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군사 제도 ➂
독일 연방군의 뿌리는 프로이센군이다. 독일제국을 거친 후 바이마르공화국 군대 제국군(Reichswehr, 1919~1935)과 히틀러의 제3제국의 나치군(Wehrmacht, 1935~1945)은 양차 대전의 주역이 되었다. 1945년 5월 8일 독일이 무조건 항복한 이후 나치 독일군은 1946년 8월 공식 해체되었다. 독일은 미·소·영·프 전승 4개국에 의해 탈군사화가 되었고, 군비계획 자체가 엄격히 금지되었다.
서독은 1954년 10월 23일 서유럽연합(WEU)에, 1955년 5월 5일 나토에 각각 가입했다. 1955년 11월 12일 샤른호르스트 장군탄생 200주년 기념일을 기해 서독 연방군이 공식적으로 창설되었고, 1956년 4월 1일 독일 군법의 효력이 발효됨에 따라 ‘연방군(Bundeswehr)’이라는 명칭이 부여되었다.
연방군, 군사대국화의 길로 가는가
최근 독일은 정치·군사적으로 과거의 모든 멍에를 완전히 벗어던진 것처럼 보인다. 일부 주변국들은 통일독일이 장차 나치의 망령을 되살리며 과거 전통대로 군사대국화의 길을 갈지도 모른다고 우려한다. 그러나 전반적인 안보환경과 다음과 같은 요인들을 입체적으로 분석해볼 때 독일의 군사대국화는 불가능할 것이다.
첫째, 연방군은 나토 집단방위체제의 일부로 창설되었고, 독일의 영토방위작전은 전적으로 나토의 틀 안에서 이루어져 연방군의 독자적인 군사적 돌출 행위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둘째, ‘2+4조약’에 따라 연방군은 집단안보체제 내에서 다국적군의 일원으로 운용되고 있다. 독일의 군단은 모두 다국적 군단(독일-네덜란드, 미국-독일, 독일-덴마크-폴란드)으로 구성되어 있다.
셋째, EU 회원국들이 이미 경제통합뿐만 아니라 ‘공동안보방위정책’을 수행하는 상황에서 과거와 같이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민족국가 간의 패권 쟁탈은 더는 불가능하다.
넷째, 연방군은 ‘2+4조약’에 따라 핵 및 화생방무기 보유가 금지되어 있고, 병력 규모도 최대 37만을 넘지 못하도록 제한되어 있다.
다섯째, ‘군에 대한 문민통제와 의회통제’라는 제도적 장치로 연방의회가 연방군의 임무·군 구조·예산·조달 등을 결정하며, 연방군의 해외파병은 연방 하원의 승인 없이는 불가능하다.
여섯째, 연방군은 ‘군 특명관’ 제도에 따라 제2의 나치군대가 되지 않도록 의회 차원에서 통제한다.
일곱째, 군대가 특정인에 오용될 여지를 근본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군 내부에서도 군령권과 군정권을 구분하고, 이에 따라 군 수뇌부(합참의장과 각 군 참모총장)의권한도 분산하고 있다.
여덟째, 연방군은 양차 대전의 부정적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고 민주주의와 개인의 자유·인권을 존중하는 군대로 거듭나기 위해 ‘내적지휘’라는 지휘통솔 개념을 도입하였다.
이와 같은 전략 환경과 국방 차원의 각종 제도 이외에 독일의 군사대국화를 막는 가장 본질적 요인은 독일 국가와 사회가 연방군을 과거 히틀러 나치군과 철저히 단절하려는 노력을 지속한다는 점이다.
독일 국방부는 본과 베를린 두 곳에 있다. 국방부 본부(직원 1,270명)는 아직도 본에 있다. 그러나 정부 소재지의 베를린 이전 계획에 따라 국방부 인력 중 장관과 합참의장, 핵심정책부서(직원 970명)는 수상이 있는 베를린으로 이전했다. 베를린 국방부 건물은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계획(Opreation Walküre)의 주모자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Claus Schenk Graf von Stauffenberg) 대령이 근무하다 처형된 바로 그 건물이다.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은 히틀러 전쟁지도부(Wolfsschanze, 현 폴란드 지역 소재)에서 히틀러를 제거하기 위해 시한폭탄을 터뜨렸으나 히틀러는 경미한 부상만 당한다. 당일 히틀러 암살주모자인 슈타우펜베르크 대령, 베크(Ludwig Beck) 예비역 대장, 올브리히트(Friedrich Olbricht) 소장, 크비른하임 대령(Albrecht Ritter Mertz von Quirnheim), 해프튼(Werner von Haeften) 중위 등이 체포되어 즉결재판에 따라 총살됨으로써 히틀러 암살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건물과 정원 안에는 히틀러 독재에 반대했던 세력들을 추모하는 갖가지 기념 형상물이 있다. 국방부 앞 거리명도 슈타우펜베르크 가로 명명했다. 모두 과거 히틀러의 만행을 반성하고 오욕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독일의 단호한 의지로 풀이된다. 이후 독일은 슈타우펜베르크 대령 일행의 저항정신을 기리며, 기본법(헌법) 제20조에 저항권(민주국가 체제를 위협하는 독재자가 등장할 경우 이에 항거할 국민권리)을 신설했다.
오늘의 연방군도 국방 임무가 숭고한 임무라는 철학으로 무장되어 있다. 연방군에는 말단 이등병에서 최고 계급으로 대장인 합참의장에 이르기까지 전투복, 전투화, 모자는 물론 부대 내 급식 내용이 같다. 아무리 계급이 높은 상관도 예하 부하사병에게조차 존칭어를 쓴다. 상관이 이유 없이 고함을 칠 경우, 군 특명관에게 당장 보고된다. 그 대신 연방군은 전적으로 임무 위주로 돌아간다.
연방군의 특성이나 전문성은 정치권으로부터도 철저히 존중받는다. 예를 들면, 1997년 키르히바하(Hans-Peter von Kirchbach) 육군 소장은 ‘오데르 강의 영웅(Held von der Oder)’으로 불렸다. 오데르 강 홍수 사태 때 연방군 3만 명을 동원해 수재를 지원한 공로로 일약 영웅이 된것이다. 이 일로 1998년 기민당 소속 헬무트 콜 수상은 육군 소장인 그를 합참의장으로 내정하는 결정을 했다. 그러는 사이 1998년 야당인 사민당으로 정권이 바뀌었는데도 사민당 정권은 기민당 정권의 결정을 번복하지 않고 그를 합참의장에 임명했다.
2002~2009년에 합참의장을 지낸 볼프강 슈나이더한(Wolfgang Schneiderhan) 장군도 사민당 정권과 기민당 정권이 교체되는 상황에서 의장직을 7년간 수행했다. 임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든 훌륭한 성과를 내면 정권이 교체되는 것과 무관하게 전문성을 인정 받아 계속 직을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1360호 29면, 2024년 4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