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전쟁 – 전쟁과 약탈 그리고 회복 (59)

중국이 일본에 약탈당한 수많은 문화재 가운데 유독 ‘홍려정비(鴻臚井碑’) 환수를 표적으로 삼아 우리의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홍려정비는 1300여 년 전에 현재 중국의 랴오닝(遼寧)성 뤼순구(旅順口) 황금산(黃金山) 기슭에 자리한 거대한 자연석에 새긴 돌비석이다. 높이1.8미터에 무게 9톤의 규암질 돌비석이 어떻게 보면 우리 한국이 관심을 둘만한 이유가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이 돌비석이 고대사의 비밀을 품고 있다.

‘최흔석각(崔忻石刻)’이라고도 불리는 이 돌비석은 러일전쟁(1904~1905) 직후 일본이 약탈해 가져가 현재 일본 왕궁에 있다. 중국이 이를 환수하려는 것은 상실한 문화재를 회복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고대사를 자국에 유리하게 재단하려는 의도라 경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중국 측은 이 돌비석이 1840년 발생한 아편전쟁 이후 자국에서 약탈된 가장 무겁고 큰 유물이라고 주장한다.

중국과 일본이 ‘반환 환수’ 전쟁을 벌이는 홍려정비에는 대체 무슨 내용이 새겨져 있을까. 홍려정비의 공개된 사진과 탁본을 보면 세로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3행 29자가 해서체로 새겨져 있다.

勅持節宣勞靺羯使(칙지절선로말갈사)
鴻臚卿崔忻井兩口永爲(홍려경최흔정량구영위)
記驗開元二年五月十八日(기험개원2년 5월18일)

한규철 전 고구려발해학회장(경성대 명예교수)은 이를 “신표를 가지고 조칙을 받드는 선로말갈사 홍려경 최흔이 우물 두 개를 파서 영원히 증거로 삼고자 기록한다. 개원 2년 5월 18일”로 풀이한다. 개원은 당나라 6대 황제 현종재위 712~756의 연호로, 개원 2년은 서기 714년이다. 홍려경은 외교 업무를 담당하는 홍려시(鴻臚寺)의 수장, 즉 현재의 외교장관에 해당하는 직책이고, 그 수장이 최흔이다. 최흔은 송나라 시대에 중국의 시각에서 편찬한 역사서 『신당서(新唐書)』와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에도 등장하는 역사적 인물이다. 홍려정비에 등장하는 우물 두 개의 위치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당시의 맥락을 살펴보면 이렇다. 대조영(大祚榮, ?~719)이 거란 무장 이해고(李楷固)의 오랜 추격과 전쟁에서 승리하고 698년 진국(震國)을 세웠다. 건국 15년째인 713년, 당나라는 외교 특사로 최흔을 보내 대조영을 군왕으로 책봉한다. 『구당서』에 따르면 당나라는 대조영을 “좌효위원외대장군(左驍衛員外大將軍) 발해군왕(渤海郡王)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으로 책봉했다.

책봉은 발해와 당나라가 적대 관계를 해소하고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했다는 공식적 절차다. 그리고 최흔이 당나라로 돌아가다 이곳에서 우물을 파고 증거로 남겼다. 그가 지나간 랴오둥반도는 발해의 서해안 해상 거점이다.

중국은 비석에 등장하는 최흔의 임무가 말갈사(靺羯使)였기에 대조영이 세운 나라는 말갈이며, 당나라의 지방정부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결국 대조영이 세운 나라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에 포함된다며 발해의 역사를 빼앗아가려는 역사 전쟁의 하나이다. 이런 저의로 중국은 일본에 있는 홍려정비 환수를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홍려정비에는 공식적인 외교적 입장이 아니라 중국 사신의 입장에서 새겼다는 결정적 증거가 있다. 말갈을 한자로 정식으로 표기하면 ‘靺鞨’이다. 그러나 홍려정비에 담긴 말갈사에 나오는 말갈은 ‘靺羯’이다. ‘말갈 갈(鞨)’ 자 대신에 ‘불깐 양 갈(羯)’ 자를 새긴 것이다. 거세했다는 의미의 갈 자를 쓴 것은 나라 이름으로 새겼다기보다 비하 내지 하대할 의도로 새긴 문구가 분명하다.

중국은 고구려(高句麗)도 하구려(下句麗)라고 비하하다가 두 나라가 전쟁을 벌인 적도 있다. 최흔의 직책이 말갈사(靺羯使)라는 것으로 말갈이 중국의 지방정부이거나 속국이었다고 해석하는 것은 중국 중심의 지나친 억측이다.

발해는 926년까지 한반도 북부와 만주, 러시아 연해주까지 광대한 지역을 지배했다. 영토는 당시 신라의 네 배에 이르렀다. 대조영에 대해 당나라가 망한 지 40여 년 뒤에 편찬된 당나라 역사서인 『구당서』에는 “대조영이란 사람은 본래 ‘고려별종’이다(大祚榮者,本高麗別種也)”라고 전한다. 당나라가 멸망한 지 약 60년 뒤에 편찬된 『신당서』에는 “발해는 고구려에 붙은 ‘속말말갈’의 대씨(가세웠)다(渤海,本粟末靺鞨附高麗者, 姓大氏)”라 적고 있다. 두 사서를 종합하면 발해는 고구려의 유민과 현지 말갈 사람이 합심해서 세웠다는 뜻이다.

발해의 동시대인 신라 문장가 최치원857~?이 발해에 대한 적개심으로 897년 무렵에 지은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01’에 따르면, 발해는 최흔이 외교 사절로 도착하기 훨씬 이전에 초기 국명을 진국(振國)으로 표기했다. 발해는 중국과 다른 독자적 연호를 사용했다. 동아시아에서 연호를 독자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은 천하의 주인이라는 의미다.

발해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당과 신라와는 경쟁하고, 바다를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진 일본과는 우호 관계를 유지는 외교정책을 폈다. 제3대 문왕(文王, 재위 737~793) 때에는 국력이 크게 신장되어 수도를 동모산(東牟山)에서 중경현덕부(中京縣德府)로 옮겼다가 후에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로 옮겼다.

2대 무왕(武王, ?~737)은 당나라와 전쟁을 벌일 정도로 국력이 셌다. 5경 15부 62주라는 지방행정 제도를 갖춘 고대 강국이었다. 외교관계를 수립한다는 의미의 사실이야 홍려정비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증명되고 있다.

한규철 전 고구려발해학회장은 “홍려정비의 탁본 29자가 공개된 마당에 우리 처지에서는 이 비석이 물리적 위치가 어디이든 큰 관계는 없다” 라면서도 전문가들이 접근해 연구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1341호 30면, 2023년 12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