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유네스코 세계유산(95)

베를린의 운터 덴 린덴(Unter den Linden) ➀

독일은 서독 시절이던 1976년 8월 23일 유네스코 조약에 비준한 이래, 48건의 문화유산과, 3건의 자연유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탈리아와 중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세계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교포신문사에서는 2022년 특집 기획으로 “독일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문화유산을 매 주 연재한 바 있다.
2023년에는 2022년 기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신청된 8곳과 신청 후 자진 탈퇴, 또는 유네스코에 의해 등재 거부된 문화유산을 살펴보았다.
2024년에는 구 동독지역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후보지를 살펴보도록 한다. -편집실

베를린의 운터 덴 린덴(Unter den Linden)은 파리의 샹젤리제(Champs-Élysées)거리에 비교할 만한 베를린을 대표하는 대로이다.

베를린 대성당(Berliner Dom)을 연결하는 슐로스 다리(Schloßbrücke)부터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er Tor)까지 이어지는 폭 60m, 길이 1,5km의 대로인 운터 덴 린덴(Unter den Linden)은 이름은 직역하자면 “보리수나무 아래”라는 뜻이다. Linden 나무가 가로수가 잔뜩 심어져 있어서 거리 이름이 유래되었다.

그런데 보리수로 번역되는 린덴 나무(Lindenbaum)는 인도의 보리수 나무와 한국의 보리수나무로 불리는 품종과는 다른 품종의 나무이다. 원래 한국어가 없던 나무이므로 그대로 린데 나무로 부르는 것이 맞다.

2차세계대전 전까지는 그야말로 베를린의 중심. 지금 대성당 바로 옆 공터 자리에 원래 궁전이 있었고, 운터 덴 린덴은 궁전과 브란덴부르크 문을 연결하는 길이었다. 주변에 관청, 상업건물, 박물관, 극장 등이 빼곡히 들어섰고, 심지어 히틀러는 집권 당시 이 거리에 자신의 관저를 만들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전쟁 당시 거리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지금의 모습은 구 동독에서 재건한 것을 바탕으로 한다. 구 동독은 서베를린과의 관문인 브란덴부르크 문에서부터 시작되는 자신들의 중심지를 마음껏 과시하기 위해 이 지역을 아낌없이 개발하였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상업시설과 박물관, 극장, 대사관, 호텔 등이 거리 양편에 줄지어 있다.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er Tor)에서부터 동쪽으로 운터 덴 린덴(Unter den Linden)대로를 이동하면 다음과 같이 명소들을 만나게 된다.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er Tor), 파리저 광장 (Pariser Platz), 호텔 아들론 (Hotel Adlon), 러시아 대사관, 베를린 주립도서관, 베를린 국립 오페라, 베벨 광장 (Bebelplatz),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 성 헤드비지스 성당 (Sankt-Hedwigs-Kathedrale), 베를린 황태자궁 (Kronprinzenpalais), 노이에 바헤(Neue Wache), 독일 역사박물관, 왕궁 다리 (Schlossbrücke), 루스트 정원, 박물관섬, 베를린 대성당 등이다.

이제 운터 덴 린덴(Unter den Linden)대로의 명소들을 찾아가 본다.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er Tor)

브란덴부르크 문(Brandenburger Tor)은 18세기에 베를린에 지어진 초기 고전주의 양식 개선문이다. 프로이센 왕국의 제4대 국왕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바타비아 공화국과의 전쟁 이후 피폐해진 베를린을 복구할 때 함께 1788년부터 1791년까지 지었고 건축가는 칼 고트하르트 랑한스(Carl Gotthard Langhans)이며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참고했다.

브란덴부르크 문은 원래에는 평화를 뜻하는 문이라고 하여 Friendenstor, 즉 ‘평화의 문’이라고 불렸다. 카를 고트하르트 랑한스(Carl Gotthard Langhans)가 이 문의 설계를 담당했으며, 이 관문이 원래 이 자리에 서있던 옛 관문을 대체하고 새로운 베를린의 관문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 관문은 양쪽에 6개씩 도리스식 기둥들이 5개의 통로를 만드는 디자인이었으며, 시민들은 맨 양 옆 끝에 있는 2개의 문만 사용할 수 있었다. 또한 그 위에는 평화를 상징하는 그리스 여신 에이레네와 그녀를 이끄는 4두 마차가 조각됐다.

브란덴부르크 문은 독일 정치사에서 수없이 중요한 역할들을 담당하였다. 1806년에 프로이센이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나폴레옹에게 대패한 이후, 나폴레옹은 이 문으로 개선식을 함으로써 처음으로 이 문으로 개선식을 거행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개선식 직후 관문 위에 있는 사두마차 상을 프랑스 파리로 옮겨갔다.

나폴레옹이 1814년에 대패한 이후, 그리고 프로이센이 파리를 점령한 이후 파리에 점령되어 있던 사두마차 상은 다시 베를린으로 되돌아왔고, 이후 돌아온 사두마차 상의 여신은 더이상 ‘평화의 여신’이 아니라 ‘승리의 여신’, 즉 빅토리아로 바뀌었다. 또한 그녀와 함께 프러시아의 상징인 독수리와 참나무 잎으로 둘러싸인 월계관도 이때 함께 새롭게 추가되었다.

이후 브란덴부르크 문은 독일의 승리의 상징으로 떠올랐고, 중요한 행사 때마다 반드시 등장하는 명소가 되었다.

사두마차상은 동쪽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얹어졌고, 맨 중앙 문은 오직 왕실 일원들만 사용할 수 있었다. 이는 1814년에서 1919년까지 지속된 방침으로, 1차 세계대전 직후 왕실이 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다만 독일 의회의 신임장을 받으러 가는 외국 사절들, 그리고 부펠 장군의 후손들은 특별히 가운데 문을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브란덴부르크 문은 제 2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겨우 피해 파괴되는 것만은 면했으나, 전투 도중 포탄과 총알들이 기둥 군데군데 박히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또한 사두마차 상의 4개 말 조각상들 중 1개를 제외한 3개의 말 머리 상이 훼손되엇다. 현재 이 말머리 상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1989년에 베를린 장벽이 철거되고 동독이 무너지자 브란덴부르크 문은 자유와 평화를 상징하는 문으로 떠올랐다. 1989년 11월 9일에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축하하기 위해 수천 명이 이 문 앞에 모였고, 2009년 베를린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는 이곳을 출발점과 결승점으로 사용했고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독일 축구 국가 대표팀이 이곳에서 기념식을 열었다.

1353호 31면, 2024년 3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