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도자기(1)
식생활 도구의 한 범주 속에서 흔히 ‘그릇’이라 불렸던 도자기는 거기에 인간의 예술적 혼이 더해져 예술과 문화로 꽃피우게 된다.
한 민족의 정신과 사회적인 정서는 흙이라는 매체를 통해 표현되기 때문에 한 나라의 예술성과 감수성, 세련미를 알아보려면 그 나라에서 구워 낸 도자기를 척도로 짐작할 수가 있다.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도기와 자기의 구분 없이 일반적으로 도자기라는 용어로 통칭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는 독일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도기를 뜻하는 ‘Keramik’과 자기를 뜻하는 ‘Porzellan’이 정확히 구분되지 않고 혼용되고 있는 현실이다.
문화사업단에서는 먼저 도자기에 대한 일반을 살펴보고, 이후 유럽의 대표적 도자기인 마이센도자기, 본 차이나의 웨지우드, 네덜란드의 델프트 도자기, 덴마크의 로얄 코펜하겐 그리고 독일의 빌렌로이 보흐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
도자기: 도기와 자기
인류가 정착 생활을 시작하고, 동서양이 서로 교류가 있기 전부터 각각 흙을 빚어 구워 생활 용기를 만들어 썼다. 초기에는 도기나 자기에 비해 원시적이라 할 수 있는 토기(土器)가 제작되었다. 약 9000년전부터 인류는 토기를 만들어 왔으나, 현재에는 검은 기와, 붉은 벽돌, 화분의 일부 등이 만들어지고 있다.
도자기는 도기와 자기를 함께 일컫는 용어이다. 도기와 자기의 구분은 재료가 되는 ‘흙’과 흙의 성질을 변화시키는 ‘불의 온도’가 그 구분기준이 된다.
도기(陶器)는 우리가 흔히 찰흙이라고 하는 붉은 색의 진흙으로 만들며, 섭씨 500도에서 1,100도 전후로 구워지는 그릇이고, 자기(磁器)는 대개 흰색을 띄는 순도가 높은 흙, 곧 자토로 만들어 1,300도 이상에서 굽는다. 불의 온도가 중요한 것은 바탕 흙에 포함되어 있는 광물이 1,100도 정도에서 녹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자기와 토기의 이러한 기본적인 차이와 함께 완성된 형태에서 기능적 특징으로는 다음과 같다.
자기가 물을 전혀 흡수하지 않는데 반해 도기는 물을 흡수하며, 비쳐보았을 때 토기는 빛을 통과시키지 않는 반면 자기는 밝게 비친다. 또한 가볍게 튕겼을 때 자기는 맑은 소리가 나며 내구성이 뛰어난 반면 도기는 탁한 소리가 나며 내구성이 자기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
도자기 원료의 3요소
흙을 반죽하여 도자기를 만드는 데는 3종의 성질을 가진 원료가 필요하다. 점토와 장석 그리고 규석이다.
반죽할 때에 힘을 가하면 형태가 변하고, 힘을 제거해도 형태를 유지하는 성질 즉, 소성(塑性)이 있어야 한다. 이 소성을 가진 것이 점토인데, 만약 점토가 없다면 건조시킬 때 부서져 버린다.
열을 가해 성형된 형태로 고화시킬 때, 흙가루와 흙가루 사이를 굳게 결합하는 역할을 하는 재료가 필요한데 이 역할을 하는 것이 장석으로서, 1,000°C 정도가 되면 장석 속에 들어 있는 알칼리 성분이 녹아서 유리질이 되어 입자와 입자 사이를 메운다. 이 유리질은 약간만 온도가 내려가도 곧 굳어 버리므로 입자와 입자는 굳게 결합된다.
또 하나의 원료는 도자기의 본체가 되는 것으로, 만들어진 도자기의 비중이라든가, 어느 정도의 온도에서까지 사용할 수 있는가 등 도자기의 주요 성질을 결정하는 인자가 되는, 석영질의 흙, 즉 규석이 쓰인다. 이 성분이 많이 함유된 도자기는 처음 성형했을 때의 형태와 구워냈을 때의 형태가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점토질의 원료는 구우면 수증기가 빠져나가고, 장석질 원료는 유리화되어 부피가 작아지는데, 이와 같은 현상을 소성수축(燒成收縮)이라 부른다.
도자기가 유럽에 전파되기까지
도자기는 중국에 의해 발전하였고, 이후 한국과 베트남도 고급의 도자기를 생산하게 된다. 실크로드를 통해 접한 중국의 도자기는 서양인들이 도달하지 못한 최첨단 선진 문명이었고, 유럽인들은 여기에 매료되어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결과를 낳았다.
유럽에서 자기를 포셀린(Porcelain)이라고 명칭하는 것은 마르코 폴로가 중국을 여행하고 돌아와 소개했다고 해서 붙여진 말이며, 도자기를 보통 차이나(China)라고 부르는 것도 중국에서 유래됐다는 뜻을 담고 있다.
중국의 도자기 기술은 당나라 전성기인 성당시절(713~762)부터 정제된 흙과 높은 온도로 소성하여 얻어 지는 자기(磁器) 를 개발하기 시작하였고, 그 기술을 전해 받은 우리나라는 신라말경부터 시작하여, 조선전기에는 치밀질의 우수한 백자를 활발히 생산해 나가고 있었다. 일본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진기술인 “도자기“에 대한 오랜 선망과 이를 가지고 싶은 욕망으로 한반도를 침략하게 되는데, 이것이 일본에서는 ‘도자기전쟁’ 또는 ‘사발전쟁’이라고 불리는 임진왜란(1592-1598)이다.
그때 끌려간 우리의 도공들에 의해 비로소 일본도 ‘자기기술 보유국’의 대열에 오르게 되고, 이미 유럽의 여러 나라와 통상하고 있던 일본은 자기를 통해, 지금까지도 뿌리 깊이 밖힌 대유럽 이미지 홍보는 물론, 여기서 축적한 부를 가지고 경제대국의 토양을 만들게 된다. 특히 17세기 중국에서는 명-청간의 내전이 일어나고, 이 시기에 유럽으로의 수출 물량 공백이 생긴 것을 계기로, 일본과 통상하던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와 일본은 큰 부를 축적하게 되고, 이 시기의 주문 제작 경험 등을 바탕으로 일본의 도자기 산업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고 이에 자극받은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은 일본에 진출하여 직접 자기를 수입하기에 이른다. 금값에 버금가는 가격으로 거래되었던 동양의 자기 즉, “황금 알을 낳는 백색 자기개발”은 수세기 동안 유럽의 모든 왕들, 제후들, 상인과 도공들의 꿈이자 성취해야할 목표가 되었다.
다음 호부터는에 유럽에서 이 꿈을 가장 먼저 성취한 독일의 마이센 자기를 시작으로 유럽의 도자기에 대해 알아보도록 한다.
1349호 23면, 2024년 2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