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학 편집장과 함께하는 역사산책(57)

독일 지성의 허브(Hub) 바이마르(Weimar) ➁

바이마르를 걷는 일은 그 자체가 영광스럽다. 거리 어디에도 허투루 지어진 건축물이 없고, 이야기가 깃들여져 있지 않은 장소가 없다. 골목마다 바이마르에서 활동한 인물들의 상이 세워져 있고, 그들이 살았던 집이 보존되어 있기에 무조건 걸어야만 바이마르와 호흡할 수 있다.
바이마르의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도시 분위기 속에서는 아무리 감각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바이마르는 이들에게 영감과 사색을 불러일으킨다.
유엔이 1998년 ‘Classical Weimar’라는 이름으로 바이마르 구시가지 전체를 세계유산 리스트에 올렸듯 바이마르는 독일 고전주의의 본당이다. 괴테, 실러, 니체, 헤르더 같은 쟁쟁한 고전파들이 이 작은 도시를 유럽 문화의 중심축으로 키워냈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독일의 사상가와 예술가들은 바이마르에 모여들었고, 그리스 사상가들이 모여든 아테네 학당을 비유, “바이마르 학당”아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바이마르는 독일 고전주의의 중심지가 되었다. 당시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 서너 명 중 하나는 천재라 칭해지는 인물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바이마르는 독일 지성들의 집합소였다.
또한 이곳 바이마르에는 독일 민주주의가 깃들어있다. 바이마르헌법이 제정된 곳, 그러기에 독일 최초의 민주공화정인 바이마르공화국이 탄생한 도시이다.
어디 그뿐이랴, 예술을 예술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건축과 공예, 실생활에 접목시킨 바우하우스(Bauhaus)가 첫 발을 내딛은 곳도 바이마르이다.
튀링겐 주의 작은 도시 바이마르. 고전주의 대가들과 위대한 사상가들의 도시라고 불리는 곳. 유럽과 독일 철학과 예술사에 의미 있는 발자국을 남긴 이들이 오래 머물렀고, 머물고 싶어 했던 바이마르에는 지금도 그들의 영혼이 숨 쉬고 있다.

일름 강과 일름 공원 (Park an der Ilm)

바이마르를 둘러보는 방향에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바이마르 역에서 구시가지로 들어오는 것과, 구시가지와 붙어있는 일름강을 끼고 있는 공원(Park an der Ilm)근처에 주차해서 구시가지를 둘러보는 것이다. 가능하다면 두 번째 방법을 권하고자 한다.

우리는 일름공원 근처 Beethovenplatz에 위치한 지하주차장에 차를 주차 하고, 바이마를르 둘러보도록 한다. Beethovenplatz 지하주차장은 도린트(Dorint)호텔과 붙어 있어 찾기가 용이하다.

지하주차장에서 나오면 녹지로 된 광장과 만나게 된다. 우리는 이곳에서 집결하여 독일 지성의 허브인 바이마르를 살펴보도록 한다. 왼편에 위치한 계곡이 일름 강이 흐르는 일름 공원이다.

맑은 강(Ilm)과 파란 잔디, 키 큰 수목들로 이루어진 일름 공원은 바이마르 시민들의 편안한 휴식처다.

일름 공원은 괴테의 영향을 받아 조성된 고전시대 스타일의 공원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그저 일반적인 숲 같지만, 깊이 발을 들여놓을수록 그 안의 보물 같은 장소를 발견하게 된다. 고대 로마의 양식과 인테리어로 꾸며진 로마 하우스 안에 들어가 자연을 바라보면 의외의 이국적인 감성을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 괴테가 바이마르에 와서 초기 몇 년을 살던 작은 집이 이 공원 안에 소박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도 특별하다.

일름공원의 공식명칭은 일름강변공원(Park an der Ilm)이다. 남동쪽에서 바이마르 시로 흘러들어 와 굽이치던 일름강이 다시 북동으로 사라져가면서 양변에 넓은 평야를 부려놓았다. 물이 넉넉해서 중세에는 과수원을 만들어 가꿨다. 그러다 바로크 정원이 되었는데 1613년 5월 29일 대홍수 때 단 하루만에 정원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파괴가 너무 심해 복구를 포기했고 ‘백년의 잠’에 빠지게 되었다. 중간에 사람들이 채소밭으로 이용하기도 했고 30년 전쟁이 끝난 뒤 방사선 모양의 길을 내어 다시 정원으로 가꾸어 보려 노력한 흔적도 있었으나 1776년 괴테가 나타나기까지 거의 자연에 맡긴 상태였다.

길이 약 1.6km, 평균 폭이 300m, 총면적 약 48 헥타르의 땅이 고스란히 숲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지하수위가 높고 샘도 솟아오르는 곳이라 나무들이 아무 방해없이 무럭무럭 자랄 수 있었다. 괴테가 보니 풍경정원이 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괴테는 바이마르 공국의 추밀참사관이었으므로 공원 조성의 방향을 정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직접 설계하고 조성을 진두지휘했다.

자연스럽게 자란 숲에 나무를 솎아 산책로를 내고 로마하우스(Das Römische Haus), 괴테 정원집(Goethes Gartenhaus) 등의 소건축물을 배치하였다. 또한 푸쉬킨, 리스트, 등 일름공원 곳곳에는 시인들과 예술가들의 흉상이 제작되어 있다. 처음 조성된 이후 거의 손대지 않고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까닭에 유네스코에서 바이마르 시의 여러 문화재와 일름공원을 한데 묶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일름 강 공원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안나 아말리아 대공비 도서관(Herzogin Anna Amalia Bibliothek)이다.

