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전통이 가득한 뷔르츠부르크(Würzburg) ➄
뷔르츠부르크의 특징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중세의 특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도시라는 점이다.
독일이나 유럽에서 도시이름에 “ burg, berg, burgh” 등이 들어가면 몇 도시의 예외를 제외하면 중세시대 성장한 도시로 보면 틀림이 없다. 우리가 잘 아는 Nürnberg, Bamberg, Heidelberg“ 등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가 있다.
이러한 도시이름의 특징뿐만이 아니라, 도시 구도가, 산위에 건축된 전쟁 방비용 대규모 성, 그리고 직선으로 다리를 가로지르면, 대성당, 그리고 시장 광장, 도시 새내의 거주 궁전 등 도시의 구조도 전형적인 중세도시이다.
뷔르츠부르크는 이외에도,1719년까지 대주교가 통치를 했던, 제정일치의 도시이기도 했다. 중세 시대 교권이 강한 지역의 특징이다. 이에 해당하는 도시들은 마인츠, 트리어, 쾰른 등 우리가 잘 아는 대도시도 여기에 포함되는데, 독일로만 국한해도 20여 군데가 넘는 지역을 대주교가 세속적 통치자로서 군림하였다.
이와 더불어 유럽 중세를 개창했던 칼 대제 시절, 당시 5대 가문(부족), 즉 작센, 로트링엔, 슈바벤, 프랑켄, 바바리아 가문이 다스렸던 지역이라는 점이다.
프랑켄은 아샤펜부르크로부터 뷔르츠부르크, 바이로이트, 뉘른베르크 지역을 아우르고 있는데, 이들 지역 주민들은 아직도 바이에른 의식보다는 프랑켄 인(人)이라는 정체성이 더 강하다. 그러기에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포도주 이름도 ‘Frankenwein’인 것이다.
뷔르츠부르크의 특징을 또 하나 든다면 화려한 바로크 건축의 가득한 도시이며, 독일에서 가장 많은 성모상이 건축물을 장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기에 뷔르츠부르크는 ‘마돈나의 도시’라고도 불린다.
마리엔베르크의 성을 시작으로 뷔르츠부르크 시를 둘러보며, 이러한 특징을 함께 살펴보도록 한다.
◈ 뷔르츠부르크의 성지(聖地) 노이뮌스터(Neumunster)와 킬리안 돔(Dom St. Kilian)
지난 회에서 살펴본 Falkenhaus에서 전차가 다니는 큰 번화가로 나서면 쇤보른 거리(Schönbornstraße)를 만난다. 여기서 오른 편으로 시선을 돌리면, 바로크식의 교회인 노이뮌스터(Neumunster)가 보이고, 그 바로 옆에는 뷔르츠부르크 대성당인 킬리안 돔(Dom St. Kilian)이 있다.
교회와 예배당 수가 60여개가 넘는 뷔르츠부르크에서도 노이뮌스터 교회와 킬리안 돔은 특별한 의미를 지난다. 바로 뷔르츠부르크에 기독교를 전파한 사도인 Kilian, Kolonat und Totnan들의 순교지이자, 첫 주교관구가 설치된 교회이기 때문이다.
뷔르츠부르크에 기독교가 전파되다
전승에 의하면 프랑켄지역에서 기독교 전도활동을 펼치던 아일랜드 출신 Kilian은 686년 동료 Kolonat와 Totnan과 함께 뷔르츠부르크에 들러와 기독교를 전파하였다. 어떤 사료에는 11명의 동료(모두 12명의 사도)와 함께 왔다는 기록도 전해지고 있다.
이들은 뷔르츠부르크와 주변 지역에서 설교와 전도활동을 펼쳤는데, 689년경 살해되고 말았다.
741년 Burkard 주교는 이들을 성인으로 추대하고, 뷔르츠부르크주교 수호성인(Bistumspatronen)으로 지정했다. 이후 Kilian은 Kolonat와 Totnan과 함께 “프랑켄의 사도(Frankenapostel)”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노이뮌스터 교회(Neumunster)
노이뮌스터 교회는 Kilian, Kolonat, Totnan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바로 이들이 살해된 곳이 이곳이기 때문이다.
전승에 따르면 이들은 당시 프랑켄공국의 Gosbert 공작이 세례를 받게 할 정도로 기독교 전파에 큰 진전으 ㄹ보였는데, Gosbert 공작의 부인 Gailana와 갈등을 빚었다고 한다. Gailana는 Gosbert 공작 형제의 미망인이었는데, Gosbert 공작과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 교회법에 따르면, 이 결혼은 금지된 결혼으로 무효가 되어야만 했다.
킬리안은 이미 세례를 받은 공작에게 관계 해소를 촉구했다. Gailana는 남편의 부재를 이용하여 킬리안과 그 동료인 Kolonat, Totnan을 살해하였다. 시신은 자신의 궁전인 Herzogsburg 마구간에 매장하였다. 바로 오늘날 노이뮌스터 교회가 건설된 자리이다.
이러한 전승은 개인감정에 의한 사건으로 말하고 있지만, 역사가들은 기독교 전파과정에서 기존 지배계층과 갈등의 한 장면으로 해석하고 있다.
2대 주교인 Megingoz주교는 순교 장소에 대한 기억을 생생하게 간직하기 위해 이 자리에 기념관을 건립했고, 이 자리에는 초대 주교 Burkard와 2대 주교인 Megingoz주교가 안장되어 있다. 1060년에는 Adalbero 주교가 이곳에 노이뮌스터 수도원을 세웠다.
