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지성의 허브(Hub) 바이마르(Weimar) ➀
역사산책은 사건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역사서가 아니라, 당시의 사람들, 그들의 삶속으로, 그들의 경험했던 시대의 현장으로 들어가 함께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기쁨과 좌절을 함께 공유하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이다.
또한 작은 벽돌 한 장, 야트막한 울타리, 보잘 것 없이 구석에 자리 잡은 허름한 건물의 한 자락이라도 관심과 애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면, 그들은 곧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따라서 역사산책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일뿐만 아니라, 동시에 내 삶의 터전과의 대화이기도 하다.
“바이마르를 가보지 않았다면, 현재 독일의 반을 보지 못한 것이다”
바이마르를 걷는 일은 그 자체가 영광스럽다. 거리 어디에도 허투루 지어진 건축물이 없고, 이야기가 깃들여져 있지 않은 장소가 없다. 골목마다 바이마르에서 활동한 인물들의 상이 세워져 있고, 그들이 살았던 집이 보존되어 있기에 무조건 걸어야만 바이마르와 호흡할 수 있다.
바이마르의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도시 분위기 속에서는 아무리 감각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바이마르는 이들에게 영감과 사색을 불러일으킨다.
유엔이 1998년 ‘Classical Weimar’라는 이름으로 바이마르 구시가지 전체를 세계유산 리스트에 올렸듯 바이마르는 독일 고전주의의 본당이다. 괴테, 실러, 니체, 헤르더 같은 쟁쟁한 고전파들이 이 작은 도시를 유럽 문화의 중심축으로 키워냈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독일의 사상가와 예술가들은 바이마르에 모여들었고, 그리스 사상가들이 모여든 아테네 학당을 비유, “바이마르 학당”아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바이마르는 독일 고전주의의 중심지가 되었다. 당시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 서너 명 중 하나는 천재라 칭해지는 인물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바이마르는 독일 지성들의 집합소였다.
또한 이곳 바이마르에는 독일 민주주의가 깃들어있다. 바이마르헌법이 제정된 곳, 그러기에 독일 최초의 민주공화정인 바이마르공화국이 탄생한 도시이다.
어디 그뿐이랴, 예술을 예술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건축과 공예, 실생활에 접목시킨 바우하우스(Bauhaus)가 첫 발을 내딛은 곳도 바이마르이다.
튀링겐 주의 작은 도시 바이마르. 고전주의 대가들과 위대한 사상가들의 도시라고 불리는 곳. 유럽과 독일 철학과 예술사에 의미 있는 발자국을 남긴 이들이 오래 머물렀고, 머물고 싶어 했던 바이마르에는 지금도 그들의 영혼이 숨 쉬고 있다.
◈ 왜 바이마르인가
바이마르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오래지 않다. 250년 전인 1774년 괴테가 프랑크푸르트에서 바이마르공국의 아우구스트(Karl August) 대공을 만나고, 이듬해인 1785년 그의 초청으로 괴테가 바이마르에 도착하며, 바이마르의 새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후 이 둘이 일구어 낸 바이마르는 강력한 경제력이나, 군사력이 아닌, 사상과 예술, 문학 등 ‘문화의 힘’으로 독일과 유럽 전체의 대표주자로 발돋움하게 되는 것이다.
독일 고전주의 본향
바이마르는 인구 6만5000여명의 작은 도시지만 독일 고전주의의 꽃을 피운 공로로 구시가지 전체가 ‘Classical Weimar’라는 이름으로 199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됐다. 이곳의 대표 건물인 바이마르 국립극장 앞에는 독일 고전주의를 꽃피운 두 대가 괴테와 실러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바이마르의 고전주의 시대는 아우구스트 대공의 어머니인 아말리아(Anna Amalia) 공작부인가 살아 있는 기간 동안 시작되었다. 그녀는 1772년에 아들들의 가정교사로 시인 빌란트(Wieland)를 임명하였다. 아우구스트가 공작 작위를 계승한 뒤 괴테가 1775년 이 도시에 정착하였다. 헤르더(Herder)는 이듬해 바이마르에 왔다. 그리고 실러가 1799년 바이마르로 이주하면서 독일 고전주의 대가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된 것이다.
