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유물에 빠진 미 게임사, 조선 ‘죽책’ 152년 만에 귀국시켜
“아니 이게 왜 여기에?”
2017년 6월 7일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조사활용2팀의 김동현씨는 인터넷으로 해외 경매에 출품된 한국 문화재 정보를 검토하다 깜짝 놀랐다. 프랑스 한 경매 사이트에 한국 유물로 올라온 사진 때문이다. 제목은 간단했다. ‘여섯 페이지의 필사본, 1759년 결혼 관련 문서’. 사진은 명함 크기보다 작았지만 가지런히 엮은 대나무 위에 글씨를 새기고, 위아래로 황금색 변철을 덧댄 모습이 분명 ‘죽책(竹冊)’이었다.
“국립고궁박물관이라면 모를까, 경매도록에 실릴 유물이 아니었으니 놀랄 수밖에요. 말 그대로 심장이 뛰었죠.”(김동현 현 기획조정부장·이하 김)
조선 왕실은 왕에게 존호·시호·휘호를 올릴 때나 왕비·왕세자·왕세자빈을 책봉할 때 ‘책(冊)’을 제작했다. 대상이 왕·왕비이면 옥(玉), 왕세자·왕세자빈이면 대나무를 썼다. 그리고 이 책들은 주인이 세상을 떠나면 종묘에 봉안됐다. 그러니 죽책은 왕실 밖으로 유출될 수 없는 귀한 물건이다. 민간에서 사사로이 제작할 수도 없던 물건인데 프랑스 고미술 경매 시장에 등장한 것이다.
김씨가 전문가들과 함께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을 뒤져 밝혀낸 죽책의 정체는 ‘효명세자빈 책봉 죽책’. 1819년 신정왕후가 효명세자(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 속 박보검이 맡았던 역할로, 어질고 총명함이 남달랐지만 부왕의 대리청정을 수행한 지 4년 만에 사망했다)의 세자빈으로 책봉되던 해에 제작된 것으로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에 의해 약탈당했거나 불타 소실된 것으로 추정돼 왔다. 2017년 파리에서 발견되고, 경매 낙찰 후 2018년 1월 한국으로 돌아왔으니 152년 만의 귀국이었다.
“워낙에 귀한 유물이라 화물 운송을 할 수 없어 당시 팀장님과 제가 파리로 날아가 007 가방에 넣어 직접 모셔 왔죠. 바닥이나 짐칸에 둘 수도 없어서 팀장님과 저 사이에 따로 좌석 한 자리를 예약하고 양쪽에서 호위했어요. 잠도 교대로 자고, 가방과 손목에 끈도 연결하고. 승무원들의 호기심 가득 찬 질문에도 혹여 잘못될까 답도 못 하고. 정말 숨 막히는 비행이었죠.”(김)
2023년 6월 20일 문화재청은 조선왕조 어보 어책 교명, 아미타여래구존도 등과 함께 이 죽책을 보물로 지정하고 명칭도 ‘문조비 신정왕후 왕세자빈책봉 죽책’으로 조정했다. 이날 누구보다 감격스러웠던 사람은 직접 경매 사이트에서 유물을 찾아내고 환수작업까지 책임졌던 김동현씨, 그리고 라이엇 게임즈 사회환원사업부문 구기향 총괄이었다.
게임회사가, 그것도 미국에 본사를 둔 외국 회사가 우리 문화재 환수와 보물 지정에 왜 감격할까?
