)”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 말은 루터가 1521년에 보름스 의회와 황제 앞에서 한 유명한 말이다. 독일황제와 의회가 루터에게 그의 개혁사상을 취소하라고 할 때에 결연한 자세로 그들 앞에 한 말이다.

영국의 역사학자 토머스 칼라일은 루터가 보름스 제국의회에 죽음을 무릅쓰고 출두한 일을 유럽 역사상 최대의 장면이며,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이 장면을 인류의 근대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지옥 그 자체에 정면으로 도전하고자 했던 루터의 행위는 두려움 없는 최고의 용기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그가 일으켰던 신학적 운동은 계속 파져나가 16, 17세기 유럽 전역에서 꽃을 피웠다. 루터의 신학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칼뱅의 교리는 프랑스와 영국, 스위스 전역에 영향을 끼쳤으며, 프랑스의 위그노와 영국의 청교도의 시작을 이끌었다.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은 단지 기독교 역사뿐 아니라 근대 유럽의 정치, 경제, 문화를 아우르는 총체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계기가 됐다. 즉 루터의 종교개혁은 중세의 봉건적 잔재를 떨어내고 근세를 구분 짓는 하나의 이정표가 되었으며, 근대 자본주주의 기반이 되는 사상적 바탕을 제공했다.

루터에 대한 재판과 이후 종교개혁 전개과정은 이번 역사산책 “루터광장 편”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한다.

보름스: 게르만 영웅설화 <니벨룽엔 노래>의 무대

보름스를 얘기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다름 아닌, <니벨룽의 노래>(Nibelungenlied)라고 하는 게르만 영웅설화이다.

이야기는 로마제국이 멸망의 기로에 접어드는 5세기 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로마제국의 방어에 협력하는 게르만 족과 로마제국을 침공하는 게르만 족들끼리 전투가 적지 않았다. 그러다가 서유럽은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의 침입으로 완전 공포의 도가니에 빠졌다. 그러나 훈족은 중부 라인 강 서쪽 유역 카탈라우니아 평원에서 로마군과 동맹한 게르만족과의 치열한 전투에서 유럽 땅을 유린한 지 처음으로 패배를 맛보았다. 한편 당시 보름스를 중심으로 하는 주변의 중부 라인 강 유역은 스칸디나비아에서 남해 해온 게르만족의 일파인 부르군트족의 거점이었는데 수도가 바로 보름스였다. <니벨룽의 노래>의 시대적 배경은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이 그들의 유럽거점이던 헝가리로 돌아간 다음으로 추정된다. 한편 독일에서는 아틸라(Atila)를 에첼(Etzel)이라고 한다.

니벨룽겐 다리에 세워진 53m 높이의 니벨룽엔 탑

이 대서사시의 작가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구성이나 내용면에서 게르만의 중세 기사문학(驥士文學)의 최대걸작이자 최고의 게르만 고전(古典) 중의 하나로 꼽힌다. 한편 바그너는 <니벨룽의 노래>와 고대 북유럽 신화를 참조하여 4부로 구성된 방대한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를 작곡했다.

보름스는 바로 이 게르만 설화의 무대이기 때문에 곳곳에 그와 관련된 장소들이 보인다. 예로, 시내 중심에는 하겐 길(Hagen Strasse)과 지크프리트의 분수가 있다. 또 라인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이름은 ‘니벨룽 다리’이다. 또 니벨룽엔 박물관(Nibelungen Museum)은 이 게르만 설화를 체험할 수 있는 박물관이다. 그뿐 아니라 매년 여름 니벨룽엔-페스트슈필레(Nibelungen-Festspiele)라고 하는 연극공연 행사가 성대히 열린다.

1300호 20면, 2023년 1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