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독광부 60년 (5)

1963년 12월 22일 오후 6시,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뒤셀도르프시의 ‘뒤셀도르프 공항’. 에어 프랑스 제트기 한 대가 도착했다.
탑승객들이 차례차례 내리기 시작했다. 말쑥하게 신사복을 차려 입은 검은 머리의 한국인, 바로 파독광부 1차1진이었다. 1차1진은 모두 123명. 그리고 5일 12월 27일, 1차1진 나머지인 124명이 독일에 도착했다. 이렇게 1차 1진 247명을 시작으로 파독 근로자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교포신문사에서는 파독 광부 60주년을 맞아, 1월부터 매월 4 째주 “파독광부 60년” 특집을 이들이 도착한 12월 22일까지 12회에 걸쳐 연재한다. 독자들의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린다. -편집자 주

한국 광부들의 교회조직 태동

지난 회까지 살펴본 역사적인 뒤 배경으로 한국 광부들이 서독에 진출하면서부터 외국이란 특수한 일상 생활 가운데서 첫째는 언어 장벽 때문에 모두들 무척 큰 어려움 들을 겪었는데, 이러한 돌파구로 같은 동족이라는 동질성과 한국인이라는 자긍심을 서로가 고취시킬 수 있던 자연스러운 그 움직임으로 교회 활동을 들 수가 있다.

이러한 동기로 시작한 첫 움직임을 어느 정도 대충 밝혀 주는 노르드라인 베스트팔렌 주 한인 교회 연합회(NRW) 소속 아헨 교회(Aachen)의 첫 움직임을 밝혀 주고 있는 기록들이 현재까지 남겨져와, 이를 한 대표적인 예로 이곳에다 인용한다.

1963 년 12 월 21 일에 처음으로 독일로 진출하였던 한국인 제 1 차진 광부 60 명이 에쉬바일러 광산(EBV)소속인 「Merkstein Alsdorf」 광산에 첫 취업하게 되고, 그 중 10 여명의 신교인 전동희, 조종호, 이기호, 이윤화, 김 근철 형제들이 독일교회를 나가면서 시작됐다.

그리고 그 이듬해 10 월에 다시 「안나」 광산에 100 명, 인근의 「고울라이」 광산에도 100 명이 새로 도착하면서 독일인 교회 안에서 한국인들끼리 뭉치면서 한국적인 교회 활동이 처음 싹트기 시작하였고, 또 당시 남성 합창대까지 조직되는 활발한 움직임이 있었다.

초대 한인교회의 첫 목회자 이영빈 목사

그러는 가운데 괴팅겐대학에서 유학한 이영빈목사가 헤센 주「라인란드(Rainland)」신교구 안에서 한국인들을 위한 첫 목회자로 추대되어, 1965년 정초부터 1969년 10월까지 정식 목회 활동을 시작하면서 이 지방 한인들을 모은, 즉 나그네 교인들을 위하여 한 달에 한번씩 이 지역을 각각 심방하며 예배 인도를 시작했다.

이곳에서 「나그네 교인」이라고 지칭함은 당시 한독 양국 정부는 처음부터 한국인 광부들은 단기 3 년간의 취업 순환제(Rotation)라는 불리한 임시 고용 계약(Abkommen über die Beschäftigung von koreanischen Gastarbeitern in D-Bundesrepublik)을 체결하므로, 즉 이 취업기간이 끝나는 즉시 다른 노동자로 매번 교체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임시 노동 계약은 독일이 전후의 피해를 급속히 회복하고 신흥 공업 국가로 성장하자 힘든 육체노동을 아예 기피하는 국민들로 인해서, 광산과 병원 종사 노동력이 절대로 부족하자 그 해결책으로 1955년 12월 20일에 가에타노 마티노(Gaetano Martino) 이태리 외무 장관과 안톤 스트로쉬(Anton Strosch) 독일 노동청 장관이 양 국가 간의 노동력 흡수 계약을 로마에서 처음으로 체결하였었다.