안나 아말리아 대공비 도서관 1

안나 아말리아 대공비 도서관(Herzogin Anna Amalia Bibliothek, 이후 대공비도서관)은 일름공원에서 구시가지로 내려가는 언덕 위에 서있다. 일름공원에서 올려다 본 대공비도서관은 언 듯 보기에는 작은 성같이 보이지만, 이곳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으로 꼽히고 있다.

괴테와 실러, 헤르더, 빌란트 등 당대의 대단한 작가, 음악가, 철학가들을 바이마르로 데려와 바이마르를 독일 고전주의의 메카로 만들었던 안나 아밀리아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천국이다. 바이마르 성의 일부로 초록성이라고 불리는 건물의 로코코 홀은 18-19세기에 역점을 둔 연구 중심의 도서관으로 백만 권의 장서를 보관하고 있다.

대공비도서관을 살펴보기 전 우리는 안나 아말리아 대공비의 삶을 둘여다 보아야 한다. 바이마르는 세 사람의 노력에 의해 완성되는데, 바로 안나 아말리아, 그의 아들 아우구스트 대공 그리고 괴테이다.

지혜로운 여자, 안나 아말리아

안나 아말리아 대공비 1739- 1807년)는 프리드리히 2세의 조카딸이자 브라운 슈바이크 볼펜뷔텔 공 카를 1세의 딸이다. 안나는 도서관 문화가 발달한 독일 볼펜뷔텔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볼펜뷔텔은 독서광이었던 왕이 선구적인 도서관을 세운 곳으로 유명하다.

이곳에서 자라면서 안나는 책을 많이 읽고 가정교사들과 독서토론을 즐겼으며, 그림을 그리고, 자신이 작곡한 곡으로 연주하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다양한 재능이 돋보여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소녀였다.

안나는 관례대로 열여섯 살이 되던 1756년에 에른스트 아우구스트와 결혼하여 소공국 바이마르의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결혼 2년 뒤인 열여덟 살 때 남편이 죽는 불운이 닥친다. 장남 칼 아우구스트는 이제 태어난지 8달, 그리고 뱃속의 둘째는 겨우 태동을 시작했는데, 남편이 죽다니…. 안나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그의 ‘인품’에 대한 내용이 많다.

그녀는 어떤 상황이 닥쳐도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절망할 시간에 그것을 벗어날 대안을 찾는 슬기로운 사람이었다. 열여덟 살의 안나는 딱 일주일간 슬퍼한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장남에게 책을 읽어주고 자신도 책을 읽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어린 아들을 대신하여 공국을 다스리며 유복자인 프리드리히 페르디난트를 낳는다. 열여덟 살의 어린 어머니이자 소공국 바이마르의 실질적 통치자였던 안나는 체구는 작았으나, 오래 생각하고 핵심만 간단하게 말하는 ‘위엄 있는’ 사람이었다.

바이마르를 독일 고전주의의 메카로 만든 힘은 어린 미망인의 지혜로운 모성애에서 비롯되었다.

안나는 장남이 성년이 되어 즉위할 때까지 바이마르 공국을 다스렸다. 아들이 훌륭한 통치자로 자랄 수 있도록 교육시키기 위해서 괴테와 실러 같은 독일의 우수한 두뇌들, 아들의 정신적인 지도자가 되어 줄 이들에게 삼고초려 정성을 다해 그들을 바이마르로 불러들였다.

인재를 찾고, 그들을 곁으로 불러들이고, 오랜 시간 교류하며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안나 또한 그들 못지않은 지적 내공을 쌓은 사람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녀 스스로도 번역과 작곡을 할 만큼 뛰어난 지성과 교양을 갖추어 바이마르라는 작은 공국을 유럽 제일의 문화강국으로 만들었다.

1661년, 안나 아말리아는 일름강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아름다운 강변에 세워진 바이마르 궁성의 일부인 초록성을 도서관으로 개조하기로 결심한다. 자신이 성장할 때 세상을 사는 법을 책을 통해 배웠던 ‘볼펜뷔텔 도서관’과 같은 지식의 창고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아름다운 초록성에 어울리는 바로크 양식의 서가를 꾸미는 게 안나의 꿈이었다.

이 대공비 도서관은 100만권 정도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고, 18~19세기에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독일의 3대 도서관으로 꼽힌다. ‘세기의 판본’인 코타 출판사의 <파우스트> 완판본(1854), 루터 번역 <성서> 초판본(1534)이 이곳에 있다. 1991년, 수립 300주년을 맞아 아나 아말리아가 세운 도서관에는 그녀의 이름이 붙여졌다

안나 아말리아는 장남이 즉위한 뒤 국립극장 앞 괴테 광장이 내다보이는 비툼스저택(Wittumspalais, 미망인의 궁)로 물러난다. 그 집에서 매주 수요일 저녁마다 괴테와 함께하는 ‘수요 책모임’을 열었고, 음악회도 열었으며, 국립극장에서 연극을 관람하고 토론하는 즐거움을 만끽하며 여생을 보냈다.

문화·예술적 소양이 풍부했던 아름답고 강한 여인 안나 아말리아. 그의 장남 아우구스트 대공은 어머니의 지혜로운 교육 방식대로 잘 따라주었고, 괴테보다 8살이 어렸지만 생애 끝까지 괴테의 제자로, 더불어 친구로서 도움을 받으며 바이마르를 다스렸다.

다음 회에서는 대공비도서관의 아름다운 내부와 수많은 귀한 장서들을 살펴보도록 한다.

1353호 20면, 2024년 3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