라이엇 게임즈는 매월 전 세계 1억 명 이상이 사용하는 ‘리그 오브 레전드(League of Legends)’, 일명 롤(LoL)을 개발하고 유통하는 글로벌 게임사다. 2011년 라이엇 게임즈 코리아를 설립하고 한국 서비스를 시작하면서부터 곧바로 사회환원사업을 고민했다. 글로벌 게임 안에 한국의 구미호 전설을 기반으로 한 여성 캐릭터 ‘아리’를 넣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돈이 많고 적고를 떠나 우리라서 할 수 있는, 직원도 게임 유저도 모두 기뻐하고 보람을 느낄 만한 프로젝트를 찾는 게 제게 떨어진 특명이었어요.”(구기향 총괄·이하 구) 신혼 2개월 차인 구 총괄이 밤낮으로 고민하는 것을 보고 힌트를 준 사람은 미술 관련 일을 하는 남편이었다. “‘문화재 관련 사업을 하면 국민들이 다 좋아할 것 같다’고 조언하더라고요.
마침 그때 미디어에선 어느 중학생이 ‘3.1절’을 ‘삼점1절’로 읽는 장면이 화제가 되면서 ‘요즘 젊은이들이 우리 역사와 문화에 관심 없다’는 게 이슈가 됐죠. 게임도 문화인데, 우리가 젊은 친구들과 제일 잘 교감하는 회사인데, 우리가 직접 역사·문화 사업에 나선다면 젊은 유저들이 관심 있게 들어주지 않을까 생각했죠.”(구)
“가격 없는 문화재, 경매 타이밍 중요”
라이엇 게임즈는 2012년부터 문화재청과 후원 약정을 맺고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단, 문화유산국민신탁 등과 함께 ‘한국 문화유산 보호 및 지원’ 프로젝트를 펼쳐왔다. ‘석가삼존도(2014년)’ ‘문조비 신정왕후 왕세자빈책봉 죽책(2018년)’ ‘척암선생문집 책판(2019년)’ ‘백자이동궁명사각호(2019년)’ ‘중화궁인(2019년)’ ‘보록(2022년)’ 등 총 6점의 국외소재문화재가 국내로 돌아오는 데 기여했다. 그동안 관련 프로젝트를 위해 라이엇 게임즈가 기부한 지원금은 총 76억7000만원. 문화재청과 민간의 협력 사례 중 최고 금액으로 꼽히는데, 더욱 인상적인 것은 매년 지원금 예산을 수억 원씩 미리 책정해 둔다는 점이다.
“문화재 환수 이슈로 라이엇 게임즈가 언론에 많이 노출되니까 꽤 많은 기업들이 문의를 해 오는데 공통질문이 ‘연내 안에 이슈를 낼 수 있냐’ ‘올해 안에 환수해 올 타깃 리스트가 있냐’였어요. 라이엇 게임즈와 함께한 6건의 환수 프로젝트만 봐도 한 해에 3건이 성공할 때도 있지만, 한 건도 없을 때가 있었어요. 라이엇 게임즈는 매년 꾸준히 큰돈을 후원하면서도 묵묵히 기다려줬죠. 의사결정을 단 며칠 만에 해주는 것도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에요.”(김)
국외로 반출된 문화재가 환수되는 데는 통상 두 가지 방식이 있다. 기증과 경매를 통한 매입이다. 특히 경매로 문화재를 되찾아올 때는 ‘타이밍’이 중요하다. 관련 기관들과 여러 협의를 거쳐야 하는 국고가 움직이기 힘든 이유다. 이럴 때 라이엇 게임즈처럼 미리 예산을 책정해 두고, 관련 사업에 이해도 역시 높은 민간 기업은 더 없이 좋은 파트너다.
라이엇 게임즈는 문화재 환수 지원 외에도 ‘서울 문묘와 성균관 및 전국 4개 서원의 건축 3D 디지털 측량’ ‘조선시대 왕실 유물 보존처리 지원’ ‘4대 고궁 보존 관리 지원’ ‘이상의 집 보수 정비’ 등을 진행했다. 그 결과 2017년 외국계 기업 최초로 문화유산보호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또 게임 유저들을 대상으로 한양도성·서촌 걷기를 중심으로 한 ‘티모 문화유산 원정대’ 등 역사교육 체험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1360호 30면, 2024년 4월 26일