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정신의 발원지 보름스(Worms) ➅
역사산책은 사건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역사서가 아니라, 당시의 사람들, 그들의 삶속으로, 그들의 경험했던 시대의 현장으로 들어가 함께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기쁨과 좌절을 함께 공유하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이다.
또한 작은 벽돌 한 장, 야트막한 울타리, 보잘 것 없이 구석에 자리 잡은 허름한 건물의 한 자락이라도 관심과 애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면, 그들은 곧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따라서 역사산책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일뿐만 아니라, 동시에 내 삶의 터전과의 대화이기도 하다.
중세 게르만 문학 서사시 니벨룽엔(Nibelungenlied)의 전설이 전해 내려오며, 라인강이 흐르는 보름스는 루터(Martin Luther)의 외침과 종교개혁의 정당성을 이끌어낸 역사의 장소이다. 이렇듯 보름스는 자연과 개신교라는 종교 그리고 게르만족 고유의 문화를 아우르는 독일 정신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일반인들에게는 루터에 대한 종교재판이 열린 도시, 루터가 거대한 위협과 핍박 속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지켜낸 곳으로 보름스는 잘 알려져 있다. 2021년 보름스 시는 이 종교재판을 기념하기 위해 “500 Jahre Luther in Worms”라는 표어로 대대적인 행사를 준비하였으나, 코로나로 인해 많은 행사들이 취소되어 많은 아쉬움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루터에 대한 종교재판의 유명세로 인해 2000년 역사 도시 보름스의 가치가 매우 제한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점도 사실이다.
이번 “역사산책 보름스” 편에서는 중세시대 중요 도시로서의 보름스, 루터의 종교재판 현장,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유대인공동체 유적, 그리고 독일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니벨룽엔의 노래”의 주 무대 보름스를 함께 살펴보며, 보름스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한다.
◈보름스시내에서 2
Thalia 서점이 입주한 밤볼더 대저택(Wambolder Hof)에서 우리는 유대인 거리(Juden Gasse) 방향으로 Kämmerstraße를 조금 걷다보면 왼편에 광장이 나타난다. 보름스에서는 가장 큰 광장으로 루드비히 광장(Ludwigsplatz)이다.
루드비히 광장.
이 광장은 헤센-다름슈타트 공국의 4대 대공인 루드비히 4세와 보불전쟁(프로인센과 프랑스의 전쟁, 1870-1871, 프로이센의 승리) 시 참전용사들을 기리기 위해 1894년 건설되었다.
이 장소는 이전부터 군사 퍼레이드가 벌어지는 등 공공장소로 쓰였던 광장으로, 1894년 루드비히 과장 건설 당시에는 루드비히 기념탑과 그 앞에 넓은 호수와 조경으로 꾸며졌었다.
그런데 루드비히 4세는 헤센-다름슈타트 대공이었는데, 어떻게 보름스에 기념탑이 건설된 것인가?
나폴레옹이 패퇴하고, 유럽은 비인체제(또는 당시 오스트리아 재상의 이름을 딴 메테르니히 체제)에 의해 유럽 봉건영주들의 영토가 재조정되었다. 그 와중에 헤센-다름슈타트트 공국은 마인츠와 더불어 보름스까지 그 영토를 확장하게 된 것이다. 특히 보름스는 1918년까지 헤센-다름슈타트트 공국에 속하게 된다.
루드비히 14세의 아들인 에른스트 루드비히 대공에 의해 건설된 루드비히 광장은 그 아름다움과 쾌적함으로 시민들의 사랑을 받았는데, 2차 세계대전 당시 심하게 파괴, 훼손되었다.
이후 연못은 메워졌고, 시내 공공 주차장으로 사용되다, 1974년 지하주차장이 건설되면서, 오늘날의 모습으로 재 변경되었다.
루드비히 기념탑 양 옆에는 헤센-다름슈타트 대공국의 상징인 사자가 자리하고 있다.
한편 르드비히 광장과 성 마틴교회 사이의 노란색 건물도 보름스에서는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바로크 건축물의 하나로 눈길을 끌고 있다.
성 마틴(St. Martin) 교회
루드비히 광장 오른편에는 성 마틴(St. Martin) 교회가 교회가 자리잡고 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이 교회는 루드비히 광장과 함께 보름스 시내에서 시민들의 휴식처로 매우 사랑받고 있다.
