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유네스코 세계유산(54)

바이로이트 축제극장(Richard-Wagner-Festspielhaus)

독일은 서독 시절이던 1976년 8월 23일 유네스코 조약에 비준한 이래, 48건의 문화유산과, 3건의 자연유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탈리아와 중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세계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교포신문사에서는 2022년 특집 기획으로 “독일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문화유산을 매 주 연재한 바 있다.
2023년에는 2022년 기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신청된 8곳과 신청 후 자진 탈퇴, 또는 유네스코에 의해 등재거부된 문화유산을 살펴보도록 한다. -편집실

1876년 8월 13일 독일 바이에른의 소도시 바이로이트는 이른 아침부터 유럽 전역에서 온 유명 인사들로 붐볐다. 오후 6시부터 시작되는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개막 공연 ‘라인의 황금’을 보기 위해서였다. 1875년 개관 예정이었으나 재정난으로 1년 늦춰졌다.

객석에는 내로라하는 정치가, 언론인, 과학자, 시인, 음악가, 화가, 조각가, 건축가, 은행가, 백작 등이 자리를 잡았다. 프로이센 황제 빌헬름 1세, 브라질의 돔 페드루 2세 등 세계 각국의 왕족 57명을 비롯해 니체, 톨스토이, 생상, 말러, 브루크너, 그리그, 리스트, 차이콥스키 등이 참석했다. 이밖에도 독일의 유명 오페라 극장의 총감독, 60여명의 음악평론가가 함께 자리했다.

‘니벨룽의 반지’4부작 초연으로 개막

바그너의 작품만 상연하는 것으로 유명한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의 개막, 바이로이트 축제와‘니벨룽의 반지’4부작 전곡 초연이 시작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루드비히 2세는 8월 6일‘라인의 황금’무대 리허설 때 바이로이트에 도착했다. 무대 리허설은 네 차례나 보았다. 바이로이트에서 마차로 1시간 걸리는 에르미타주 성에 묵었다. 리허설이 계속되는 동안 바이로이트 시내는 아름다운 조명으로 장식되었다. 프로이센 왕 빌헬름 1세가 바이로이트에 도착하자 출연진과 오케스트라 단원이 모두 역에 마중을 나갔다.

한스 리히터가 지휘한 ‘라인의 황금’은 2시간 31분만에 끝났다. 1952년 요제프 카일베르트가 2시간 30분짜리 녹음을 발표하기 전까지는 최단 기록이었다.

러시아 특파원 자격으로 참가한 차이콥스키는 ‘우리의 먼 후손들까지도 기억할 일이 바이로이트에서 벌어졌다”고 썼다. 시골 동네에 갑자기 들이닥친 수많은 VIP 손님들은 축제 기간 내내 숙식을 해결하느라 한바탕 전쟁을 치러야 했다. 차이콥스키의 표현을 빌리자면 ‘치열한 생존경쟁’이었다.

바이로이트 극장이 건설되기 까지

1870년 4월 바그너는 아내 코지마와 함께 바이로이트를 방문했다. 몇년전 여행 도중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도 퍽 인상 깊었던 도시였다. 이번에는 축제극장 후보지를 물색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바이로이트에 매력을 느낀 이유는 우선 조용하고 한적한 소도시였기 때문이다. 일상의 번잡함을 훌훌 털어내고 오로지 음악에만 심취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져 있었다.

바이로이트는 작은 마을이어서 바그너 축제를 일단 시작하면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어서 오로지 자신의 예술세계에만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마련돼 있었다. 또한 바이로이트에는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오페라 극장 중 하나인 변경백 극장(Markgaefliches Opernhaus)이 있었다. 음향이 뛰어나고 무대가 넓은 극장이었다.

바그너 축제를 유치하면 지역 경제를 살릴 수 있다고 판단한 바이로이트 시의회에선 변경백 극장을 마음대로 쓰라고 내놓았다. 하지만 바이로이트 변경백 극장 구석구석을 돌아본 바그너는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오케스트라 피트가 18세기 바로크 오페라에 맞게 작게 설계된 것이어서 대편성 오케스트라를 필요로 하는 바그너 오페라엔 맞지 않았다.

결국 바이로이트의 지방 유지들이 나서 축제 극장 신축을 도와주기로 했다. 바그너는 땅주인이 대지를 팔지 않을 경우 다른 곳으로 가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바덴바덴과 바드 라이셴할에선 땅을 무상으로 주겠다고 했고 다름슈타트에서는 극장까지 지어주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바그너는 1872년 스위스에서 바이로이트로 이사했다. 축제극장 착공식은 1872년 5월 22일 바이로이트 변경백 극장에서 열렸다. 바그너는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지휘했다.

바그너의 피땀 어린 노력으로 개관

바그너는 옛 후원자 루드비히 2세를 찾아가 긴급 지원을 요청했다. 루드비히는 국채 발행으로 1874년 1월 10만 탈러를 내놓았다. 몇해 전엔 바그너 가족이 지낼 수 있는 저택‘반프리트(Wahnfried)’을 지을 수 있도록 2만 5000 마르크를 하사했다. 설계는 칼 뵐펠(Carl Woelfel)이 맡았다. 건물 파사드 벽화 아래 ‘반프리트’라고 적혀 있는데 ‘광기가 잠들다’라는 뜻이다. 바그너가 붙인 이름이다. 왼쪽 창문 위에는 ‘여기서 몽환과 평안을 찾다’(Hier wo meine wahnene freiden fand)라고 씌어있다.

앞뜰에는 루드비히 2세의 흉상이 서 있고, 뒷뜰에는 바그너 부부가 잠들어 있다. 1976년 바이로이트 축제 100주년을 기해 반프리트는 리하르트 바그너 박물관으로 탈바꿈해 매년 바그너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총건축비는 42만 8000 마르크. 3500만 프랑(2800만 마르크)이나 소요된 파리 가르니에 오페라에 비해 70분의 1밖에 안되는 돈이었다. 하지만 바그너는 어렵사리 이 돈을 모았다. 코지마는 “극장의 벽돌 하나 하나엔 우리 부부의 피가 묻어있다”고 했다.

멀리서 보면 낡은 창고나 기차역 정도로 보일지 모르겠다. 바그너의 아내 코지마도 처음엔 ‘앗시리아의 대저택 같다’고 했다. 니체는 ‘뿔이 네 개 달린 거대한 니벨룽 구조’라고 했다. 스트라빈스키는 ‘음울한 시체 소각장’같다고 비꼬았다. 로맹 롤랑은 ‘문화시설이라기 보다는 공장 같다’고 말했다.

다음 호에서는 극장의 특징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

1304호 31면, 2023년 2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