그리고 나서 이때부터 또 독일은 다른 제 3 국인 스페인과 일본, 모로코, 터키 등지에서도 같은해에 약 10만 명에 해당하는 값싼 외국 노동력을 수입하면서, 그러나 독일은 이민국이 아니라는 노동정책을 앞세워서 단기 임시 고용 계약을 각각 적용했었는데, 결국 한국인들도 이 같은 경우에 해당하는 취업 조건으로 독일에 입국했던 셈이다.

그랬기 때문에 젊어서 가족들과 헤어지고, 또한 외국이란 특수한 환경 아래다 벅찬 육체노동까지 감수해야 했던 그들의 심령을 위로하는 한편, 또한 여러 가지의 생활 문제를 극복하도록 조력하는 상담자 역할까지를 이목사님이 함께 사역하며, 이 지방 10여 교회를 순회할 때 매달 약 3~4천 ㎞를 강행군 하였다.

그리고 1965년 10월에 3 진, 1966년 4월에 4진인 120 명이 또다시 도착하면서 자연히 교인수도 불어나며 1971년 1월에 교회 이름을 “아헨 한인 교회”로 명명, 그 후 정식 교회가 출발한 셈이다.

1963 년 12 월 21 일자로 NRW 아헨 광산 지역에 파독 된 광부 제 1 차 진 일행
(가장 왼쪽이 김 근철 목사의 당시 모습)

한편 또한 1974년 이후는 튀빙겐 대학에서 수학하신 한승홍 전도사(목사, 한신대 교수)가 한 달에 두 번씩 이곳 교회를 인도해 오다, 1975 년부터는 매 주 인도하면서 교인수도 약 70 여명으로 크게 부흥하였다.

이렇게 1966년 말까지는 「알스도르프」 인근 지방에는 약 500 명이 넘는 한국인들이 거주했으나 광부 제 1차 7진이 도착한 이 후였던 1967년부터는 광부들의 서독 진출의 길이 막히면서, 그리고 3년 계약을 마친 광부들은 귀국하는 바람에 교인수도 자연히 차츰 줄게 되었다.

이와 같은 직접적인 이유로는 초창기 때의 한국인 광부들은 원래 7~80%이상이 고학력자 출신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한국인 광부 사회에서는 마치 집단 군생활과 비등한 상하 서열이 엄격하게 논해지고, 또한 광산통역에 의해서 마치 군 질서를 방불케하는 각가지의 통제가 따랐다.

한편 1965년 4월달에 카스트롭 라욱셀의 클뢰크너 회사(Kloekner AG) 소속 한국인 광부 약 150명이 3일 동안 집단 취업을 거부한 사건이 일어났었다. 그리고 1970년도에도 직장에서 외국인에 대한 멸시 행위와 한국인 단기 취업 조건을 개선하고자 집단 항의했던 에쉬바일러 광산 소속 73명의 한국인 광산 노조(Eschweiler Bergwerksverlein) 조합원들이 3일 동안의 취업을 거부한 단체 파업 스트라이크 사건이 일어났다.

결국 독일 광산 업계로 하여금, 한국인 광부 인력 수입의 문제성이 새롭게 재고되면서 이 프로그램에 일단 종지부를 찍는 결과를 낳았다

또 다른 간접적인 악재로는 1967년 7월에 소위 “동백림 사건”이 일어났던 시기로서, 한국 정부가 독일 국가의 고유 치외 법권까지 무시하면서 정보부원들이 윤이상 교수 내외와 이수길 박사등 교포 16명을 간밤 사이에 몰래 납치 귀국하여서는 간첩 행위로 유신 법정에 세우므로, 심지어는 이 사건은 양국 국가 간의 국교 단절 위기까지 초래했다.