이 교회는 로마 군인으로서 4세기 경 보름스에서 치러진 게르만 족과의 전투에서, 군 복무를 거부한 성 마틴(Heiliger Martin von Tours)에게 헌정되었다고 한다.
성 마틴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성인으로 그의 생애는 동시대를 살았던 성인 전기 작가인 술피키우스 세베루스에 의해 기록되었다. 추위에 떨고 있는 거리의 한 걸인에게 자신의 외투 절반을 잘라 주었다는 것과 로마 제국의 군인으로 징집되었던 그는 자신의 기독교 신앙과 맞지 않는다고 여겨, 최초의 양심적 병역 거부자가 되었다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양심적 병역 거부 현장이 바로 보름스인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교회는 마틴이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로 수감된 지하감옥 자리에 서 있다고 한다.
이 교회는 팔츠 왕위 계승 전쟁 동안 루이 14세의 군대에 의해 심하게 손상되었으며 거의 크게 훼손되었다. 이후 내부 제단은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이후 1872년에서 1887년 사이에 마을 목사이자 Worms의 명예 시민인 Nikolaus Reuss(1809-1890)에 의해 내부와 외부가 개조되다. 그 과정에서 내부에서 중세 벽화가 발견돼 복원되기도 하였다.. 바로크 양식의 제단은 네오 로마네스크 양식의 새 제단으로 교체되었다.
마틴의 성문(Martinspforte)
루드비히광장을 지나 Kämmerstraße를 계속 걸어가면 어느덧 교차로가 나오고, 건너편에는 유대인 거리(Judengasse)가 나온다
그러나 교차로에서 Kämmerstraße를 되돌아보면, 폭은 좁지만 아름다운 건물이 보인다. 바로 마틴의 성문(Martinspforte)이다.
성문은 보이지 않는데, 왜 이름은 성문이 되었을까?
원래 이 거리로 보름스 성벽이 지나갔고, 마틴의 성문(Martinspforte) 건물 1층은 아치형의 시내로 진입하는 성문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30년 전쟁과 팔츠왕위계승 전쟁 등으로 심하게 파괴되었고, 이 건물은 1779년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오늘날의 모습은 1904년 건축가 Georg Metzler에 의해 원형에 충실하게 재건된 것이다.
1621년 4월 16일 마틴 루터가 이 성문을 통해 보름스 종교재판장으로 들어갔다고 하며, 당시 수많은 주민들과 종교인들이 이 성문 앞에서 마틴 루터를 기다리며, 큰 지지와 용기를 주었다고 한다.
보름스: 라인 강의 작은 예루살렘
마틴의 성문(Martinspforte) 건너편에는 유대인 지구의 초입인 유대인 거리(Judengasse)가 나온다
라인 강의 작은 예루살렘으로 불리는 보름스는 중세 시대의 중요한 랍비들이 거주하고 활동했던 곳으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대 문화에서 높은 명성을 누리고 있다. 보름스의 유대인 공동체는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공동체 가운데 하나로, 12세기에 마인츠와 슈파이어와 함께 SchUM 공동체를 형성 그 전성기를 누렸다.
최초의 유대인 회당(Synagoge)은 1034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1212년에는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것 여성들을 위한 예배당이 건립되었다. 이 여성을 위한 예배당이자 학교는 Speyer에도 영향을 주어, Speyer에도 건립되게 된다. 이렇듯 SchUM 공동체 도시들은 긴밀한 교류를 갖고 있었다.
유대인 거리를 따라 갇다보면, 유대인 교회공동체인 시나고게가 나오고, 박물관도 보인다.
교회당 인근의 “Tanzhaus”는 모임과 축제 행사에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그 부속건물은 오늘날 도시 기록 보관소와 유대인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보름스에는 중세시대의 많은 유대인 유적이 남아있다.
또한 이 유대인 거리를 따라 걷다보면, 보름스 성벽과 성문(Raschitor)을 만날 수 있다. 한적한 정원과도 같은 이 성벽이 있는 지역에서는 중세 천년 보름스의 영화를 느껴볼 수가 있다.
성문(Raschitor)에서 Karolinger Strasse와 이후 Römer Strasse를 따라 시내로 올라오면 멀리 대성당이 보인다. 그 과정에서도 다양한 양식의 교회들을 만나게 되며, 마틴 루터에 의해 뿌려진 개신교의 역사를 살펴볼 수가 있다.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도보로 10분 정도 걸리는 성모교회(Liebfrauenkirche)도 방문해 볼 것을 권한다.
1316호 20면, 2023년 5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