1967년 대성당이 다시 축성될 때까지 노이뮌스터는 교구의 공동 대성당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노이뮌스터 교회는 전형적인 바로크 양식의 거대한 교회이다. 거리에 면한 입구만 봤을 때는 그렇게 큰 교회인지 가늠이 안 되는데, 막상 들어가보면 바로크의 전형을 보여주는 거대하고 화사한 내부의 스케일에 놀라게 된다. 중앙의 황금빛 제단도 화려하고, 교회에 봉헌된 세 명의 성자의 동상을 비롯하여 섬세한 조각과 부조가 곳곳에 눈에 띄며, 특히 거대한 천장 프레스코 벽화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한다.
지금 보기에도 화려하고 압도적이지만, 이것이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폭격으로 인해 많이 파괴된 것이라는 점에 또 놀라게 된다. 전후 복구가 되는 과정에서 내부의 조각 등 예술적 가치가 높은 인테리어가 크게 훼손되었다고 한다.
뷔르츠부르크 대성당(Dom St. Kilian)
Bonifatius 성인은 741년 뷔르츠부르크주교관구(Bistum)을 설립하고, 그의 동료인 Burkard를 초대 주교로 임명하였다. 그런데 Bonifatius의 이름이 익숙하다. 마인츠 역사산책에서 살펴본 마인츠 대성당 앞에 초대 마인츠주교 석상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Bonifatius 성인 745년부터 마인츠주교직을 수행했다.
Bonifatius 성인은 700년대 프랑크 제국에 기독교를 전파한 베네딕도회 앵글로색슨족 선교사이자 초대 마인츠 대교구장으로 “독일의 사도’라(Apostel der Deutschen)고 추앙받는 성인이다.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는 Bonifatius 성인 독일의 수호성인으로 지정하여 공경하고 있다.
본래 잉글랜드 태생이었던 그는 719년 교황 그레고리오 2세로부터 독일 선교 사목 지시를 받고 게르만족에 대한 선교를 수행하였으며, 754년 현재 독일 북부지역인 Friesland에서 53명의 일행과 함께 이교도에 의해 순교하였다.
그의 장례식은 마인츠 성당에서 치러졌고 그의 유해는 석관에 안치된 채 풀다에 모셔졌는데, 이 운구길은 현재 독일의 순례길 “Bonifatius-Route”로 지정되어 있다.
다시 뷔르츠부르크 대성당으로 돌아오자.
로마네스크 양식의 뷔르츠부르크 대성당(Dom St. Kilian)은 뷔르츠부르크에서 순교한 선교사 성 킬리안(St. Kilian)에게 봉헌된 교회이다. 1040년 Bruno주교 때부터 건축이 시작되어 마지막으로 탑이 완성되기까지 약 200년이 소요되었다.
이중 탑 외관과 총 길이 105m를 갖춘 이 건물은 독일에서 네 번째로 큰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 건물이자 신성로마황제 가운데 잘리아 가문 황제 시대(1024-1125) 독일 건축의 주요 작품이다.
대성당 내부 역시 로마네스크 양식, 그러나 수차례 증개축을 하면서 고딕, 르네상스 그리고 바로크 양식까지 모두 볼 수 있는 성당으로 독일 건축 예술의 정수로 손꼽힌다. 외부와 마찬가지로 내부도 전체적으로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치장되어 있고 제단이 있는 중앙 부분은 황금빛 제단을 정교한 조각으로 장식한 바로크 양식으로 매우 아름답다. 인위적인 조명을 최소화하여 내부가 매우 어둡고 엄숙하게 느껴지지만, 중앙 제단만큼은 뒤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이 강하여 자연스럽게 교회 내에서 제단만 강조될 수 있도록 설계한 것이 흥미롭다. 수백 년 동안 개축이 수행되다 보니, 내부 장식은 다양한 양식이 혼합되어 있다.
성당 예배당(Schönbornkapelle)
오래된 예배당을 대체하기 위해 대성당 북쪽 수랑에 설치한 것으로 1721~1724년에 완공해 1736년 봉헌했다. 독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로크 양식 건축물 중 하나로 인정되는데, 안토니오 주세페 보시(Antonio Giuseppe Bossi) 등이 벽화 작업을 했다고 한다. 발타자르 노이만(Balthasar Neumann)의 대표적인 건축물 중 하나이다.
대성당 보물관(Domschatz)
11~20세기 동안 대성당(Dom St. Kilian)에서 사용하고 수집했던 역사적인 물건들을 따로 전시하는 박물관이다. 대주교가 사용했던 진귀한 예배도구는 물론, 각종 조각과 회화 등 다양한 콜렉션을 갖추고 있다.
대성당 박물관 :
보통 대성당에서 오랫동안 수집하거나 소장했던 예술품이나 제구 등은 보물관(Domschatz)이라는 이름으로 따로 전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뷔르츠부르크는 이름이 다르다. 대성당 박물관(Museum am Dom, MAM)이라고 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대성당 옆 박물관”이라는 뜻으로 일반적인 보물관과는 차이가 있다.
대성당과 노이뮌스터 사이에 위치한 대성당 박물관은 대성당에서 운영하는 일반적인 미술관이다.
이 곳에서는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700여점의 미술품을 수집하여 전시하고 있다. 마리아 예배당(Marienkapelle)에도 흔적이 남아있는 뷔르츠부르크의 유명 조각가 틸만 라이멘슈나이더(Tilman Riemenschneider)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그 외에도 종교예술이 국한하지 않고, Joseph Beuys, Andy Warhol과 같은 현대작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1349호 20면, 2024년 2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