이런 저런 사유로 교인 수가 줄어들은 결과를 가져 왔지만, 그러나 연합예배와 특별예배 때 같은 특별한 교회 행사의 중요한 경우에만 직접 목사님까지 초빙되어서 예배를 인도해 주었다. 그러다 1972년 6월 21일에 「한국 기독교 교회 연합회」로부터 장성환 목사가 목회자로 서독 지역에 정식 파송되므로, 다시 교회가 부흥의 계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이 무렵까지 약 3 년간 당시 책임 목회자도 없었던 그런 공백 기간에는 그냥 각 지역 교회들이 자체적으로 서로 연합하면서, 독일 노르드라인 베스트팔렌 지구(NRW)를 중심으로 한 첫 「한인 교우회 총 연합회」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또한 각 지역 교회들간의 예배와 성도 교제 활동을 소속 교인들이 자체적으로 직접 운영해 온 매우 어렵던 입장 이였다.

위에서 제시한 한 사례처럼 주로 광산이 집중해 있던 곳인 독일 중부 루어 지역의 Aachen의 Merkstein, Alsdorf 와 Setterich 시에 세 곳의 교회가 세워졌고, 그리고 Bad­Oberhausen, Bedburg­Hau, Bochum, Bonn, Castrop­Rauxel Vinckehof, Dortmund, Duesseldorf­Langenfeld, Duisburg­Mitte, Duisburg­Hamborn, Gelsenkirchen, Koeln, Leverkusen, Oberhausen, Remscheid, Viersen. 그리고 또한 Wuppertal 시를 위시해서

처음에는 약 13 개의 교회로 조직되었다가, 그 후 모두 17 개 지역 교회로 다시 크게 불어났었다.

결국 주로 광산 근로자들과 한국 간호사들인 당시의 서독 취업자들이 집중해서 함께 모여 살았던 그 지역들이 중심이 된 총회 산하의 각 지역 교회들이 각각 세워졌던 셈이다.

그러나 이 무렵에는 오늘날과 같은 모습과 규모의 한인교회로 불릴 정도가 아니라, 그저 말씀에 굶주린 성도들이 매주 주일날이 되면 함께 모여서 우리말로 드리는 예배에 감격하며,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를 즐거워하는 한편, 또한 위로를 찾았던 마치 초대교회와 같은 모습으로 첫 조직한 움직임 이였다.

한국 기독교 연합회가 파송한 장성환 목사

뒤늦게 장성환 목사가 두이스부르그 교회를 중심으로 목회를 시작하신 이 후, 그가 혼자서 한국 기독교 연합회가 특별히 지정하면서, 또 이미 독일 다른 지역에서 각각 목회를 해오던 전체 한인 목사들의 유일한 대표자가 될 수 없다는 이의 때문에 1974년 10월 1일에 Frankfurt 종교청(EKD-Auenamt)에서 장성환, 정 하은(Berlin 지역), 이화선 목사(Frankfurt 지역)들이 함께 자리를 하고, 독일 종교청 담당자 믹쉬(Micksch) 박사의 중재로 처음으로 한인 목사회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각 지역 사역 범위도 Berlin 구역, 중부 NRW구역, Hessen-Main 구역, 남독구역과 또 북독에는 Hamburg 구역 협의회로 각각 구분하면서, 그 지역에다 담임 책임자(Koordinator)제로 의무 분담하게 하는 한인 목사님들의 사역 분담 지역을 따로 따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독일 한인 선교 교회 봉사회(Diakonische Werk)를 자체적으로 운영한다는데도 최종적인 합의를 하였다.

그 이 후 두이스부르크 교회를 중심으로 한 수양회, 부흥회를 개최 할 때마다 한국 민협 인사들인 최홍석, 장종철, 하해룡 목사와 또 박봉랑, 장일조, 안병무, 강유중, 김영한 교수들이 이곳 교회를 그때마다 각각 방문했었다.