그들의 존재는 또 다른 예술가와 학자들을 불러들였으며, 이곳은 고대 아테네를 연상시키는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그리하여 ‘바이마르 고전주의(Classical Weimar)’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아우구스트 대공의 어머니인 아말리아 공작부인의 궁에서는 매주 독서회, 강연회, 음악회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빌란트와 헤르더와 괴테와 실러 등 4대 지성이 함께 앉아 시를 낭독하고 정세를 토론하고 음악을 같이 듣는, 다시는 볼 수 없을 광경이 벌어졌다.
독일 고전주의는 흔히 ‘질풍노도’의 문학이 극복되는 시점(1786년, 괴테의 첫 이탈리아 여행 시점)에서 괴테가 생을 마감할 때(1832년)까지를 일컫는다.
고전주의는 일반적으로 인문주의라는 시민계급의 이상을 내걸고 고대 그리스·로마의 예술을 모범으로 조화와 균형, 객관성 보편성, 총체성, 정제된 우아한 형식 등을 합리적으로 추구하는 예술사조이다.
바우하우스(Bauhaus)의 출발지
디자인이나 건축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바우하우스(Bauhaus)가 현대 건축과 디자인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 모르지 않을 것이다.
바우하우스는 1919년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가 바이마르에 설립한 조형학교로 1933년 나치가 강제로 폐교시키기까지 예술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베를린 출신의 그로피우스는 ‘미래의 새로운 건축을 위해서 조각, 회화와 같은 순수미술과 더불어 공예의 응용미술이 통합을 이루어야 한다.’는 기본 사상을 바탕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또 공방에서 가구와 도자기, 그래픽 디자인과 순수미술 작품, 그리고 실험 주택 등을 생산했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파울 클레(Paul Klee)와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가 마이스터로서 학생들을 가르칠 만큼 당시 바우하우스의 위상은 대단했다.
바우하우스는 정확히 바이마르 공화국(1919~33년)과 운명을 같이 했다. 바우하우스의 의의를 찾자면, 근대의 조형이 마주친 근본적인 문제, 즉 기술 혁신이 가져온 생산방식의 혁명적 변화를 어떠한 조형 언어로 표현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 종합적인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다.
이들은 수공예에서 벗어나 대량생산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산업시대에 맞는 공예란 무엇인가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생산하기 쉬우면서도 아름다운 물건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었고, 그 답은 기능을 강조한 장식 없는 기하학적인 형태의 제품이었다. 이를 통해 현대 디자인이 태동되기 시작했고, 공예가는 산업과 결합하여 디자이너라는 새로운 직업이 탄생했다.
이후 독일 뿐 아니라 유럽 각지에 모더니즘 예술의 씨를 뿌렸고 많은 건축가와 미술가, 조각가, 공예가, 사진가, 무대 연출가 등을 배출했다.
현재 바이마르에는 4천 명의 재학생이 예술과 공학 분야에서 공부하고 있는 바우하우스 대학교Bauhaus Universitat와 바우하우스 출신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는 바우하우스 박물관(Bauhaus Museum)이 남아있어서 당시의 혁신적이었던 바우하우스를 생생하게 느껴볼 수 있다.
바이마르공화국의 탄생지
1919년 8월 11일 프리드리히 에버트(Friedrich Ebert) 대통령이 독일 최초의 공화국 헌법을 공포했다. 바이마르공화국의 시작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는 독일에는 재앙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로 만들어진 바이마르 헌법은 독일은 물론, 인류 전체에 희망의 빛이 될 수 있었다. . 당시까지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자유롭고 민주적인 헌법이자 현대 복지국가의 초석까지 다진 헌법이다.