당시의 아헨 한인교회 교인들, 한 승홍 전도사와 함께(전 아헨한인회장 고(故) 김무현 소장)

그리고 당시 한인 기독교 교회 NRW 총회(초대 회장 김근철, 그리고 2~3 대 김공부 회장)산하에서는 한글 타자기를 이용한「금주의 말씀」이란 16 절지 한 장의 주보를 발행하면서 그 주 설교 말씀과 소식 난을 두어 독일에서는 제일 처음으로 한글로 된 매주 소식지를 242호까지 발행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설교 녹음 테이프를 제작하여서 전국 오지에 사는 동포들에게 직접 배포하는 활동을 시작하였다.

또한 1978년도 재독 NRW 한인 기독교 교회 연합회(방우찬 교우 회장 당시)에서도 잇따른 각종 행사가 개최됐었다.

그리고 박종화 목사, 정하은 목사, 또한 독일「데겐」 목사가 초빙강사로 모셔진 『교회와 직분』이란 주제하의 수양회때는 지난날 나치 정부에 항거하고, 교회의 독립성과 자유를 주장하며 1934년도에 독일 기독교 교인들이 「부페탈( Wuppetal)」시에서 발표하였던 「발멘신학선언(Theologiescher Erklärung)」에 대한 재조명 작업과 함께 당시 고국의 종교인들이 탄압 받고 있던 한국의 정치 현실을 서로 비교하는 토론회와 부활절기념 판토마임 「해˚바라기」 연극제, 또 「테너」 이단열 선생의 우리나라 『가곡발표회』 등은 그중 돋보이는 행사 중 하나였다.

프랑크푸르트 라인 마인 초대 교회의 이화선 목사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던 이 화선 목사는 1972년 이후부터 서남독 한인교회( 라인 마인 한인 교회의 전신)에서 목회 활동을 시작하면서 독일 기독교 협의회에서 외국인 문제를 전담하던 믹쉬 박사와 협의하여 외국인들을 위한 「외국인의 날」을 제정 시행케 하였다.

고, 그리고 당시까지 외국인들이 독일 생활에 그냥 순응(Anpassen)하도록 하려는 독일인들의 평상적인 사회 인식과 개념으로부터 다만 맹목적인 적응만이 아니라, 쌍방 간의 잘잘못을 서로 상호 보완하고 적응(Intergration)하려는 개념으로 그 용어를 다르게 인식시키는데 노력을 경주했었다.

또한 동반자 개념(Partnerschaft)을 도입 한독인들 간에 동서 문화 차이에서 자주 발생하였던 모든 사회 문제를 향후로는 쌍방 간의 긴밀한 교류를 통해서 서로를 보완하고 절충하려는 관계로 발전 시켜, 양측 간의 내적인 풍요를 추구하려는 새로운 관계 개선에 더욱 주력했었다.

그런데 이들 세분 초창기 초대 교회 목사님들은 당시 교인들의 신앙 상담뿐만 아니라 이들이 당면한 사회 제반문제를 함께 보살피고 해결책을 찾았다. 이 과정에서 밝혀진 한국 노동자들에 대한 취업 계약상의 불합리성과 비록 취업노동자로 독일에 왔지만 열악한 이들의 인권상황을 개선하려고 초기 목회자들은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예로서 NRW-발줌지역의 만네스만 소속 광산 회사 30 여명의 한국인 광부 집단 해고사건과, 후일 뮌헨 대학교 교목으로 재직 무렵에 발생하였던 뮌헨에 소재했던 지멘스 전자회사가 값싼 노임의 한국인 여공 20명에 대한 고용 중도 해고 사건을 당시 이영빈 목사가 대기업을 직접 상대로 한 고용 계약 위반 협의로 각각 그 지방 노동 법원에다 고발하여서 이를 중재 처리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밖에도 당시 우리나라의 모순된 정치 현실을 함께 비판하였던 많은 목회자들이 고국 민주화 해외 목회 활동 때문에 일명 “정치 목사”라는 뜻하지 않는 오명까지 받으면서, 남모르는 고난까지 감수해야만 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이 굴절되고 잘못된 역사 인식자체는 이제는 말끔히 바로 잡혀야 마땅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