1919년 1월 19일 독일에서는 제헌 국민회의 의원 선출을 위한 선거가 있었다. 이 선거에는 여성에게도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주어졌으며 의석은 비례대표제로 배분되었다.
1919년 2월 6일 국민회의는 첫 회의를 바이마르에서 개최하였다. 원래 베를린에서 개최할 예정이었지만, 당시 베를린에서는 소요가 일어나고 있었으며 의원들의 안전과 독립성을 위해 회의를 다른 곳에서 열 수밖에 없었다. 바이마르가 선택된 것은 바이마르는 인본주의적 이상주의 전통의 상징성 때문이도 하지만 애초에 계획되었던 에르푸르트가 군사적으로 방어가 어렵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하마터면 헌법의 이름이 바뀔 뻔했던 것이다.
이후 국민회의는 바이마르에서 수차례 회의를 갖고, 1919년 7월 31일 새 헌법을 262대 75(불참 84)로 통과시켰다. ‘바이마르 헌법’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1919년 8월 11일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바이마르에서 조금 떨어진 슈바르츠부르크(Schwarzburg)에서 헌법에 서명하고 공표하였다. 이로서 ‘바아마르 공화국’이 정식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바이마르공화국이라 칭해져서, 공화국 수도가 바이마르라 잘못알고 있는 분들도 많은데, 수도는 베를린이었으며, 8월 11일은 독일에서 민주주의 시작을 기념하기 위해 바이마르 공화국의 국경일로 지정되었다.
바이마르 헌법은 국민주권을 기초로 하고, 기본권으로 언론·집회·신앙·양심의 자유를 인정하고, 사회권으로 의무교육과 사회보장제, 노동력 보호 등을 규정했다. 고전적인 자유민주주의를 기초로 삼으면서도 근대 헌법 사상 처음으로 소유권의 사회성, 재산권 행사의 공공성,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는 생존권을 규정했다. 바이마르 헌법이 20세기 현대 헌법의 전형이 될 수 있었던 이유다.
잊지 말아야 할 과거, 부헨발트 수용소(KZ Buchenwald)
1937년 7월 나치정권은 바이마르에서 북서쪽으로 약 5km 떨어진 에테스베르크(Ettersberg)에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Konzentrationslager Buchenwald, KZ Buchenwald)를 세웠다. 부헨발트는 독일의 1937년 당시 독일 국경 내에 존재했던 최초이자 최대의 강제 수용소로서, 초기에는 수용자 대부분이 정치범이었다.
1938년 11월, 수정의 밤(Kristallnacht) 이후, 10,000명에 가까운 유태인을 부헨발트로 보냈는데, 이곳에서 그들은 당국의 극도로 잔혹한 취급을 받게 되었다. 또한 범죄자, 여호와의 증인, 로마니와 신티족(집시), 독일군 탈주병을 부헨발트에 감금하였다.
소련군이 폴란드를 휩쓸자, 독일은 수천 명의 수용소 수감자를 이송하였다. 아우슈비츠와 그로스-로젠에서 대부분 유태인인 10,000명이 넘는 수감자들도 길고도 잔인한 행군 끝에 1945년 1월 부헨발트에 도착하였다.
1937년 7월과 1945년 4월 사이에, 나치정권은 유럽 전역에서 250,000명을 부헨발트에 수감시켰다. 수용소 당국이 온전한 기록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사망자 수는 추정에 따른 것으로 정확한 수는 알 수 없었다. SS는 부헨발트 수용 시설에서 56,000명 이상의 남자 수감자를 살해하였으며, 그 중 약 11,000명이 유태인이었다.
부헨발트수용소는 철저히 비밀에 붙여졌기에, 바이마르 시민들조차도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연합군의 발표소식을 듣고서야 그 존재를 알게 되었다.
1352호 20면, 2024년 2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